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파이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보낸 5년
프로토파이와 함께한 지 5년이 되었다.
좋은 동료들과 함께 프로토파이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볼 수 있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에이전시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납품 후 서비스의 출시 시점을 알 수 없는 프로젝트가 많았다. 액티브 유저수와 매출에 대한 정보도 궁금했지만 손을 떠난 프로젝트는 안부를 전해오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내 서비스'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서비스의 성장 한가운데에 서서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 것이다. 더불어 익숙해진 에이전시의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를 찬물로 내던져 봐야겠다는 생각이 스타트업으로 이끌었다.
당시 퇴사 후 프로타이핑 툴을 공부할 계획을 세웠을 만큼 프로토타이핑 툴에 대한 니즈는 명확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즈니스적으로나 커리어적으로도 프로토파이는 스스로에게 당위가 충분한 서비스였다. 스튜디오씨드에 지원하고 입사를 결정하게 된 일련의 과정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오늘날 돌이켜 생각해보면 큰 축복이었다. (첫 직장을 나와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된 이야기는 디자인 테이블 시즌 1에서 나눈 적이 있다.)
그렇게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015년의 클레어와 2020년의 클레어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동안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했는지 담담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에이전시의 프로젝트는 대부분 반년을 넘기지 않았고 모바일, TV, 스마트 거울, 자동차까지 다양한 플랫폼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제품만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환경이 지겹게 느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물론 그건 큰 착각이었다.
입사 첫 주, TechCrunch Shanghai 2015를 위해 테이블보를 만들었던 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패션업에 종사하는 친구에게 난데없이 전화 걸어 적합한 천을 물어보고 여러 가게를 다니며 비용과 품질을 따지는 과정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작을 마치며 '아, 내가 이런 식으로도(컴퓨터 없이도) 일을 할 수 있구나. 이런 게 바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재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던 프로토파이를 위해 나의 능력을 총동원하겠노라 다짐했던 첫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컴퓨터 밖' 도전은 계속됐다. 2016년 9월, 우리는 일본에서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도쿄로 떠났다. 기억 저편으로 흘러가버린 일본어 실력이었지만 내가 가진 달란트로 팀에 기여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품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과외도 받고, 스크립트도 외우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출장 이후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인 디자이너 분들과 인연을 유지하며 일본 내 유저 그룹을 천천히 넓혀갔다. 그 결과 정식 버전이 출시된 지 1년 만에 프로토파이 일본어 버전을 선보이게 되었고 Cyber Agent에서 우리 툴을 업무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역할과 기여의 범위를 시각적 산출물 안에 가두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회사가 만들어지고 6개월 뒤에 입사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오만가지 디자인 업무를 도맡아서 해야 했다. 혼자서 다양한 일을 감당하며 각각의 결과물들이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괴리를 만들고 하향 평준화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행히 동료 디자이너들이 입사하면서 3명의 디자이너가 각각의 프로덕트를 나누게 되었지만, 여전히 개발자 대 디자이너의 비율이 높아 저글링 하듯 디자인을 쳐내기 바쁜 순간이 많았다.
현재는 9명의 디자이너와 함께 하고 있다. 하나의 기능을 심도 있게 고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5.0 버전의 인터렉션 라이브러리를 디자인하면서 내부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1:1 UT도 진행하고, 다 같이 모여서 maker의 눈으로 디자인을 살펴보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콘 하나를 가지고 브레인스토밍을 한 날도 있었다.
과거에는 generalist로서 기대를 받았다면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제품이 고도화되면서 현재는 전문성을 가진 product designer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시간이 아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비즈니스의 전반적인 것에 관여하면서 오너십을 쌓았고, 프로토파이가 내 자식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사업 초기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사용자를 만난 경험은 비즈니스와 사용자, 제품을 동시에 놓고 바라보게 하는 안목을 길러주었다.
작년부터 적극적으로 사용자 좌담회를 열게 되면서 제품과 사용자 사이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의도가 잘 들어맞아 사용자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면 기쁜 소식을 동료들에게 전하며 격려할 수 있어야 하고, 놓친 부분들이 있다면 개선 과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 디자이너로서 역할과 업무 범위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어떤 순간에도 나는 나의 사용자의 대변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하자.
입사 초 빠르게 성과를 내고 싶은 욕심과 에이전시에서 일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야근을 일삼았다. 퀭한 눈으로 출근한 나에게 토니는 프로토파이는 마라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저 내가 집중해서 화면 디자인을 잔뜩 해놓으면 제품 개발도 빨라지고 그것이 기여로 가는 길이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프로토파이를 만드는 일은 장거리 마라톤이고, 나 혼자 내달린 방향과 거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함께 치열히 고민하고 결정해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 파이를 굽기 위해 모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모든 결정은 '우리의 최선'이었음을 기억하고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더 나은 모습으로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입사 전날에 썼던 일기처럼 ‘혼자 감당할 것도, 나를 보호해 줄 시스템과 실드 쳐줄 사수가 없는 것’ 도 아니었다.
언젠가 꿈에서 협업을 많이 하던 개발자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다 깬 적이 있다. 당시 작업의 번거로움을 더했다는 미안함에 눌려있던 탓일 것이다. 모든 협업 과정이 초록 불일 수는 없다. 잠시 노란 불도 들어오고, 빨간 불도 깜박이면서 균형을 맞춰간다고 생각한다. 협업 상대도 그 과정을 기다릴 수 있는 존재고, 이해한다는 것을 (그들도 그렇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서서히 깨달았다. 일정 때문에 초조해할 때 개발은 밤 하늘의 별과 같이 할 일이 많다며 위로해주었던 말, 순간적으로 일이 몰릴 때 개발 테스크를 선행하며 기다려주었던 배려들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디자인과 디자이너 사이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서비스의 모든 면이 고른 완성도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약간의 뻔뻔함으로 이겨내야 한다. 프로토파이를 조형적으로 더 아름답게 리디자인하고 싶고, 추가하고 싶은 강력한 기능 (스스로 강력하다고 여기는)도 많지만 냉정하게 더 급한 일을 생각해야 한다. 아쉬운 부분이 들더라도 사용성을 크게 저해하거나, 비즈니스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 오히려 생산성이 올라갔다.
프로토파이는 소프트웨어다 보니 스펙의 복잡도가 높다. 스펙을 이해하고 적절한 UI를 찾는 훈련을 지속하면서 프로그래밍적 사고와 점차 친숙해졌다. 그동안 개발자들과 나눈 대화도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커뮤니케이션 효율이 예전보다 상승했고, 사용자의 경험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스펙을 쪼개 보는 합리적인 제안도 가능해졌다. 개발자의 속도 모르고 엉뚱한 질문이나 요구를 하는 일을 줄이고, 나의 의도 역시 보다 적절한 표현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파편화된 생각들을 엮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완벽보다 완성에 의의를 둔 첫 글을 마무리한다. 다음 파이를 굽는 시간 (2)에서는 일과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