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pipi(쉬쉬)만 알면 아무 문제없어!
한국으로 돌아올 시기가 다 되었을 무렵 큰 결정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아이 둘과 나는 몇 개월 더 남기로.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남편이 한국으로 출발하기 일주일 전, 둘째 아이를 프리스쿨에 보내기로 급하게 결정하고 그 날부터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벌써 영어를 배워 무엇하나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어느 시설에도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또 한편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힐 수 있는 기회에 굳이 일부러 막을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보호자가 아이와 한 순간도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특성상 프리스쿨을 보내지 않으면 나 혼자 24시간 아이를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한국으로 떠나기 전 우리가 2년 여 간 살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여러 가지 처리 업무(이사짐 싸고 보내기, 보험/휴대폰/인터넷/집 렌트 해지, 차량 처리, 학교 서류 등등)가 많을 것임이 뻔해서 그 시간에 아이가 나를 따라 다니며 녹초가 되느니 친구들과 노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집 근처 서너 곳을 가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곳은 대기를 해야 했고, 바로 보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일본 친구 미치오의 동갑내기 딸이 다니는 프리스쿨을 추천받아 방문해 보았다. 지역 커뮤니티 센터 내부에 있는 곳으로, 실내를 들여다보니 커다란 홀 하나에 나이 구분 없이 모든 아이들이 섞여서 놀고 있다. 어디에도 칸막이가 없으니 널찍하다는 느낌뿐 시설은 딱히 좋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일단 자유로워 보였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일제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을 내다보던 남편과 나는 그늘이 깊은 큰 나무가 몇 그루 있는 운동장으로 시선이 꽂혔다. 그 아래 널찍한 공간에 놓인 미끄럼틀과 모래놀이터, 나무 아래 벤치에서 옹기종기 앉아 점심식사하는 모습을 보고는 여기다 싶었다.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시간씩 그 놀이터에서 논다고 했다.
그 날 바로 등록을 했다.
커뮤니티 센터 (문화센터) 안에 있다 보니 공간이 넓고,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체계적인 수업을 하거나 몬테소리처럼 철학과 목표가 뚜렷한 곳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어차피 그저 또래들과 놀이터에서 많이 뛰어노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했다.
영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던 둘째의 학교 생활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아침 8시에 큰 아이를 먼저 학교에 내려주고 유진이를 프리스쿨로 데리고 가며 차 안에서 딱 한 단어를 알려주었다.
“유진, 화장실 가고 싶으면 선생님한테 ‘피피~(쉬쉬)’라고 해야 돼. 따라 해 봐. 피피이~~”
시키는 대로 "피이피이~~" 곧잘 따라 하다가도 차에서 내릴 때는 피자였나 파파였나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아이 손을 잡고 들어가 선생님에게 안기자마자 아이는 예상했던 대로 자지러지게 울어댔고,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들리는 울음소리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문 앞을 서성거렸다.
둘째 날 아침에는 내가 나오려 하자 허리가 뒤로 꺾어지며 더 심하게 울었지만 내가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첫날과 달리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셋째 날 아침, 거짓말처럼 눈물 한 방울 없이 “엄마, 빠이~!”
몇 주쯤 고생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짧은 3일 만에 적응 끝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저 이래 봬도 미국 유치원 경력이 좀 돼요.” 하는 느낌으로 먼저 쿨하게 뒤돌아서 달려가 아이들 틈에 섞여 버렸다.
유일하게 가르친 한 단어 피피도 사실 쓸모가 없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자연스럽게 다리가 X자가 되어 몸을 꽈배기처럼 배배 꼬니 선생님들이 알아서 화장실에 데려갔고, 몇 주가 지나자 선생님들은 유진이가 먼저 다가와서 곧잘 영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진짜 영어인 것도 있고 대개는 영어처럼 들리는 외계어였지만 얼핏 들으면 굉장히 유창한 것처럼 끊이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언어가 무엇이든 간에 거침없고 친화력 좋은 둘째의 성격 덕분에 언어도 빠르게 늘고 유치원 생활도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다.
가장 큰 변화는 유치원에 가기 전에는 집에서도 주로 영어로 말하던 언니에게 한국말로 얘기하라며 짜증을 냈지만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고부터는 우리의 영어 대화를 귀 기울여 듣다가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물으며 배우고 싶어 했다.
