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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한송이 Sep 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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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다.

푸르뎅뎅한 거실을 기어 다니던 나는 좁은 부엌에서 간신히 쌀을 씻는 이모를 쳐다봤다.

나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을 임신한 엄마를 위한 이모의 배려 덕에 가진 기억이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올 때면 나와 내 동생은 옷장 서랍에 들어가 숨었다.

내 시야가 가려지면 아무도 나를 못 볼 거라 생각한 순수한 우리의 장난을 맞춰준 아빠 덕분에 생긴 기억이다.


내게는 늘 적이 많았다. 어쭙잖은 애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얕은 지식을 전부로 착각해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주변에 도사렸다. 그래서 나는 나를 최고이자 최선의 친구로 삼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과 관계된 기억이 또렷한 걸지도 모른다. 그게 전부라서. 그게 오직 나라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부끄러운 행동들, 솔직함과 언어폭력의 차이를 구분 짓지 못한 한심한 언행들, 그로 인해 상처받았을 모든 이들에게 사과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뇌가 겸손하게 살라고 가르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나를 잃지 않고.


나는 늘 회상하며 살아왔다.

내 곁 소중한 사람을, 여행했던 뜻깊은 장소를, 잊지 못할 순간을.

아프기 전까지는 분명히.


여기에 오게 된 이유도 결국 아파서였다.

아파서 살고 싶지 않아 자해를 했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인간관계에 허탈함을 느꼈다.

내 유일한 친구는 나임을 잊고, 타인에게 의존해 아픈 걸 남탓하고, 세상을 욕하고,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머무르게 됐다.

내가 스스로 온 셈이지만.


"근데 이제 와서 살겠다는 게 웃기지 않아요?"


맞는 말인데, 거슬린다.

옆집 청년은 그의 침대에 걸터앉은 내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나쁜 기억은 좋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자산이 되고,

좋은 기억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동기가 되죠.

근데 그 기억들을 싹 지웠잖아요.

아니, 억지로 묻었지.

그래놓고 다시 욕심이 생긴 거죠.

아픈 거 다 이겨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솟아나고."


지은 죄가 있어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도 이미 수차례 느낀 감정이고, 그가 한 말에 틀린 건 없었으니까.


"다 잊은 거 아니죠? 그 고통.

주삿바늘 수십 개를 한 번에 팔뚝에 박고 전기 충격을 줬던 날, 입술 터졌잖아요.

완치도 안 되는 그 병 가지고 평생 살아가야 하고요.

혹시 또 알아요? 팔 병신이랑 만날 사람 아무도 없다고 남자한테 차이는 게 반복될 수도 있는데.

그때도 다시 포기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해요?"


아메리카노를 아무리 마셔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울렁이고 역하고 살짝 어지러운 게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약을 잘못 먹은 것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든 장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을 때 침을 꼴깍 삼켰다.


"난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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