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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Sep 20. 2018

가을, 뉴욕이 가장 뉴욕스러운 계절

당신의 수많은 가을을 기억하나요

가을이 오고 있다.


하루 종일 추적추적 내린 비가 갠 거리를 걸으며 가을의 냄새를 맡았다. 선선한 가을의 내음은 여름 비가 내린 후 서늘한 날의 냄새와는 분명 다른 향기가 난다. 여름의 강렬한 햇빛을 흠뻑 쬐고 한 계절 푸르름을 뽐내던 나무들의 생기가 한풀 꺾이고, 이미 갈색으로 변한 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있을 때쯤 신기하게도 공기 속에서도 가을 냄새가 난다.


비 온 후 젖은 나뭇잎, 며칠 새 부쩍 서늘해진 온도에서 느껴지는 나무 냄새.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간, 늘 걷는 길이지만 오늘은 왠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거리의 냄새.


9월의 끝자락에 맡을 수 있는 이 냄새는 뚜렷한 가을의 향기다. 뉴욕이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 가도 분명 이 가을 냄새가 난다. 여름의 향기가 거의 사라졌다고 느낄 때쯤엔 이미 가을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


나에게 있어 일 년에 두 번 마음이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소란스런 시점은 바로 여름의 끝 바람이 서늘해지며 가을이 올 때와, 길고 긴 겨울 끝 바람에서 상냥한 봄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다.

뉴욕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을의 거리

올여름 한국은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되었다는데 실제로 뉴욕보다 한국 기온이 훨씬 높았던 것도, 그런 날씨가 계속해서 지속된 것도 처음이었다. 한국의 여름은 습하기까지 해서 아마 끔찍하게 더웠을 것이다. 인스타그램 피드에도 여름 내내 더운 날씨 얘기로 가득했다.


올여름을 한국에서 보낸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다렸을 가을 이리라.


뉴욕은 한국만큼 덥진 않았지만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뉴욕의 여름은 보통 9월 말까지로 본다. 10월 초까지도 가끔 더운 날이 있지만, 10월 중순쯤이 되면 완연한 가을이다.


뉴욕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계절은 꽃이 만발하는 봄일 것이다. 봄의 뉴욕은 생기발랄하고, 우아하고, 향기롭다. 하지만 가장 운치 있고, 분위기 있고, 과거와 미래가 어우러진 "뉴욕스러운"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계절은 가을이다.

뉴욕에 한 번도 안 와본 사람이 딱 한번 올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가을에 오는 걸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봄을 가장 좋아하지만 취향을 떠나 남녀노소가 모두 뉴욕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은 가을인 것 같다.


가을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특유한 캐릭터를 보여주기에 최적의 계절이다. 뉴욕의 가을은 시크한 도시 남자 같고, 봄은 화려한 아가씨 같다. 겨울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해서 볼거리와 할 거리가 많다. 내가 처음 뉴욕여행을 왔던 것도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여름엔 화창해서 초록이 넘쳐나고 활기차지만 밖에서 하루종일 관광을 다니기엔 조금 더운 감이 있다.


10월 초~11월 첫째 주 사이에 뉴욕에 오면 가을 정취 넘치는 뉴욕을 만끽할 수 있다.

가을의 뉴욕은 너무 아름다워서, 딱히 별 일이 없어도 괜스레 들뜨고 싱숭생숭하다. 이유 없이 마음 한편이 시리고 허전하다. 특별히 행복한 한 해도 아니었는데도 올해가 벌써 간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아쉽다. 내게만 빨리 흘러가는 것 같은 이 세월을 붙잡고 싶어진다. 뉴욕의 가을은 감정이란 게 메마른 사람들의 영혼을 감성으로 촉촉이 채운다.


뉴욕에 거주하는 동안 수많은 지인들이 다녀갔다. 미국 내 타주에서 오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왔다. 출장, 유학, 어학연수, 가족여행, 동료들과 오는 여행 등 방문 목적도 다채롭다. 뉴욕에 살지 않았다면 아마 다시 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오래된 인연들, 반가운 얼굴들이 뉴욕에 방문하면 같이 밥을 먹고 옛날이야기도 나누고 내가 아끼는 뉴욕의 장소를 소개해준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안타깝게도 가을에 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을의 길목에 들어서던 어느 날 유니언스퀘어 마켓

서늘해진 공기 속 가을 향기를 맡으면 문득 내가 스쳐간 이전의 가을에 대한 추억에 흠뻑 빠진다.


내 인생 수많은 장소에서 보낸, 미처 기록하지 못한 채 지나가버린 가을을 세어가며 기억을 되짚고 싶어지는 감성에 빠진다. 그 언젠가 이맘때쯤 듣곤했던 음악이 생각나 오래된 플레이리스트를 뒤지고, 언젠가 이맘때쯤 걸었던 장소의 향기가 그리워져 그곳에 찾아간다.


