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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개 Oct 03. 2022

뉴욕은 어쩐 일로

여행의 이유



2019년 여름, 퇴사 이틀 전 마지막 월요일이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오피스로 돌아오니 책상에 얇은 책 한 권이 놓여있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건강하고 행복하길. 뱅기에서 보셔.’




책 표지를 넘기니 있었던 매니저의 한 줄짜리 메모를 나는 실제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야 발견했다. 참으로 그분다운 말투에 혼자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덕분에 옆 자리에서 쉴 새 없이 말을 걸던, 왕년에 주짓수 선수였다는 남자와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었다.



200쪽 남짓한 얇은 이 책은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담백하게 담겨있는데, 비행기에서 무릎을 치며 읽었던, 그때도 지금도 크게 공감하는 구절이 있다.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이 목적은 아니었으나 결핍 많은 나는 그렇게 한국을 떠나 201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딱 2년 뒤 여름, 뉴욕으로 향했다. 처음 뉴욕행을 결정하고 나서 한국의 친구에게 말했다. 나 내년에 뉴욕에 ‘살아보러’ 간다고. 나를 아주 잘 아는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었다.



“갑자기 왜? 너 뉴욕 싫어하잖아.”



맞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누구는 못 가서 안달인 도시, 뉴욕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싫다는 표현은 너무 어감이 센 것 같으니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고 정정하겠다. 만약 0-5의 선택지가 있다면 아마도 ‘2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 체크할 것이다. 왜?



나에게 이 도시는 그 어떤 아름다움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20대 초반, 어리숙하고 언어도 자신감도 부족하던 대학생에게 힘 들고 안 좋은 기억을 더 많이 남겨준 곳, 올 때마다 극한의 더위 또는 추위로 매번 몸이 고생했던 도시,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란 존재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을 하고 결국 이별로 이어지게 된 장소, 어딜 가든 관광객 때문에 발 디딜 틈도 없던 곳,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럽고 시끄러웠던 도시.



이것이 뉴욕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미디어로 접하다 현실로 마주한 뉴욕은 영화와는 많이 달랐고, 20대의 나의 눈에 비친 뉴욕은 그저 돈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물질만능주의의 끝판왕 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도시로의 여행을 결심한 것일까?


그 ‘왜’라는 물음에 참 많은 답변 후보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뉴욕은 할 게 많으니까. 적어도 코로나로 여전히 삭막한 여기(Bay Area) 보단 낫겠지

초 여름의 뉴욕은 안 가봤으니까. 뉴욕의 여름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과연 어떤지 궁금해서

나도 한 번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보고 싶어서

코비드 이후 베이(Bay Area)를 떠나 유독 뉴욕으로 이사 간 사람들이 많은데, 이유가 궁금해서

뉴욕은 차가 필요 없으니까. 걷는 걸 좋아하는 내가 돌아다니기 편할 거 같아서.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는 너무 막연해서 콕 집어낼 수 없었던,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한국을 떠나며 비행기에서 읽었던 저 구절이었던 것 같다. 결핍이 있어서, 그래서 변화가 필요해서.



누군가는 그냥 현실도피를 위한 합리화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데 도피가 맞다. 당시의 나는 작금의 현실이 불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1년 하반기, 나는 취업 후 찾아 온 번아웃으로  일상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 살겠다고 한국을 떠나와 놓고 이제는 한국의 집보다 편해진 이곳에서 나의 하루 하루는 즐거움이 아닌 어둡고 우울한 날들로 가득했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 쏟아지던 공허함, 누구 한 명 기댈 사람이 없다는 회의감, 업무 스트레스, 크리스마스에 걸려버린 코로나,그리고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까지. 불안하고 괴로웠던 나는 갈급하게 탈출구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 온 인스타그램의 한 문구가 나를 움직였다.


If you don't like where you are, move. You're not a tree!


떠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지금의 상황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저 말처럼 다른 곳으로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장소를 정할 차례. 



‘어디를 갈까?’



처음엔 하와이 같은 휴양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휴식만은 아니었다. 나는 Pause (멈춤)이 아닌 Refresh(전환)가 필요했다. 즉 새로운 시선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의 도피를 원했다. 또한 직장인이라는 나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는 데에 무리가 없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1) 미국 내에 있는 곳이어야 했고

2) 운전이 서툰 내가 차 없이도 다닐 수 있는 곳이어야 했으며

3) 원하면 언제든 혼자가 될 수 있지만 또 늘 혼자는 아닌 곳, 즉 적당히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을 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 바로,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뉴욕이었다.


화려함의 절정인 뉴욕의 야경



앞으로 펼쳐질 이 이야기는 실리콘밸리에서 살고 있는 내가 2022년의 여름 43일 동안 뉴욕에서 일하고,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이다. 또한 그 안에서 마주한 나의 결핍에 대한 소고와 고백이기도 하다.



한 가지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글은 여행기이지만,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없을 예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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