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파이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보낸 5년
파이를 굽는 시간 (1) - 역할과 협업에서 이어집니다.
가끔 일을 하다 보면 망태기를 등에 메고 피드백을 줍고 다니는 모습이 상상된다. 사용자와 동료들에게서 얻는 피드백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을 결정짓기도 하고, 디자인의 자원이 된다. 이때, 특정 동료들에게만 의견을 구하는 일을 지양하려고 한다. 병에 걸리면 소문을 내라는 속담처럼(?) 여러 사람들과 고민을 나누다 보면 사고를 전환시킬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가끔 개발자들이 반응이 없을 때도 있지만 이제는 디자인 조직의 규모가 커져서 노다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동료들이 던지는 질문을 통해서 사고를 전환하고,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될 때 새로운 러닝이 일어난다. 하루 종일 줍고 다닌 피드백 중에서 가장 실한 놈을 선택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의 프로젝트가 나와 같은 디자이너를 위한 일이어서 주변에서 쉽게 피드백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갑작스럽게 무턱대고 의견을 구했던 디자이너 지인, 사용자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inturrupt를 반갑게 맞아 주시길 부탁드린다.
업무를 진행하며 일지를 통해 최대한 사고의 과정을 세세하게 남기려고 노력한다. 혼자서 일을 해온 시간이 길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다른 이들의 기억에 기댈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 내린 결정인지 사고의 흐름을 남겨두는 것이다. 추후 연관된 기능을 만들 때 히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프로토파이를 대면할 때 나를 관통하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디자이너를 위한 제품이라 더욱 그렇다. 이 마음은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직무 자존감을 해치는 수준이 되면 곤란하다. 프로토파이를 디자인하며 잘 된 사례와 사용자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상기시키며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매일의 속도는 다르지만 나는 그 안에서 성장했고, 맞닥뜨린 문제는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차곡히 쌓인 나만의 노하우와 신념들이 이를 증명한다.
프로토파이는 굉장히 건강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일 가정 양립 기업, 여가 친화 기업으로 인증을 받기도 했다. 건강한 문화가 형성된 데는 투명성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회사의 비전과 사업의 진척, 개인의 업무 내용과 업무 외적인 상태까지 많은 것들이 자유롭게 공유된다. '나는 지금 쉼이 필요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직이야말로 건강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기여가 조직 안에서 건강하게 흐르고, 조직 역시 그 사람의 성과를 면밀히 파악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순환이 잘 돼야 지속 가능한 형태로 일을 할 수 있다. 더불어 직장이 자아실현이나 인정 투쟁의 장이 아닌 모두의 선을 위한 상부상조의 형태가 될 때 어깨의 긴장이 풀리고, 워라벨의 굴레에서도 벗어나 진정한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수직 구조의 첫 직장에서 나는 칭찬을 먹고 자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일했다. 선배나 상사의 인정은 부인할 수 없는 동력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평 구조의 프로토파이는 달랐다.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도움을 나눌 뿐이었다. (돌아 보면 나를 독립적인 작업의 주체로 여겨준 것이라 생각이 든다.) 같은 직무를 가진 동료가 없다 보니 노고에 대한 인정은 표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산출물에 대한 객관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 없어 외로움이 더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 욕구는 점점 커졌고, 그 안에서 서서히 지쳐갔다. 인정에 대한 결핍은 직무 자존감 저하로 이어졌고 나약해진 마음은 퍼포먼스를 떨어뜨렸다. 얼마간 이런 상황에서 몸과 마음이 고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닥을 친 직무 자존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근 2년 동안 시도한 것들은 위와 같다. 비뚤어진 인정 욕구의 문제점은 '되고 싶은 나'와 '요구받는 나'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나'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여러 노력 끝에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인간이 된 것 같아서 기쁘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줄곧 했던 생각 중 하나는 어떤 순간에라도 나에게서 회사를 걷어 내었을 때 디자이너 신해나로서 스스로 온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라는 공고한 성에 갇혀 회사의 능력이 곧 나의 능력이라고 여기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나에게서 프로토파이를 떼어놓고도 매력적인 디자이너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반문하며 나의 현재를 살피고 싶다.
이따금씩 누군가 내게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 물어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대답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곳에 놓이든 그 안에 녹아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바로 알고, 주어진 자원 안에서 효율을 만들며 내 서비스를 '될 일'로 만드는데 무게를 두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디자인한 서비스가 조금이라도 세상에 이로움을 더할 수 있다면 디자이너로서 충분한 행복을 느낄 것 같다. 이 글을 빌려 유능하고 사려 깊은 동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여러분들에게 의지하며 즐겁게 일하고 있는 나의 오늘과 내일이 참으로 복되니 말이다.
이번 연재의 마지막 글인 파이를 굽는 시간 (3)에서는 Dropbox, Google Drive, Zeplin과 Notion의 도움을 받아 프로토파이 1.0에서 5.0까지 디자인 여정을 되돌아보려고 한다. 부디 올해 안에 완결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