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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MLE study 일지_07

결과 확인 후 쓰는 후기 1

by Claire mindfulness


결과가 나왔다. Pass.


시험을 보고 대략 3주 만에 결과를 받았는데, 당일 밤 10시 34분까지 평온한 일상을 살아내기가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다.

Pass, or fail인 step1부터 이렇게 초조하고 좌불안석이면 그 많은 고난을 어떻게 넘고 넘길지 걱정도 되었다.


Fail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냥 바로 후기를 쓸 걸 그랬다.

공부를 했던 과정이 가물가물 하다.


재작년 12월까지 대학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하기 전 USMLE에 도전해 볼까, 생각만 했었다. 5년쯤 뒤에는 개원을 할 생각이었고 시험을 볼 수 있든 없든 그동안 공부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First Aids 책을 사서 2024년 1월부터 일주일에 1-2페이지의 속도로 읽었다. 첫 단원은 biochemistry이다. UWorld가 일반적인 step1 공부 material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내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보다 못할 거라는 마음이 커서 돈 버리면 어쩌나 싶어 결제하지 못했다.


사직 후 첫 달을 보내던 중 2월 초, 의료농단의 서막이 올랐다.

그 불씨는 점점 커져갔고 앞 날이 창창한 의대생과 전공의들 뿐만 아니라 나처럼 늙고 머리도 굳어버린, 편안함이 좋을 나이의 의사들도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최근 몇 년간 의료 보험 재정이 어려워진 현실은 최전선에서 이미 느끼고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해결방법을 필수 의료의 비용을 지금보다 더 절감하여 원가 보전조차 되지 않는 진료를 하게 하고, 대화도 없이 자율성을 빼앗고 강제하는 정부와 보복부, 그리고 의사를 악마화하는 매체들은 very old YOG들에게도 여기에 미래가 없다는 현실 자각을 하게 했다.

그렇게 나는 내과 개원의 꿈을 접었고, 동료들을 만나고,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2024년 3월 16일 서울 모처의 스터디 카페에서 늙다리 4명이 만났다.

우연하게도 한 분은 학교 1년 선배였고 스터디를 모집해 주신 선생님도 또 다른 선생님과 우연히 만난 의대 동기셨다. 우리는 모두 YOG가 20 정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돌아오는 10월 중순에 시험을 치자 하였다. FA를 생화학부터 보고 있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날 바로 UWorld를 결제했다.


Neurology(CNS) 문제가 가장 많아 그 파트부터 한 번 시작해 보고 일주일 뒤에 만나기로 하였다. 그렇게 UWorld의 세상을 처음 경험했는데 성격이 급한 나는 답을 찍고 답만 확인하는 식으로 대충 훑으며 하루 40문제를 채웠다. 공부를 거의 안 한 거나 다름없었다. 한 1달 정도를 그렇게 구경만 한 것 같다. 사실 내가 아무리 자세하고 꼼꼼하게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한들,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은 영어로 길게 descript 된 UWorld의 vignette(지문) 형식에 익숙하지 않아 들여다보고 있는 내내 어지럽고 안구통과 두통을 달고 살았다. 해설을 꼼꼼히 읽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걸 280문제 풀어내야 한다고? 시험을 볼 수나 있을까?


절망감과 함께 한 초기 한두 달이었다. 이건 졸업한 지 오래되어서 겪는 old YOG 특이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그동안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회로가 길이 막혀버려서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시 꾸준히 이 길을 다니면서 샛길부터 새로 내어보자. 그러면 다시 좁은 길이 생기고 점차 넓어져 언젠가는 대로가 되겠지."


힘들 때마다 이 다짐을 스스로 새겼다. 닥치고 읽자, 길을 만들자.


실제로 vignette를 읽을 때마다 찾아오던 두통이 점점 사라졌고 UWorld의 모니터를 읽는 것이 수월해졌다. 한 문제 당 해설 내용 확인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났다. 시행착오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사이 진도는 GI -> microbiology -> pulmo의 순서로 진행이 되었다. Neurology를 일주일 경험해 보고 지옥을 맛본 우리는 그나마 수월해 보이는 system부터 접근해 보기로 하였다. 선생님 한 분이 더 합류하셨고 스터디원 선생님들과는 일주일에 한 번씩 화상으로 만나 정해진 진도를 다 보고 어렵거나 중요한 문제를 공유하여 리뷰하였다. 중간중간 푸념도 하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무거운 타이어를 조금씩 굴리고 있었다.

스터디를 하다 보니 각각의 공부 스타일이 굉장히 다양했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졸업 후 15년에서 20년 가까이 다양한 위치에서 시험공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었고 USMLE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모습의 과제였다. 교수건 봉직의건 개원의건, 내과건 서저리건 할 것 없이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완전히 제로 베이스였다.


미지의 세계를 알아과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세세한 것까지 다 research 하고 다 읽고 넘어가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일단 속도를 내어 한 번 쭉 훑고 다시 보면서 구멍을 메꾸어 가는 스타일이 있다. 각 잡고 몰입해야만 공부가 가능한 사람도 있었고 일상에서 흘려듣듯이 하면서 반복적으로 노출하는 게 편한 사람도 있었다.


정답은 없다. 어떤 길로 가더라도 우리가 땀방울을 흘린 시간이 완성의 상태에 가까운 모습을 만든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 과정에서 내가 택한 방법이 시행착오를 겪고 더 좋은 방법으로 재정비하고 또 재정비할지언정, 최적의 방법을 결국 찾아낸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신의 길을 결국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하지만, 그래도 old YOG로 공부하면서 내가 느낀 점들을 후기 2 편에서 나누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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