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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 Park 박민경 Aug 18. 2017

작가 소개| 경단녀 OO엄마, '나의 이름'을 되찾다.

오로지 나의 이름으로만 불렸던 미국에서의 2년

박민경(Clair Min Kyung Park)


1979년 양띠. 한국인의 10%라는 AB형에, 5%라는 왼손잡이에, 25%라는 곱슬머리에, 상위 3%인 4.5kg의 우량아로 태어난 것을 보면 평범할 수 없는 유전자를 타고 난 듯싶다. 하지만, 혈액형은 미인형이라 우기고, 손에 붕대를 감아 밥 먹고 글 쓰는 것만은 오른손으로 고쳤으며, 스트레이트 파마라는 미용기술의 힘을 빌리고, 임신 출산을 제외하고는 20년 간 50킬로 몸무게를 유지하며 특이함을 애써 숨기고 살고 있다.


평생 전학 한 번 없이 서울 송파에서 살아왔고, 학창 시절 12년 개근했고,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4학년 때 생애 첫 소개팅으로 강남역 7번 출구에서 만난 남자와 2년 화끈한 열애 끝에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고, 다국적 제약회사 마케팅 부서, 컨설팅회사, 국내 제약회사 마케팅 부서에서 10년 넘게 일한 것을 보면 지극히 평범함을 가장하여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여 살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평범함을 거부하고 싶어 하는 유전자는 여전히 몸속 세포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다.

2014년 가족들과 미국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로 떠나 약 2년 간 지내고 돌아왔다.



- 한 달 전(17년 7월) '겁 없이 살아 본 미국'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저자 소개란에 적은 글이다.


저자 소개글을 보내 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에 순간 멍해지기도, 긴장되기도 했고, 심지어 감격스럽기도 했다.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한 후 경단녀(단어의 부정적인 어감이 싫지만 어쨌든 사회에서는 나 같이 경력이 단절된 여자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가 된 이후 오랜만에 나 자신에 대하여 소개하는 글이었다.


미국에서 2년을 지낸 후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또 지났다.


미국에서 나는 오로지 클레어로 불렸었다.

한국에서는 언젠가부터, 아마도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였던 것 같다. 내 이름 석자가 점점 불릴 일이 없어졌다. 대학 졸업 1년 후에 친구들 중 가장 일찍 결혼하면서 남편이 지인들에게 “제 부인입니다” 하는 소개에서 부인 역할을 맡았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을수록 점점 불리는 직급도 상승하게 되었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는 민주 엄마,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가니 유진 엄마, 이웃에게는 몇 호 아줌마 정도가 나의 호칭이 되었다.


미국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모두가 내 이름을 물었고, 나의 이름을 기억해 불러주는 것이었다.

미국 친구들은 나의 이런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해서 한국에서의 호칭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주로 결혼 유무에 따르지만 나이의 개념도 혼합되어 있는 호칭인 아줌마, 아저씨, 아가씨, 총각, 상대와 나의 나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지는 호칭인 언니, 오빠, 누나, 형, 회사 내에서 대리, 과장, 부장, 이사 등 직함을 모두 달리하여 부르는 것에 대해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설명 후에도

“그럼 나이가 많은데 아이가 없는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이 친구의 엄마인데 나이가 더 많으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한국 드라마에서 왜 식당 아주머니에게 이모라고 부르나?"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같은 사람이지만 속한 그룹마다 또는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나를 나의 이름으로만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곰곰이 돌이켜보니 내가 어떠한 역할도 맡기 이전이었던 학창 시절 친구들만이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에게 여전히 나의 이름이나 학창 시절 별명을 부른다. 그래서 아마도 어렸을 때 친구가 수십 년 만에 만나도 가장 반갑다고 하나 보다.

미국 친구들과 내가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은 한국에서는 주로 조직 내에서의 역할과 관계를 중시하는데 반하여 미국에서는 개인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또한 큰 문화적‘다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에서 2년간 내가 나의 이름으로만 불리면서 나를 좀 더 알고 나를 좀 더 찾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1년 전 ‘나의 집’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 부르고, 외동조차도 ‘우리 부모님’이라고 부르는,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주말마다 경조사가 꽉 차 있고, 거리에는 몸을 스쳐도 아무렇지 않게 걷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된장찌개에 여럿이 숟가락을 담가 퍼먹고, 동창회 모임으로 바쁜 곳.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우리 가족과 우리 친구들과 우리 식으로 산다.


다만, 이제는 한국 안에서 살더라도 내 이름 석자의 존재를 인지하며 산다. 그러려고 매일 노력 중이다.



<학교 캠퍼스에 주차되어 있던 깜찍한 차. 핑크 속눈썹을 애교 있게 깜빡이며 앞차에 뽀뽀하고 있다. 최고급 슈퍼카, 수십 년 된 클래식카, 부서진 범퍼를 청테이프로 칭칭 감고 다니는 차, 깨진 사이드 미러를 줄로 묶고 다니는 차. 미국 도로에는 차마저 브랜드도 제각각, 모양도 특색도 제각각이다.

어떤 차이든 내가 편하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내' 차니까>




'넓은 것은 오지랖, 깊은 것은 정, 많은 것은 흥 뿐이고

좁은 것은 세상, 얇은 것은 지갑, 적은 것은 겁 뿐인 가족'


<'겁 없이 살아 본 미국' 책은>

평범한 40대 회사원 남자가 미국 경영전문대학원(MBA) 입학부터 졸업하기까지,  

10년 차 워킹맘직장을 그만두고 떠나 무료영어강좌에서 수십 개 나라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알파벳도 구분하지 못하던 큰 딸이 2년 만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완독하고,

Yes/No도 모르던 작은 딸의 미국 유치원 적응기까지, 다양한 미국의 교육 현장 이야기와

전화도 터지지 않는 서부 국립공원 열 곳에서 한 달 이상의 텐트 캠핑,

현지인들과의 소중한 인연,

경험이 없는 덕분에 좌충우돌 해 볼 수 있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담은 책.


출간 두 달 만에 2쇄 인쇄. 브런치 글 100만 뷰.

페이스북 팔로워 1400명(www.facebook.com/MKLivingUSA)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리워지는 장소와 사람과 음식이 생겼고

나이와 국적에 대해 견고하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친구 삼을 수 있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고,

서로 다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며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고

낯선 곳에 뚝 떨어져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해서 주저 앉아 울고만 있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이 결국은 '성숙해진다'는 것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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