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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Feb 24. 2019

버킷리스트 일본 벚꽃여행

벚꽃 덕후의 본격 소원성취 구라시키 벚꽃여행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써 오고 있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대단한 리스트는 아니고 "서른 넘어 시작한 영문학과 공부 마치기"이 손쉽게 가능한 것부터 (2019년 현재 실현 완료), "프라하에서 뜨르들로(Trdlo) 먹어보기"와 같이 호기심에 채워 넣은 것들도 많다.


그중 한 가지가 벚꽃시즌에 일본 여행 가기였는데, 5년간의 회사생활 끝에 훌쩍 어딘가 떠나고 싶었을 때 가장 부담 없이 하기에 딱인 여행이었다. 언제 또 이 타이밍에 시간이 날지도 모르고, 그동안 일하면서 마음고생에 하얗게 불태운 영혼을 행복 에너지로 충만하게 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십 년 만에 찾은 오사카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달라진 게 없었다.


간사이 공항에서 열차를 타고 남바 역까지 오는데, 처음 하는 솔로 해외여행임에도 어쩐지 긴장감이란 게 1도 없었다. 아침 일찍 대전에서 인천공항, 인천에서 간사이까지 오는 여정이 피곤해서였을까. 열차 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이미 캄캄했고 뒤늦게 퇴근하는 사람들만 몇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가고 나서야 열차를 잘못 탔다는 걸 알게 됐다.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는데 지나치는 역 없이 하나하나 다 서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급히 내렸다. 마침 내린 역은 바깥에 있어서, 문을 나섬과 동시에 찬바람이 훅하고 온몸을 감싸 으슬으슬해졌다. 비가 채 마르지 않은 축축한 땅바닥. 날카로운 밤바람에서 차갑고 낯선 이국의 냄새가 났다.


텅 빈 지하철 플랫폼엔 저 멀리 건너편에 한두 명 정도 보일 뿐이었고,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옷도 얇게 입고 열차를 잘못 탄 관광객은 나뿐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서서 열차를 기다리다 캐리어를 열어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두르고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지금 외모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러다 길 잃고 아예 엄한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숙소 도착할 때까지는 정신 바짝 차리자.

공항에서 열차를 타러 가는 길에 벚꽃과 포켓몬이 환하게 반겼다.

포켓와이파이가 없어 남바 역에 내려서도 한참을 헤매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가방을 두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관광객들이 밀집된 지역이라 사람들은 많았지만 여기저기 문 닫은 곳들이 대부분이었고, 기대를 갖고 들어간 세븐일레븐에는 술 취해 얼굴이 벌게진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얼큰한 술냄새가 확 풍겼다. 먹을만한 것들은 거의 다 팔리고 삼각김밥도 인기 없는 맛들 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단 복숭아 물과 그나마 양호해 보이는 도시락을 간단히 사서 나왔는데, 바로 호텔로 돌아가긴 아쉬워 가까운 호텔을 두고 일부러 멀리 돌아서 걸었다. 돌아도 돌아도 보이는 건 문 닫아 한산한 골목과 술 취한 사람들, 하루 일정을 다 끝내고 고단한 관광객들 뿐이었다. 밤늦게야 도착한 나는 마치 페스티벌이 다 끝나 쓰레기만 뒹구는 거리를 혼자 걸으며 애써 신나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뭔가 큰 기대를 갖고 온 건 아니지만 첫날밤이 춥고 쓸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첫날밤. 도시락도 내 마음도 차가웠다. 나 여기 왜 혼자 왔을까?

이튿날은 맑았다. 어제만큼 춥지도 않았다. 초행길은 아닌데 와이파이 없이 길을 찾아다니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도톤보리가 코 앞인 줄 알았는데(나중에 익숙해지니 걸어서 5분 내 거리였는데) 그냥 분위기 따라 걷다 보니 1시간을 넘게 걸으며 점점 관광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결국 옷가게 직원에게 물어 다시 거꾸로 길을 돌아가며 길을 찾았다. 도톤보리는 십 년 전과 다른 게 없었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 신사이바시의 백화점들도 그대로였고, 왁자지껄한 뒷골목 맛집들과 드럭 스토어들은 여전히 관광객들로 미어터졌다.


