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리쉬 어택
제목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브런치 구독자가 100명에 가까워지면서 뭔가 콘텐츠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야겠다고 다짐한 게 어제지만,
오늘만큼은 주저리주저리 내 일상을 털어놓고 싶은 날이다.
그리고 오늘 입사하고 처음으로 나에게 온, 큰 고비를 넘기기 위해선 난 글로든 말로든 이 응어리를 풀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이유 없이 억울한 날이다.
왜냐고?
'이럴 거면 왜 채용했어 날..?'이라는 질문이 자꾸만 맴도는 건 기분 탓일까...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나 억울해............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렇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내 업무가 나한테는 아직 너무 어렵다.
내 업무가 뭐냐면, 회사에서 이미 리스트업 해놓은 중소기업에 컨텍해서 우리 회사 서비스를 세일즈 하는 일이다. 그냥 짧게 말하면 영업사원이다.
어떻게 영업하냐고? 텔레마케팅으로 한다. 물론 나보다 직급이 높거나 경력이 있는 직원들은 내가 물밀작업해서 세일즈 방문 스케줄을 잡아놓으면, 그때 본격으로 그 기업에 대해 조사하고 그들의 니즈를 파악해서 알맞은 HR 설루션을 제공해준다. 나도 후에 이 과정에 참여는 하겠지만, 지금 입사한 지 겨우 1주일 반 지난 나는 거의 텔레마케팅이 주 업무이다.
내가 스트레스받는 가장 큰 이유는, 상사도 동료도 회사 분위기도, 급여나 복지도, 야근도 절대 아니다.
솔직히 위에 언급한 것들은 거의 다 만족스럽다. 뭐 이 정도면 좋지! 하고 지낼 만하다.
실제로 우리 회사는 작년에 전 세계에서 일하기 좋은 회사 1위로 뽑히기도 했다. 물론 싱가포르 브랜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브랜치 다 통합해서 나온 결과니까, 국가별 오차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조건들은 다 외부 조건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잘하면 언제든 다른 회사에서도 받을 수 있는 조건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나와 업무의 캐미. 적합성에 있다.
일단 나는 싱글리쉬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텔레마케팅을 하고 있다. 이제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갓 입사해서 하는 일들이 로컬들과의 통화인데 그 통화에서 심지어 나는 세일즈 방문을 따내야 한다. 그리고 상사가 일주일에 30 통이라는 구체적 전화 횟수도 정해줬다. 내가 말하는 건 그나마 괜찮다. 나는 준비된 내용이 있고, 의도도 가지고 전화를 하니까 적어도 내 의사는 전달할 수 있다. 문제는 클라이언트 회사 담당자가 말하는걸 못 알아먹겠다. 어떤 사람은 죽어도 못 알아듣겠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부터 사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하루에 7-8통은 하자라고 스스로 마음먹었기에 전화할 회사에 대해서 미리 온라인 조사를 좀 하고 전화를 했다.
안녕, OO야, 좋은 아침~
나는 클레어라고 ooo에서 일해.
너 ooo라고 들어봤니?
(대부분) 응~알아
아~ 정말? 좋네! 그러면 너네 회사서 요즘 채용하는 거 있어~?
응 있는데 왜?(응 ㅇㅇ가 있어 라고 얘기해주면 좋을 것을...)
아 어떤 업무를 하는 건데?
너네는 무슨 ~를 가지고 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저기 마지막 말에서 분명 내가 들은 영어는 What do you have ~?이었고 나는 아 우리는 이러이러한 후보자를 가지고 있어~ 하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똑같은 질문 다시 하길래,
내 나름대로 그 문장의 다른 의미를 추측해서, 아~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있어.라고 대답했고
결국 화가 난 클라이언트는 아니, 야, 들어봐, 내 질문은 간단해, 너네가 하는 서비스는 주로 어떤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하냐고, (어떤 후보자를 가지고 있냐) 이 말 맞잖아..............
알고 보니, 블루칼라 직업을 하냐 화이트칼라 직업을 주로 하냐 이 말이었다.
그래서 둘다하지만 블루칼라에서 이러이러한 직업은 제외된다고 알려줬다.
결국 그들이 찾고 있는 리테일 어시스턴트를 구해다(?) 주기 위해 나는 매니저한테 이 사실을 알렸고, 매니저가 내가 싼 똥(?)을 다 치워주셨다... 사실 매니저한테 이 클라이언트를 전달하면서도 정보를 잘 못 전달해서 매니저와 나 둘 다 클라이언트와 통화하며,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지 이 폭풍이 지나고 나니, 텔레마케팅이 너무나 하기 싫어졌다.
약간의 스티그마 같은 게 생긴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를 도대체 왜 세일즈 부서에 넣고 싶어 했으며 넣었을까, 내가 뭘 안다고 싱글리쉬도, 회사 서비스도, 비즈니스 협상을 기술도..... 모르는 나를 왜........
그러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이 거대한 산만 넘으면 나머지 것들은 수월하겠지,
나 전에 매우 잘하던 사원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 사람은 5년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업무를 하고 이직했었으니 나와는 비교가 안 되겠지,
내가 싱가포르에서 겪을 어려움 한 80%는 지금 겪는 거라고 생각하자...
힘든 것도 내가 잘하고 싶고 의욕이 많으니까 힘든거겠지....
정말 자리에 앉아서 업무 생각보다 내 마음가짐 정리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스트레스받지 않으려고, 내가 힘들어한다는 걸 표정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마지막으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도 내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완벽하지 않았던 나의 영어는, 현실에서 처참히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사실을 체감한 하루였고 나만 무너지면 괜찮지만 회사라는 특정한 조직에 속한 이상 그 회사에는 적어도 타격을 주면 안 되지 하며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던 날이다.
그래도 괜찮다,
20대에 나의 특권은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나의 20대는 실수들로 가득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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