워낙 어리니 같이 지내는 아이들의 어휘 수준도 높지 않을뿐더러 자유롭게 놀기만 하니, 언어 때문에 아이가 힘들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처음의 외계어는 점점 진짜 영어로 많이 바뀌어갔고, 리스닝은 대부분 올바르게 이해했다.
핼러윈을 앞두고는 크게 행사를 했다. 아이들부터 선생님들까지 모두 코스튬을 입고 잔디밭에 앉아 무시무시한 마녀 그림책을 읽은 후에 점심으로 피자를 배달시켜 학부모들도 같이 앉아 나눠 먹었다.
그리고는 줄을 늘어서서 커뮤니티 센터 안의 모든 사무실을 빠짐없이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사탕 줄래 아니면 장난친다!)을 외쳤고, 직원들은 맛있는 초콜릿과 캔디를 준비하고 있다가 아이들의 마녀 분장에 화들짝 놀라는 척을 하며 캔디를 한 움큼씩 집어 바구니에 넣어 주었다.
곳곳에 생기는 크고 작은 펌킨 패치(Pumpkin Patch)로 필드트립도 갔다. 초록 들판에는 오렌지색 호박들이 들판 가득 탐스럽게 놓여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이 곳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호박을 하나 골라 가질 수 있다. 높게 쌓아 올린 건초더미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고, 키가 큰 옥수수 미로 (Corn Maze) 사이를 뛰어다니며 출구를 찾느라 바쁘다. 여러 동물들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페팅 주(pettingzoo)도 인기이다.
미국에 오기 직전, 한국에서 한 달 내내 감기약과 항생제를 먹던 아이는 이곳에서 매일 뛰어 놀고 온 몸으로 햇살을 흡수하며 캘리포니아 오렌지처럼 싱그럽게 자랐다.
감기약은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딱 한 번 이틀 동안 먹었다.
[ 에필로그 ]
아이는 한국 나이로 올해 여섯 살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영어 유치원과 숲 유치원 중 고민하다가 영어는 평생 해야 할 것 같고 숲에서 놀 수 있는 때는 지금뿐일 것 같아 숲 유치원을 택했다.
매일 숲에 가서 사계절을 온몸으로 흠뻑 느끼며 비 오는 날은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고, 눈 오는 날은 산비탈에서 썰매 타며 논다. 우리 어디 놀러 갈까? 물으면 청계산을 가자거나 계곡에 다슬기 잡으러 가자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놀라우리만큼 단기간에 쑥 늘었던 영어는 예상대로 썰물처럼 쭉 빠져나갔지만 미국 가기 전 영어에 가지고 있던 거부감이 없어져서 지금은 책이나 만화,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본인도 열살 되면 언니처럼 반드시 혼자서 미국의 친구 집에 놀러 가겠다는 목표를 세워서 잠도 제 방에서 혼자 자기 시작했고 옷고르기, 입고벗기, 책상정리, 씻기, 먹기 정도는 가뿐히 혼자 한다. 언젠가 미국 가서 친구 니아와 이야기 해야 한다며 영어책을 집어들고 외계어를 중얼거리며 영어를 연습하는 척 한다.
'넓은 것은 오지랖, 깊은 것은 정, 많은 것은 흥 뿐이고
좁은 것은 세상, 얇은 것은 지갑, 적은 것은 겁 뿐인 가족'
<'겁 없이 살아 본 미국' 책은>
평범한 40대 회사원 남자가 미국 경영전문대학원(MBA) 입학부터 졸업하기까지,
10년 차 워킹맘이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 무료영어강좌에서 수십 개 나라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알파벳도 구분하지 못하던 큰 딸이 2년 만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완독하고,
Yes/No도 모르던 작은 딸의 미국 유치원 적응기까지, 다양한 미국의 교육 현장 이야기와
전화도 터지지 않는 서부 국립공원 열 곳에서 한 달 이상의 텐트 캠핑,
현지인들과의 소중한 인연,
경험이 없는 덕분에 좌충우돌 해 볼 수 있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담은 책.
출간 두 달 만에 2쇄 인쇄. 브런치 글 100만 뷰.
페이스북 팔로워 1400명(www.facebook.com/MKLivingUSA)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리워지는 장소와 사람과 음식이 생겼고
나이와 국적에 대해 견고하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친구 삼을 수 있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고,
서로 다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며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고
낯선 곳에 뚝 떨어져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해서 주저 앉아 울고만 있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이 결국은 '성숙해진다'는 것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