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e life, slow living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 행복하지 않아서 그만둘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다 놓아버리고 더 불행해지면 어쩌나 불안했다.
우려와는 달리 이직 후 4개월이 지나고 페이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행복 지수는 많이 높아졌다.
그 이유는 'simple life', 'slow living'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점점 복잡해져만 가는 삶은 혼자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에너지를 고갈 시켰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에도 바로 다른 사안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차지하였다. 일주일에 적어도 2~3일은 일과 후에 약속이나 회식이 있었고 내일을 위한 충전의 시간을 뺏긴 채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퇴근 후에도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하고 꼭 해야 하는데 미루고 있는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최하위로 밀려나 항상 외면을 당했다.
청소, 요리, 장보기, 운동.. 모든 일들을 최단 시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끝내기 위해 항상 시간을 계산하며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모든 일들이 다 내가 좋아하는 일인데 빨리 치워야 할 일들이 되어버렸다. 나를 가꾸는 일도 뒷전이었다.
이직을 하고 두 달 동안은 주 3회 파트타임으로 출근 하였는데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출근하지 않는 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다 해가 중천에 뜬 후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청소하는 것이 세상 제일 행복했다. 바쁘게 살다가 일이 없어지면 허전하다고 하던데 이렇게 몇 년을 살아도 질릴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두 달을 보냈다. 집안 일이나 육아를 평소보다 더 열심히 한 것도 없어서 밥만 축 내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원 없이 쉬어보고 싶어 그냥 뒹굴었다.
여유로움 속에서 모르는 사이에 다시 나의 에너지가 스믈스믈 올라왔나보다. 20년 동안 미루고 미루었던 스키를 다시 타게 되었고 usmle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뒹구는 시간이 더 길었더라도 좋았을텐데, 타의로 다시 풀타임 근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출근이 빠르지 않아 아침에 좋아하는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고, 퇴근 후에 아무런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직장에서의 일들도 오직 진료와 시술로 아주 단순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비슷한 일들이 펼쳐지고 그 사이사이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간다. 저녁에 약속은 거의 잡지 않고 저녁을 만들어 먹고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영상을 보며 보낸다.
청소를 할 때에도, 설거지를 할 때에도 천천히 순간을 즐기면서 한다. 걸을 때에도 천천히 주변 공기를 느끼며 걷는다. 내가 좋아하는 샤워를 천천히 한다. 두피를 천천히 마사지한다. 피부에 로션을 바르고 천천히 흡수 시킨다.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바로 자야 하는데' 하는 걱정 없이 차 한 잔을 내려 마시고 명상을 한다. 내일은 무슨 재밌는 것을 해볼까 설렌다. 집안 곳곳 내 손길이 필요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게 짜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사이 usmle 스터디 모집 공고를 보고 참여하여 동료들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slow living, simple life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꿈꾸던 삶이다.
항상 꿈꿔왔지만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닐 지도 모르기에 내 의지로 단순한 삶을 선택할 수 있음에, 그리고 용기를 낼 수 있게 나를 격려해 준 모든 자극과 인생의 스승들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