간사이공항에서 다른 지역으로 바로 가기엔 부담스러울 것 같아 오사카에서 2박을 하고 옮기기로 한 건데, 하루 있어보니 그 기간 동안 딱히 할 일이 없다. 짐을 늘리면 안 돼서 모든 쇼핑은 마지막 주에만 할 예정이라 백화점에서도 구경만 할 뿐 뭘 살 수도 없었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았다. 그냥 1박만 하고 이동할 걸 그랬다.

마스터 마음 가는 데로 만들어 매일 달라진다는 이곳의 음식은 하나하나 주인의 빼어난 손맛이 느껴졌다.

둘째 날 밤엔 친구를 만났다. 뉴욕에서부터 알고 지낸 그녀는 여기서 보니 아주 진한 간사이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어찌나 구수한지 간사이 아저씨 같았다. 뉴욕에서 만난 다른 일본 친구들은 대부분 도쿄 출신이거나 사투리가 거의 없는 지역 출신이었다.


쿠시카츠를 먹고 싶다고 하니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 후 어느 건물 3층에 있는 쿠시카츠 집으로 데려갔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생맥주와 함께 이것저것 시켜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얘기했더니 미리 얘기했으면 온천 같은 곳은 같이 갔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다음날 아침도 어제만큼 날씨가 화창했다.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캡슐호텔 안녕.

구라시키로 간다.
물이 있고 벚꽃이 있는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힐링 그 자체였다.
구라시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구라시키는 미관지구 때문에 선택한 소도시인데 인근에 고베와 오카야마 등 다른 중소도시들이 여럿 있어서, 상대적으로 호텔이 더 저렴한 이곳에 일주일 가량 묵기로 했다. 구라시키 가는 길에도 미미하게 조금씩 헤매긴 했지만 그럭저럭 시간 지체 없이 도착했다. 오사카를 벗어나니 이미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부터가 힐링 그 자체다. 


구라시키 기차역 밖으로 나온 순간 펼쳐진 풍경은 어렴풋이 기억하는 우리나라 80년대 지방 도시 같았다.
 

아직 학교도 가지 않았던 나이, 혹은 유치원 때 엄마 손을 잡고 다니던 시절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다녔던 우리나라의 도시들이 딱 이런 모습이었다. 그 도시들이 현대화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높은 건물도 별로 없고 밤엔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곳. 사람도 차도 많지 않아 취향저격이었다. 지난 이틀간 오사카에서 마음속에 남몰래 키웠던 이번 여행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깨끗이 씻겨나갔다. 캡슐호텔에서 다른 사람들 소음에 잠을 설치며, 여기 사람도 너무 많고 너무 별론데 왜 왔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지? 하며 수많은 생각을 했더랬다.


새소리를 들으며 서 있으니 말끔한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니 아래로 꽃시계가 내려다 보였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타지에 가면 한 두 번쯤 봤음직한 꽃시계다. 소박하고 아담해서 더 정겹다. 첫눈에 나를 과거로 데려다준 듯한 이곳의 옛날 감성을 한껏 느끼며 비로소 머릿속 잡음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 이런 곳에 오려고 계획한 여행이었지.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80년대로 들어온 듯했던 구라시키 첫인상. 어릴 적 외갓집 가는 길에 광주에 들어서면 이런 꽃시계가 있었다.

내가 여행에서 원하는 건 크고 대단한 게 아니었다.


낯선 곳의 정취를 흠뻑 느끼며 사진으로 수백 번 봤던 곳을 내 눈으로 보는 것. 지나가다 좋은 냄새를 따라가 지금 방금 튀겨내 입이 댈 정도로 뜨겁고 바삭한 크로켓을 사 먹는 것. 사람들이 다들 들고 다니는 연분홍색 복숭아 아이스크림(오카야마 지역 특산품이란다)을 어디서 파는지 찾아내 나도 사 먹어 보는 것. 한입 크게 베어 물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와 광대가 승천하며 웃음이 나는 것. 하나같이 큰돈이 들 게 없는 소소한 것들 뿐이다.


