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확인 후 쓰는 후기 2
절망감.
최근에는 very old YOG 선생님들의 후기도 심심치 않게 보여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의료농단 초반에 공부를 시작하신 선생님들이 그동안 생업을 이어가며 실력을 갈고닦아 많이들 시험을 치르시는 시기라고 보인다.
하지만 이제까지 후기들은 거의 학생과 전공의 선생님들의 후기였고 짧게는 1~2달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기도 하며 하루에 수십 문제, 많게는 100문제 이상을 거뜬히 풀어내고, 모의고사 점수도 높아 상당한 괴리감을 느꼈다. 물론 훌륭한 분들이 후기를 많이 남겨주시기는 하겠지만.
"나는 대신 연륜이 있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하지만 연륜은 개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더라.
나름 내 분야에서는 학기마다 시험문제도 내고 논문도 많이 쓰고 철철이 나오는 최신지견 강의도 맡아서 하던 사람인데, 내 전문이라고 생각되는 영역에서조차 겸손한 정답률을 마주해야 했다. Old YOG로서 내가 가지는 메리트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오래전에 배웠던 지식은 배웠는데 잊은 것인지 너무 오래전이라 이런 것은 그땐 존재하지도 않았는지도 모르겠는, 완전히 무에서 시작한다는 느낌이 딱 맞았다. 게다가 컴퓨터로 시험을 보고 해설을 읽는 것은 종이책 쌓아놓고 공부하던 old YOG들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다. Old YOG의 공부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문제 풀고 해설을 읽는 것은 처음에는 괴롭고 거부감이 들더라도 무조건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최대한 프린트를 하고 책을 이용하여 공부하는 분들도 계시기는 하지만 이왕 할 거 처음에 힘들어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 많이 보고 자주 보면 늙은이도 익숙해진다. 중간중간 인공눈물을 많이 쓰고 쉬는 시간에 안구운동도 좀 해주고.
두 번째로는 처음 UWorld의 허들을 넘을 때 너무 완벽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너무 대충보나? 해설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분명 봤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네? 싶더라도 일단은 넘기고 일정한 속도를 내어 일독을 하는 것이 낫다. 그 이유는, USMLE study, 즉 UWorld는 어찌 보면 개론 책다운 좌표도 없이 중구난방같이 보여도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지금 모르겠는 것들이 다른 system, 또는 subject를 돌고 오면 마법같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Step1은 pass가 목표이기 때문에 old YOG가 완벽을 기하여 공부하다가 속도가 너무 늦어지는 경우 시험을 제 때에 치르지 못할 수 있다. 처음부터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한 번 돌리고 틀린 문제와 flag 문제를 다시 보면서 구멍을 메꾸어주고 반복하여 보면서 가지를 치는 방법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마지막 암기를 위해서 시간이 허락하면 FA 단권화는 추천한다. FA 단권화는 사실 최근 많은 분들이 스킵하는 부분이다. Pass 자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지는 않기도 하다. 하지만 FA 단권화가 없으면 우리같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지 않는 old YOG에게는 시험을 수 주 남기고 막판에 들들 파면서 암기할 대상이 없다. FA 대신 Mehlman을 이용하기도 하고, Anki나 Remnote 등 각자 정리해 놓은 material을 외우기도 한다. FA에는 거의 모든 내용이 다 집약되어 있다. 평소 UWorld나 NBME 모의고사를 보면서 나왔던 문제들을 FA에 표시해 놓으면 마지막에는 한눈에 high yield가 잘 보인다. 그런 점에서 추천한다.
그리고 생업과 자투리 시간 공부로 아무리 바빠도 운동을 위한 시간을 꼭 만들자. 러닝을 추천한다. 러닝은 꼭 전속력일 필요는 없다. 빠르게 걷는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유코에서 최근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신 어떤 선생님 후기를 읽었다. "나도 이렇게 시험 문제를 내보면 어떨까?" 싶었다는. 공부를 하면서 힘들지만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었다. System을 두세 개 정도 마쳤을 때 조금씩 즐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터디원 선생님들도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하셨다. 학생 때에는 순환기, 호흡기, 혈액, 다 따로따로 분리해서 배워서 그 모든 것들이 이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재미없게 공부했던 것 같다. 특히 pathoma 강의를 들으며 나도 이렇게 배웠으면 대학시절의 공부가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대 교수로 지내온 내가 하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시설만 좋아졌지 20년 전이나 한국의 의대 강의실의 contents는 거의 바뀐 것이 없다. 매번 진료와 연구와 학회 잡일에 쫓기며 의국에서 시험 문제를 출제하라고 하거나 임종평 출제자로 운 나쁘게 선정되면 기한에 임박하여 억지로 최대한 예전과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문제를 내어 제출하기 일쑤였다.
그동안 20년 가까이 의사로 살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 하나의 막이 걷히고 보이는 느낌이었다. 사소한 대화 중 우리 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사실은 그게 이래서 그런 것이지.' 하며 혼자 지적 사치를 맛볼 수 있었다.
그다음 step2, OET, matching까지.
너무 많고 높은 산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step1 그까짓 것,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step1일 수 있지만,
합격 후 후기를 쓰는 날을 감히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혼자 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절망을 느끼는 스터디원 선생님들과 일주일에 단 10분이라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힘을 낼 수 있었다.
한국인인데 그래도 이 나라가 최고지, 여기가 제일 편안한 내 집이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나라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트려 주는 속보도 '가라, 가!' 하며 나를 채찍질했다.
결과를 기다리며 의지를 불태워 채우던 시간이 공백으로 남아 힘들었다. 공부하는 동안 집안에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해 시험이 끝나면 만회해야지, 했는데 step2 공부를 천천히 바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미래가 참으로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래서 좋다. 오늘 살았던 것처럼 매일 똑같이 65살까지 살아도 되지 않아서 행복하다.
확실하고 누구에게나 눈에 그려지는 미래를 최대한 이른 나이에 갖추는 것이 성공이라 교육받고 살았다.
행복감과 충족감은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왜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우리라는 사람은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