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의 여행 2021년 9월
이해력과 이해심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해력은 이해하는 것이고, 이해심은 이해해 주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만화 <찌질의 역사>에서 두 명의 상반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A는 문제를 공감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해력을 보인다. B는 "뭘 하든 항상 응원할게!"라며 이해심 가득하고, 따뜻하고, 또 누구나 으레 해줄 수 있는 말을 되풀이한다. 둘 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을 거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 진심이 100%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해결책만 늘어놓는 사람은 꼰대가 될 수도 있다. 뭐가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혹자는 이해심이 재능이며 이해력이 키울 수 있는 부분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이해력과 이해심은 동시에 키워야 하는 능력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이해심은 이해할 줄 아는 마음이고, 이해력은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가지를 모두 갖춘다면 좋겠지만, 내 영혼은 이해력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깊은 이해심을 갖추기 위해 일단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심이 더 가득한 타인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거제도는 그런 답답한 내 마음을 뻥 뚫어주기에 완벽한 여행지였다.
산이 맞는 사람이 있고, 바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는 굳이 꼽자면 산을 선호하는 편인데, 흙과 풀 내음에 건강해짐을 느낄 때가 많다. 다만, 벌레를 극도로 두려워해서 자주 찾지 못한다. 바다의 파란 파도를 보고 있을 때면 막막해 멈췄던 사고 회로가 다시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매일 보고 있으면 쉬고 싶은 두뇌가 멈추질 못할 거 같다는 문제가 있지만.
거제는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군사 요충지였고, 땅굴은 일제의 무기 창고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망치로만 파낸 굴이라고 한다. 하나의 관광 명소가 된 땅굴 마을에 대한 역사를 알기 전까지는 그저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만 생각했었다. 고된 작업에 흐른 수많은 땀방울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즐기고, 또 역사를 인지하면 좋겠다.
나는 물을 좋아한다. 하루에 2리터 이상을 마시는데, 다이어트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이 금방 마르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한다. 어렸을 땐 친구들과 비 맞으며 뛰어다니기도 했고, 장마철엔 베란다에 앉아 정원을 흠뻑 적시는 모습에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비를 맞는 상황은 꺼린다. 문제는, 거제도에서의 이틀이 태풍과 맞물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피신한 곳은 거제의 정글 돔이었다.
정글 돔은 서울식물원만큼 크고 잘 꾸며진 식물원이었다. 둥지로 포토존까지 마련되어 있어 가족 또는 연인 단위의 방문객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평소였으면 싫어했을 나지만, 최근 들어 사진 찍는 것에 거부감이 크게 사라져 짧은 줄 행렬에 한 자리 차지하기도 했다. 태풍이 심하게 와서인지 방문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길가에 핀 개나리를 보고 감탄하는 어머니는 이해심도 깊고, 이해력이 뛰어난 분이시다. 식물이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고됐을지 안타까워하면서, 결국 꽃을 피워낸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난 어머니를 닮지는 않은 것 같다. 가던 길을 멈춰 선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고 자전거에 올라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식물원에 가는 것은 좋아한다. 흙냄새가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기분이다. 왠지 꽃과 나무를 보고 있을 때면 1cm 정도였던 이해심의 깊이가 쑥쑥 깊어진달까.
날이 갰을 때 배를 타고 외도로 향했다. 섬이라고 해서 평탄할 줄만 알았는데 모두 오르막길이었고, 남쪽 지방의 9월은 서울의 한여름과 비슷했다. 예정에도 없던 관광이 쉽지 않자 흐느적거리며 올랐음에도 체력이 금세 고갈됐다. 땀이 나질 않으면 곧바로 두통이 생기는 바람직하지 못한 체질 탓에 걱정이 컸다. 다행히, 푸르른 잎들과 어우러진 에메랄드 바다가 열을 식혀주었다. 지쳐서 말도 잘하지 않고, 평소에 비해 좋지 못한 표정을 보였을 텐데도 동행인은 짜증 한 번 안 냈다. 그는 이해심이 깊은 사람인 듯하다. 내 고통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그에 다시 한번 고맙다.
계룡산 정상과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잇는 거제관광 모노레일을 탔다. 놀이공원을 연상케 하는 모노레일의 경사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거기다가 모노레일은 4인 기준으로 탑승하여 다른 일행과 같이 탔는데, 아이의 요란법석에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괴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정상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전경, 햇살, 하얀 구름에 모든 짜증이 사악 사라졌다. 계룡산 정상은 내려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풍으로 바람의 언덕 위 풍차를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근처 뷰 맛집인 카페에서 아쉬움을 가까스로 달랬다. 멋있는 풍경은 사람을 위로할 줄도 아는지,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도 마치 연출된 것처럼 느껴졌다. 동행인과 같이 음료를 나눠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에게 고맙고 미안한 점, 행복한 순간을 공유하며 그를 더 이해하게 됐고, 신뢰를 키울 수 있었다.
우리 마음을 알았던 건지, 거제도는 태풍의 기운을 물리치고 해를 띄웠다. 개인 날씨에 매미 성으로 향했다. 태풍 매미의 피해로 절망했던 한 피해자가 거제에 찾아오는 태풍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돌을 쌓아 만들어낸 성이라고 한다. 굳건한 의지와 타인을 위한 희생이 담겨있어서 그런지 더욱 거대해 보였다. 나는 과연 남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친구가 나로 인해 행복하다면 나 역시 행복하다. 그래서 친구, 가족이 행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분명 있다. 하지만 삶을 전부 바쳐야 한다면, 모르겠다. 아직 나는 배울 것이 많은 욕심꾸러기가 아닌가 싶다.
여행에서 식비에 가장 지출이 없는 유형이지만, 동행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도전한 딱새우는 후회할 수 없는 맛을 선사했다. 식당 아주머니께서도 친절하셨고, 밑반찬도 가득했으며, 인심이 후하셨다. 딱새우는 처음이었는데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곤 한다. 이후 김해로 넘어가 마신 산딸기 음료도 잊지 못할 달콤 시원함을 안겨 주었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을 이해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난 공감보다는 이입을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과도하게 이입해 감정적으로 지치고 만다. 아마 그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해심의 깊이를 얕게 만들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공감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면 좋겠는데 해결책만 떠오르려 하다 보니 스스로가 답답해진 것도 같다. 그래 놓고선 다른 사람에게 공감부터 해달라고 하는 꼴이니 우습기도 하다. 그런 개인적인 고민들을, 거제도에 살짝 덜어두고 왔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차를 두어 시간 더 타고서야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는 먼 곳에 툭 내려놓았다. 맑은 하늘, 푸른 들판, 파란 바다가 지금은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듯해서 은근슬쩍 어깨를 털었다. 앞으로 노력해서 바라는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으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하얀 구름이 말해주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