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나의 벗, 세상의 모든 다이애나에게
그리운 나의 벗, 나의 영원한 친구 다이애나.
잘 지내고 있어?
어른이 되어 네가 늘 꿈꾸던 것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니?
일상이 매일 행복할 순 없겠지만, 사소한 것에서 낭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있어?
난 말이야.
어른이 되면 내 마음속 생각과 내 안의 목소리가 모두 어른의 것으로 바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겉모습만 달라지고 아주 조금 생각이 성숙해졌을 뿐, 다른 건 모두 그대로야.
당황스러울 정도로 난 열세 살에서 별로 자라지 않은 것 같아.
사실 사춘기가 왔을 때 조용하고 얌전해져서, 이제 더 이상 상상을 좋아하는 수다쟁이가 아닌 어른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원래의 성격으로 돌아왔지 뭐야. 상상을 많이 하고, 버릇처럼 공상에 젖고, 옆 사람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재잘대는 그런 나로 말이야.
어릴 때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어른이 된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마릴라 아주머니도 분명 어릴 때부터 겉은 무뚝뚝하지만 속은 상냥한 여자아이였을 거야. 어릴 때의 자신을 완전히 잃은 인생은 너무나 삭막할 것 같지 않아? 나는 조용하고 말 없는 나보다 이렇게 상상을 즐기고 낭만이 충만한 지금의 내가 좋아. 매튜 아저씨도 낭만을 모두 다 버리는 것보다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쪽이 더 낫다고 하셨어.
너도 분명 어릴 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네 안에 남아있을 거야.
어렸던 너의 모습이 좀 더 다듬어지고, 너라는 나무의 뿌리가 좀 더 깊고 단단하게 뻗었을 뿐.
네 안에 있는 그 소중한 아이를 세상 어느 보석보다 귀하게 대해주길 바라.
집을 처음 떠났던 날을 기억하니.
정말이지 나는 이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 같아 서글펐어.
나는 늘 도시에서 살도록 태어났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시의 집들은 낭만을 생각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야. 난 창밖에 나무가 보이는 방에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훨씬 더 행복하기 수월하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내가 처음 살게 된 아파트의 창밖으론 고작 옆집의 창문밖에 보이질 않았어. 그러니 봄에 벚꽃이 환하게 피어도, 이른 아침 새들이 지저귀어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 내 창 밖으론 그저 오래된 커튼이 드리워져 굳게 닫힌 옆집의 창문만 보일 뿐이었으니까. 너무 칙칙하고 우울해서 늘 고향 집의 꽃과 나무들을 상상해야만 했어.
너무나 소박해서, 상상할 여지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집이었던 건 분명해.
도심의 공원에는 자작나무 숲이나 사랑의 오솔길에 피던 오랑캐 꽃은 없지만, 봄에 한껏 피는 벚꽃나무들은 너무나 아름다워. 세상이 눈의 여왕님의 연한 분홍색으로 가득한 봄은 정말 매력적인 계절이야. 꽃잎이 흩날리는 것도, 잎이 다 떨어져 텅 빈 나무까지도 아련해.
아, 봄이란 계절은 정말 어느 도시에서 보내도 정말 낭만적인 것 같아. 아직 많은 도시를 가보진 않았지만 말이야. 난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어. 봄은 정말 상상하기에 좋은 계절이니까. 나는 봄이 오면 행복으로 충만한 한 해를 상상해. 봄은 수많은 계획을 하고 새로운 꿈을 꾸기에도 제격이야.
물론 그 계획을 다 지키진 못하지만 상관없어.
겨울에 나뭇잎이 지고 봄이 되면 다시 꽃이 피는 것처럼, 나도 다시 작은 꽃을 피우면 되니까.
누구에게나 상냥한 봄을 헤아리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어.
나 말이야. 가끔은 아날로그 시절이 그립기도 해.
계절이 바뀌면 사과와 딸기를 따고, 반쯤 타고 남은 초 하나가 까만 밤 내 방을 환하게 밝히던 시절.
이웃끼리 갓 구운 쿠키와 딸기 케이크를 나눠먹던 시절 말이야.
지금 아무리 혼자서 바삭바삭한 비스킷을 구워봤자 그때의 정겨운 맛이 나지 않는 걸.
돌아보면 우리 어린 시절은 풍족하진 않았어도 분명히 낭만의 시대였어.
찬란했던 그 시절의 추억이 내 마음 어딘가에 빛나고 있어서 지금의 괴로운 일도 견뎌낼 수 있는 것 같아. 어릴 때 내 방을 밝히던 촛불처럼, 작지만 환하게 빛나는 그런 추억 말이야.
행복한 시절을 되돌아보며 생각해보는 건 역시 즐거운 일이야.
너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그게 없었다면 나는 아마 바짝 마른 장작처럼 속이 다 타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은 가끔 못 견디게 힘들었거든. 어쩌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에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생각하면, 눈물마저 달콤하게 느껴지곤 했어. 그때의 내가 이렇게 훌쩍 커서 어른의 인생을 맛보고 있구나, 싶어 기특하게 느껴져서.
아아, 어린 시절을 그리는 마음은 마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 같아.
어릴 땐 그렇게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더니, 막상 자라고 보니 세상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차가운 곳이지 뭐야. 어른들의 세계엔 악한 사람들도 너무나 많아. 세상에 조시 파이보다 훨씬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나도 그런 인간이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워질 때도 있어.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이 있다면, 적당히 까칠하게 내 마음 가는 데로 선을 지키며 사람들을 대해도 괜찮게 받아들여진다는 거야. 어릴 땐 늘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여야 한다고만 하잖아? 어른들 말이 틀린데도 말대꾸를 하면 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혼나곤 했어.
