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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나리 Sep 02. 2018

엄마와 딸의 관계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를 읽고

자존심 센 엄마의 무던한 성격의 첫째 딸인 나는 전형적인 착한 딸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며 어느 한 교수님이 엄마는 첫째 딸과 본인을 동일시 하고, 심하게는 분리불안까지 겪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 엄마는 네 자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큰 이모와 스무살 이상 차이나서, 거의 이모들이 키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엄마는 어린시절 공부를 잘했지만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갔고, 회사를 잠깐 다니다가 스물 다섯에 결혼하여 나를 낳았다.


우리 엄마는 어렸을때부터 간섭이 심해서 이건 안 돼, 저것도 안돼,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가 끝이 없었어. 아버지는 지나칠정도로 간섭하는 엄마를 말려주지도 않으셨고.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를 손이 가지 않는 반려견 같은 존재로 키우고 싶었던가봐.  
결국 나는 엄마의 애정이라는 필터를 거친 정신적인 학대에 줄곧 노출되어 있었던거야.

120p 유리의 대사 중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는 못다한 공부를 하겠다고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다.

매주 목요일 아빠와 함께 학교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공부를 마치고 오는 엄마는 참 멋있었다.


엄마의 공부 열정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왔다. 영어는 기본이고 수학학원, 합창클래스 등 안 다닌 학원이 없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는 공지가 오면 나는 방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 책상 뒤에서 내 등을 바라보며 공부하거나, 나란히 앉아 내가 푼 문제집을 채점했다.

100점을 받아와도, 등수가 올라도 칭찬보단 채찍이 먼저였다."왜 이 문제를 틀렸?", "도덕같은 과목은 무조건  맞아야!" 
숨막힌다는 표현을 그때 몸소 체험했다.
공부에 대한 흥미는 점점 떨어졌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은 내 인생의 중요한, 최악의 시기였다. 아빠가 보증을 잘못 섰고, 회사도 퇴사했다.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잘 모른다.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이 시기에 나는 건강 이상이 생겼고, 동생은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일을 시작했다.


엄마가 출근한 동안은 숨막힘으로부터 자유였다. 그러나 꿀같은 자유와 함께 찾아온 것은 퇴근한 엄마의 히스테리였다. 엄마의 의지대로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닌, 우릴 먹여살리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니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일하고 돌아오는 시간이면 숨 죽이며 눈치를 보고,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했다.


엄마는 매번 "엄마가 너희 때문에 이렇게 일하는데 너흰 대체 왜그러니!" 라고 윽박지를 때마다 청개구리 같은 반항심이 커졌다. 왜 내가 등떠민것도 아닌데, 모든 상황이 다 내탓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들지는 못했다. 반항아의 역할은 다섯살 어린 남동생이 맡았다. 나는 허다하게 부딪히는 둘을 말리고, 달래고, 다독이는데 내 감정을 다 소모했다.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겠거니 울면서 하루하루 버텼다.


공부는 혼나지 않을 만큼 적당히 했다. 전교 10등으로 시작한 성적은 해가 갈수록 떨어졌다. 엄마 회사동료, 엄마 친구의 아들,딸들과 비교하며 잔소리했지만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학생이 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물론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계속 엄마에게 불평만 듣고 자라서, 본래의 내 존재도, 인격도 인정받은 적이 없었거든. 하지만 언젠가 부터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어. 부모에게 인장받으려고 자신을 억누르지 말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과 장소를 찾으면 된다고 말이야. 그래서 스무살이 되면 집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던거야

122p 유리의 대사 중


대학생이 되고, 조금씩 나의 자유를 찾았다.
무엇보다 내 손으로 돈을 벌면서 금전적인 독립을 시작했다. 스무살부터 안해본 알바가 없었다. 이 마저도 "다른 좋은대학 다니는 애들은 과외하면서 학교 편하게 다닌다는데, 넌 왜 그 모양이니" 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첫 학기엔 알바를 하면서 통학을 했고, 2학기부턴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 생활하면서도 툭하면 연락 안한다며 전화로 한바탕 했다. 딸이 되서 먼저 전화해야지, 왜 엄마가 전화하게 만드냐는 말로 날 괴롭혔다.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연락하면 되지, 왜 항상 딸이 먼저 연락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받고 싶어하는 엄마의 높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대학교 2학년, 남자 동기들이 모두 군대에 가고 여자 동기들만 남았다. 여자 넷이 붙어다니던 어느날, 한 친구가 학교 다니는것도 재미없다며 휴학하고 필리핀으로 유학가야겠다는 선언을 했다. 해외에서 공부하다오면 취업도 잘될 꺼라고 했다. 그렇게 동기들 하나 둘 휴학을 하고 해외갈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는 1년 모아서 1년 어학공부하러 해외로 가자는 목표를 세웠다.

주간알바/야간알바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집안사정으로 돈이 새기 시작하면서 목표를 잃고 일만 하고 있었다.


어느날, 알바하면서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떠나야 겠다고 결심했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부모님 빚을 대신 갚고 있는 친구였다.

"난 이렇게 살고 있지만, 넌 그러지마. 너가 하고 싶은 것 포기하지 말고 해!"

정신 번쩍 드는 한마디였다. 해외행은 반 포기상태였던 난 부모님한테 알리지 않고 조용히 호주 출국을 준비했다.

돈이 많이 드는 어학연수는 포기하고 워킹홀리데이 행을 선택했다.

비행기표까지 끊고 한달 남았을때, 호주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사실은 도피였다.

그 시기는 여기가 바닥이겠거니 했던 집안 분위기는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동생은 반항이 극에 달하는 고2였고,엄마는 극도로 예민해지고,우유부단한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 무반응.

나는 예전부터 그러했듯, 항상 가족의 모든 관계의 중재자였다.


엄마는 날 두고 어디가냐고 했다. 
엄마에게 나도 살아야 겠다고 했다.


그렇게 호주에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를 통제하고 윽박지르는 엄마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엄마로 변했다. 무언가 시키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여전히 엄마와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엄마의 기분이 안 좋아보이면 같이 쇼핑하며 기분전환도 하고, 주기적으로 뮤지컬도 보고, 일년에 한번씩 여행도 가고.

엄마는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고 누구는 해외여행을 갔네, 누구는 얼마를 버네, 투덜거리지만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고 있다.


엄마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연료삼아 열심히 투덜거리는 일이 단지 습관일 뿐이다. 언제까지나 딸은 어리고 자신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환상을 보고 싶을 뿐이다. 엄마는 분명 , 아무 잘못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아무 잘못이 없다.

199p 루이의 말 중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를 읽으며 루이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이 글을 쓰며 그간 잊고 있던 상처와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렇게 글을 써내려가면, 내 상처도 아물 수 있을까.

최근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 책이 많이 나온다. 무조건 엄마의 말을 참고, 수용하는 것이 아닌 둘 사이의 관계를 현명하게 개선하려는 노력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언젠간 엄마가 될, 이 세상의 모든 딸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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