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한송이 Sep 01. 2023

자기 학대

26화

어지럽고 메스껍고 힘이 쫙 빠지니까 바닥에 냅다 엉덩이를 내리꽂은 거였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나와보지도 않는 옆집 청년의 태도가 괘씸해서

오기로 버틴 지도 벌써 반나절이다.


용서를 구하면서도 끝까지 왕의 침소 앞에서 버티고 절 하던 세자의 심정이 꼭 이랬을 것만 같다.


참나, 마지막에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매몰차야 해?

그게 미안한 사람 태도야?

그냥 형식 상 말해놓고 진심인 것처럼 위장하는 거밖에 더 되냐고.


애초에 원인 제공은 오롯이 내가 해놓고서 남 탓을 일삼으며 시간을 때웠다.


언젠간 나오겠지.

그동안 행동 패턴을 분석해 봤을 때 집에 있는 게 고문인 사람일 거야.


나는 벌레를 극도로 두려워하는데 감사하게도 내 생각대로 이뤄지는 마을에 있어서 그런가

가을 곤충 울음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평온함이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헛된 기대를 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 시간을 쓰는 게 그토록 싫었다.

가만히 있는 건 한심한 이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쓰고 방전되어 잠들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는 게 루틴이었다.


여기선 내 철저했던 루틴이 시작부터 깨졌다.

아니 애초에 없었다.

하루하루가 충격과 놀라움,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생존 스킬을 배웠다면, 이곳에선 왠지 감정을 공부하는 중인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지금 사과받아달라고 여기서 시위하고 있진 않겠지.

저 사람 감정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말야.


"잠은 집 가서 주무세요."


창문 밖으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싶긴 한데, 다리가 저려서 못 일어나겠어요."


말투가 제법 사근사근해진 게 어느 정도 감정 정리가 된 것처럼 들렸다.

내 말에 입술을 앙 깨무는 모습을 보니, 웃음을 참는 것도 같았고.


"미안해요. 그땐 친구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었어요. 

내가 원래 그래요. 늘 그렇게 못난 사람이었어요."


"알아요. 자기 자신한테는 누구보다도 가혹한 사람인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청년과 한참을 마주했다.


작가의 이전글 데자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