저녁 시간, 성희는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소식에 마음이 심란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은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 때도 어머니는 없었고, 고등학생 때는 아버지가 쓰러지시는 바람에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밥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았다. 두 딸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하루 일정을 비웠다. 할머니를 보러 가자는 이유에서였다.
성희에게는 다섯 언니와 막내 남동생이 한 명 있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하셨고, 수완이 좋아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갑부였다. 그러나 아는 사람에게 잘못 맡겨 빈털터리가 되었고, 충격으로 쓰러지셨다. 50대의 어머니는 남편을 간호하고,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희의 기억 끄트머리에 간신히 몇 추억이 남아있다. 어머니도 충격이었을 텐데, 아버지는 왜 몸져눕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여전히 이해 불가다. 만일 그때 아버지가 배신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혹은 아버지가 심기일전해서 다시 힘을 내었더라면 지금과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서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어머니지만, 첫째 아이는 칼처럼 '그건 그거, 이건 이거'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막내아들이 이혼하고부터는 셋째 언니가 어머니를 모셨다가 몸이 상해 자매들이 힘을 합쳤다.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는 집안 사정이 있어 어려웠고, 넷째 언니와 성희가 번갈아가며 어머니와 살기로 했다. 이번엔 성희 차례였다. 다만, 성희네는 맞벌이 부부였고, 둘째는 대학 기숙사에 지내는 바람에 관리는 첫째 몫이었다. 옛날 어른과 함께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순응보다 용기를 강조해서 키운 큰 아이에게 할머니의 구시대적인 발상과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다. '여자는~'으로 시작해 '여자니까.'로 맺어지는 어머니의 말과 미운 시어머니 '짓'에 고생해 미운 정도 안 남아있다고 툴툴거렸다. 얘기를 들어보면 딸인 성희도 이해불가인데, 손녀는 오죽했으랴. 어머니의 고된 삶을 이야기하니 알아들었지만 받아들이기엔 자신의 속이 좁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두 딸과 SRT를 타고 전라도까지 내려갔다. 넷째 언니 집 근처 요양원에 계시던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는 타 지역 사람의 경우 코로나 검사가 하루 전에 있어야 했는데, 성희는 그 사실을 전달받지 못하고 무작정 병원을 찾았다. 폐에 물이 차 혈액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정작 의사는 오전 진료가 없어 만나지 못했고, 코로나 검사 결과지가 없었기에 아이들은 1층 로비에서 기다려야 했다. 성희는 동생과 병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창 밖에서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손이 퉁퉁 붓고 살은 전보다 더 빠져 가죽밖에 남지 않은 어머니가 성희의 이름을 부르자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왔다.
원망했었다. 미워하고 포기했었다. 나이를 먹고 가정을 꾸리면서 나는 다른 어머니가 돼야지 다짐한 대로 아이들에게 베풀었다. 지금은, 이해가 된다. 용서도 했다. 안쓰럽기까지 하다. 매년 한파가 찾아오는 겨울을 버텨낸 어머니가 대단하다. 큰 딸이 말한다. '고된 삶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다시 내 엄마 해줄래?' 성희는 궁금해졌다. 어머니였다면뭐라고 대답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