하지만 모든 어른이 옳지는 않은걸.
이제는 나를 더 잘 지켜낼 수 있게 된 것 같아. 내 쪽에서 강하게 나가도 선을 넘지만 않으면 누구도 나를 못된 어린이라고 하지 않아. 상대가 나에게 예의를 갖추도록 적절한 방어적 태세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란 걸 알게 됐어. 어때, 꽤나 근사하게 들리지 않아?
처음 블랙커피를 마셨던 때를 기억하고 있어.
아무리 즐기려 해도 이해할 수 없던 맛.
어른들만 즐길 수 있는 쓰디쓴 맛.
난 말이야. 처음 블랙커피를 마셨을 때 너무나 써서 기절초풍할 뻔했지 뭐야? 도대체 이런 탄 맛 나는 음료를 왜 마시는지 이해가 안 갔어. 쓴 커피를 차 마시듯 즐기는 도시의 세련된 사람들 옆에서 그런 티를 낼 수 없어 끝까지 천천히 다 마셨어. 그리고는 집에 가서 미친 듯이 청소를 하고 물걸레질을 해댔지. 커피를 마시면 기운이 샘솟는다는 걸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나 이제는 에스프레소도 마실 수 있는 여자가 되었어. 달콤한 케이크와 쓰디쓴 커피를 마시면 어쩐지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단 말이야. 그렇게 매일 먹다 보면 아마 뚱보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어른이 된다는 건, 블랙커피와 같이 쓴 맛에 익숙해지는, 그래서 쓴 게 쓴 줄 모르는 그런 것일까?
어떤 게 어른스러운 건지 아직도 잘 몰라 혼란스러운 나를 그냥 이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 이대로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았어. 어쩐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평범한 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거든.
나의 가능성을 모른 채 죽어버린다는 건, 상상만 해도 너무 비극적이잖아.
그런데 마릴라 아주머니는 그건 뿌리부터 잘못된 생각이라셨어. 내가 그런대로 잘 살고 있지 않다면 내가 잘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다는 거야. 하긴 특별히 문제가 없이 인생이 그냥 흘러가는 느낌이 들 때나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 그러니 “나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려고 할 땐, “흠, 나 꽤 잘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건설적이야. 어차피 정답이 없는 인생을 걱정으로 낭비하는 건 너무나 효율적이지 못해.
밀크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와,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맛 초콜릿이 든 상자가 있다면, 난 알 수 없는 초콜릿이 가득한 쪽을 택할 거야. 그중에 쓴맛, 잡초 맛, 상한 우유맛이 섞여있다 해도 어쩔 수 없어.
계속 똑같은 맛만 보는 건 정말 지루하고 불행한 일이야, 그 맛이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난 말이야. 내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요정이 나타나도 단연코 보지 않을 생각이야.
내 인생이라는 캔버스에 펼쳐질 행복과 비극, 그 다채로운 희로애락을 모두 생생하게 느끼는 쪽을 택하겠어. 그곳에 절망의 구렁텅이가 여러 개나 있더라도 할 수 없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될지라도 말이야. 내가 넘어야 할 고비라면 모두 견뎌낼 거야.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있는 힘껏 살아가는 편이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인생일 거란 생각이 들어.
나 아직 엄청나게 잘 나가거나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귀부인들만 쓰던 은방울 꽃 향수를 사서 가끔 뿌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 향수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오히려 너무 많이 뿌려버리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걸. 하지만 문득 우울하거나 초라한 느낌이 들 때, 아름다운 향수를 뿌리고 나가서 갓 구운 파이를 사 먹으며 거리를 거닐면 어쩐지 근사한 삶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들어.
파삭파삭하고 폭신한 라즈베리 맛 마카롱을 먹으면 분명 누구라도 조금은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해. 분홍색은 역시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색이야, 게다가 장미향이 나는 디저트라니, 정말 사랑스럽지 않아? 나 언젠가는 꼭 파리에 여행을 가고 말 거야. 여행이란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야. 역시 프랑스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 라틴어는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거든.
세상에 내가 진심으로 잘 되고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은 의외로 몇 명 안된다는 걸 알게 됐어.
내가 에이버리 장학금을 탔을 때도, 그 일을 진심으로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 사람은 나의 가족과 다이애나뿐이었잖아?
질투란 건 정말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감정일 뿐인데 말이야.
나도 가끔은 질투라는 감정이 느껴질 때도 있어.
누군가 가진 걸 나도 너무나 갖고 싶어 질 때, 내가 죽도록 원해도 얻기 힘든 걸 누군가는 너무 쉽게 얻고 승승장구하는 걸 보면 나 자신이 초라하고 세상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부러워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도 질투가 사라지지 않을 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자비로운 여왕이라고 상상하곤 해. 그리고는 우아하게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건네는 거지. 그렇게 상상하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여왕이 된 기분이 들어.
물질적인 걸 가지진 못했어도 마음은 부자인 편이, 넘치게 갖고도 마음이 텅 빈 허영덩어리인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지 않겠어?
있는 힘껏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나서 나는 나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질투란 감정에서 자유로워 오롯이 나의 인생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리고 나에게 꽤 바람직한 자극이 되기도 해. 길버트 블라이스와 경쟁을 하며 공부에 열중했던 때가 있었지. 그 애 덕분에 결과가 훨씬 더 잘 나왔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어. 그런 긍정적인 자극이 있는 인생은, 자극이 없는 인생보다 훨씬 더 보람된 것 같아.
남들이 잘 나가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들을 시기하는 나를 보는 거야.
잠깐이라도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되는 건 정말 끔찍해.
그래서 나를 시샘하는 사람들도 가엾게 여기고 넘기기로 했어.
우아하고 자비롭게.
나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