특별할 것 없는 자잘하고 지질한 추억이 있을 뿐인 그곳에 가서 애써 내 발자취를 더듬으면, 그때의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지, 맞아 여길 걸으며 그런 걸 꿈꿨지, 하며 회한에 잠긴다. 그때 자주 가던 레스토랑은 없어졌지만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결국 어떻게든 열심히 살았고 분명 그때보다 잘 살고 있다, 하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지난 십 년간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대부분 가을에 일어났다.


처음 뉴욕에 유학 와서 학교에 적응하고 알바를 하며 뉴욕 생활에 적응하던 것도 가을이 오던 9월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긴 브루클린 집으로 이사를 간 것도 11월의 비오는 토요일이었고, 생후 6주 된 아깽이였던 첼로를 처음 집으로 데려온 것도 10월 초 가을이 시작되던 때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시절이고 난생처음 키워보는 애완동물이라 고민이 많았는데 이제는 8살의 중년 고양이가 되어 건강하게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생애 첫 가을을 온몸으로 맞이하던 아가냥이 첼로

지인의 친구였던 남편을 처음 만났던 것도 쌀쌀해지고 있던 9월의 끝자락이었다. 그때도 마음 한편이 시렸던 때였다. 평소에는 남자들에게 철벽만 치며 연애와 담쌓고 살던 내가 급격히 외로움을 타기 시작하던 즈음 그를 만났고, 우린 4개월 만에 결혼했다.


일 년 중 마음이 가장 헛헛한 때가 딱 찬바람 불기 시작하는 이맘때인가 보다. 딱 이때쯤 자꾸만 내 삶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채워가며 공허함을 달래왔다.



일본 음악 빠져 살면서 오랫동안 꿈꾸던 첫 일본 여행을 떠났던 때도 단풍이 우거지던 11월이었다.

 

그때는 단풍이 아름다운 계절에 여행을 가게 된 데에 큰 감흥은 없었고, 그저 난생처음 가는 일본 여행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그때의 사진을 들춰보면 알록달록한 가을 색이 내 첫 여행의 다채롭고 운치 있게 가득 채워주고 있다. 당시에는 리쿠로 오지상 치즈케이크에서 줄을 서고, 북오프를 찾아다니며 중고 음반을 사는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가을 단풍을 나중에 사진으로 보면서야 다음엔 꼭 제대로 된 단풍여행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나이 들수록 자연의 아름다움이 제일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른들이 계절마다 꽃구경 단풍구경을 관광버스 타고 다니시나 보다. 나도 이렇게 나이 먹는구나.

벚꽃이 만발하는 계절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단풍이 우거진 오사카 성

한때는 늘 붙어 다니던, 이제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지고,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던 지나간 인연들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나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나만 뒤쳐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지금 이정도라도 살고 있는게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메말랐던 감성이 불현듯 폭풍우처럼 몰아치게 하는 이른 가을의 향기는 예전의 좋은 기억들을 되새겨주고 지금의 생활에 감사하며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게 만든다. 여유시간이 별로 없는데도 늘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이제는 한번 배워볼까 싶어 지며 왠지 나를 더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계절이다.


엊그제는 도서관에서 '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ed)'라는 책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책으로 꼽으며, 두고두고 힘들 때마다 읽으면 견딜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오랫동안 흥미를 가지고 있던 책이다.


고전이라 그런지 역시 첫 줄부터 아주 강렬했다. 뉴욕 태생의 정신과 의사가 쓴 이 책은 웅장하고 심플하게 시작한다.

Life is difficult.
Life is difficult. This is a great truth, one of the greatest truths. * It is a great truth because once we truly see this truth, we transcend it. Once we truly know that life is difficult-once we truly understand and accept it-then life is no longer difficult. Because once it is accepted, the fact that life is difficult no longer matters.

마치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이 책은 '인생이란 원래 어렵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생이란 원래 고달픈 것이고, 고통의 연속인 것이 인생의 본질인데 사람들은 자꾸 사는 게 쉽고 행복하길 바라고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에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인생이란 원래 어려운 것'이란 진리를 받아들이면 인생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처음 몇 장을 후루룩 읽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도 늘 왜이리 사는 게 힘든지, 행복해져야 하는데 라고 생각한 적이 수없이 많았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면 가끔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도 신기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처음 몇 장만 읽었는데도 마음이 편해져서 일단 거기까지만 읽고 나머지는 아껴두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한동안은 큰 스트레스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니, 사람들이 왜 이 책을 인생 책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사는 게 힘들다 느껴지면 다시 찾아서 읽어보는 걸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 도서관을 나와 오랜만에 센트럴 파크로 걸어갔는데 아직은 이른 가을이라 대부분 나무들이 초록색이고 햇빛이 잘 드는 쪽 나무들만 조금 누르스름할 뿐이었다. 앞으로 몇 주동안 빠르게 물들어 갈 푸르른 나무들.


올 가을은 다른 해 보다 더 정성껏 살아보고 싶어 진다. 늘 해보고 싶었던 사과 따기 체험을 위해 교외의 과수원에도 가보고 싶고, 일주일에 한 번은 센트럴 파크에 가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평소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도 가서 여유를 부려보고.


가을이 온다. 가을이 참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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