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의 여행 2021년 10월
유난히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너무 피곤해서 졸림에도 오히려 뒤척이게 되는 경우가 있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때 쉬이 잠들지 못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는, 걱정이 많아서였다. 예민한 성격 때문인 건지 몸이 약했고, 컨디션이 늘 저조하다 보니 더욱 세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무게를 외부에 티를 내고 싶지 않을뿐더러, 내서 좋은 것도 없었기에 감췄다. 하다 못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너, 왜 그렇게 예민해?"하고 내 약점을 들춰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추면 감출수록 흉터는 진하게 남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사람 없는 곳이 좋다. 그저 파란 하늘, 푸른 들판, 상쾌한 편백나무 향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따사로운 햇살, 나무 그림자 틈으로 흙 비린내를 싣고 오는 바람 속에서 잠들고 싶다. 여행했던 국가 중 하나를 떠올리라면, 스위스의 인터라켄 정도. 그리고 이번에,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국내 여행지를 발견했다. 대전이었다.
한옥에서 살고 싶다거나, 자연 친화적인 삶을 꿈꾸지는 않는다. 불편한 건 싫고 벌레에 공포증을 가지고 있어 참고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가 담긴 공간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옛 건물의 뒤편, 해와 그림자가 만나는 지점을 보고 있을 때가 그렇다. 이유는 모르겠다. 역시 싫은 건 이유가 있어도, 좋은 건 "그냥"인가 보다.
대전은 고요했다. 회사 동료가 대전은 할 게 없기 때문에 당일치기가 제격이라고 말했는데,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스펙터클한 놀이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전시회가 있어 사람이 몰리는 곳도 없었다. 그나마 새로 연 현대백화점이 핫플레이스였다. SNS에서 해시태그로 가득한 맛집들은 줄을 서서 대기해야 했다. 아이스크림과 빵집이 특히 그랬는데, 성심당을 다녀온 후라서 케이크나 예쁜 빵들은 눈요기로만 흘깃 보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줄을 섰다. 아마 내 뱃살은 다 아이스크림 때문이겠지.
뭐니 뭐니 해도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칼국수와 성심당이다. 회사 동료에게 대전에 놀러 간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추천해준 음식이 두 개였다. 특히 칼국수를 찬양하다시피 했는데, 맛집으로 알려진 곳들이 있지만 사실 어딜 들어가든 다 맛있다고 자신했다. 다녀온 뒤에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칼국수는 대전에서 먹어야 한다. 옛날 옛적, 대전에 밀가루 공장이 있어서 칼국수가 흔한 지역 음식이 됐다는 유래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서울은 이런저런 음식들이 많은데 뭐에 특화되어 있지 한참 고민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현재 내가 거주하는 지역도 딱히 뭐가 없는데, 그래서 그런가 나도 이런저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 된 게-라는 생각도 든다.
10월의 대전은 핑크 뮬리가 한창이었다. 산책할 수 있는 마을 호수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여행지에서는 꼭 사진을 찍고 만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 다른 사람이 찍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좋은 장소를 찾고, 기다렸다가, 순간을 담는다. 어쩌면 노래 가사처럼 찰나가 영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앨범을 꾸미는 걸 수도 있겠다.
동행인과 투호로 내기를 했다. 평소 스포츠를 좋아하고 특히 농구를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기에 내가 낸다는 마음으로 평온하게 게임에 임했다. 결과는 대반전, 정말 배 터지게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먹었다.
향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는 늘 향수를 선물로 주곤 한다. 특정한 향을 선호하고, 상황에 맞게 뿌리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간편하면서도 생색낼 수 있는 선물이라나. 섬유유연제처럼 깨끗하고 깔끔한 향을 좋아한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빨래방 냄새다. 방 안에는 교보문고 디퓨저가 있다. 이들을 왜 좋아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이 화창한 숲 속에서 나른한 바람에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살짝 몽롱한 상태일 때 항상 이런 향들이 났었다. 그런 포근함을 대전에서 느꼈다.
사람들은 느긋했다. 얼마 못 가 빨간 신호에 걸려버리는 서울 한복판에 등장한 비싼 스포츠카의 굉음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빵빵 거리는 부산 도로는 다른 세상 얘기였다. 있을 거 다 있는데 재미는 없다는 호평도 혹평도 아닌 도시는 내겐 안성맞춤이었다.
스위스는 동생과 꼭 한 번 다시 가기로 약속한 유럽 여행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미소가 흘러나오던 여름날 기억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하다. 대전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잠시 머물고 싶은 동네다. 심신이 지친 어느 날, 문득 떠오를 칼국수의 맛과 갓 구워진 빵의 향이 그날을 위로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