그리고 벚꽃을 질릴 때까지 보는 것. 그런 걸 위해 난 뉴욕에서 한국, 한국에서 일본까지 긴 여정을 왔다.


호텔도 마음에 쏙 들었다.


더는 캡슐호텔처럼 소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구라시키 미관지구 바로 앞이라 역에서는 십분 정도 걸어야 했지만 미관지구를 아침저녁으로 잠깐이라도 매일 걷고 싶었던 나에게 딱이었다. 역에서 호텔 가는 길에 로손,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등이 있어 편했고, 기차역 뒤편에는 Ario라는 큰 몰도 있었다. 아리오 몰 안에는 슈퍼마켓과 다양한 매장들이 있어서 수시로 들러 장도 보고 양말이나 치약 같은 생필품도 살 수 있었다.

차도 별로 없고 조용한 곳. 나는 확실히 대도시보다 소도시가 좋다.
호텔 방 창문으로 보이던 고즈넉한 기와지붕 뷰.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뉴욕에서 한국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만났던 오카야마 출신 친구에게 구라시키에 간다고 하니 거기 볼 거 하나도 없는데 왜 가냐고 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 조용하고 아무것도 할 거 없는 그 도시가 내가 딱 원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오사카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곳에는 이미 벚꽃이 피고 있었고, 도착한 첫날 이미 만개에 가깝게 핀 벚꽃나무도 있었다. 숙소에 짐을 두고 바로 미관지구로 향했다. 걷다 보니 몇 달 전부터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들이 펼쳐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사는 걸까? 살아보고 싶은 도시를 만나거나 구라시키처럼 한적한 도시에 가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들의 생계를 걱정하는 건 아니고 나도 할 수만 있다면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고 있을까.
벚꽃여행 3일 차에 드디어 처음 만난 벚꽃. 반가워.

중학교 3학년. 다들 H.O.T와 젝스키스에 빠져있을 때 나는 제이팝을 처음 접했다.


일본 뮤직비디오와 무대에 벚꽃잎이 흩날리는 효과를 자주 보면서, 저들은 정말 다양하고 빈번하게도 벚꽃을 활용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무로 나미에의 Can you celebrate?이나 SPEED의 My Graduation 같은 곡의 뮤비에서 잔잔하게 벚꽃잎이 뿌려지는 모습은 노래의 아련함을 더 극대화하곤 했다.


20대 초중반에 뉴욕으로 이주하고 나서 매년 봄마다 우울했던 기분이 업되고 더 행복해지는 걸 알았다. 바람에 봄 냄새가 나면 괜히 기분이 들뜨고 알 수 없는 희망이 내 안에 가득 찼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전에 없던 긍정 에너지가 솟구쳤다. 매년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봄을 기다리고 봄에 피는 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뉴욕의 봄도 정말 아름답다.


그때부터였다. 벚꽃과 봄의 아름다움에 취하기 시작한 게.

벚꽃이 청초하게 핀 미관지구의 사진을 뉴욕의 오카야마 출신 친구에게 보여주니, "아, 미관지구! 나 중고등학교 때 학교 끝나고 친구들하고 여기 엄청 자주 갔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진짜 옛날 생각난다. 나츠까시이(그립다)~"라며 추억에 젖었다.


나는 학교 끝나면 친구들과 떼 지어 가서 쫄면을 사 먹고 스티커 사진 찍고 노래방에 다니며 놀았는데 오카야마 중학생들은 이런 데 와서 유유자적 자연을 벗 삼아 놀았구나. 그때부터 이런델 와서 놀다니 꽤나 감성적인 중학생들이다. 미관지구를 걸으며 교복을 입은 학생 무리를 볼 때마다 뉴욕에 있는 친구를 떠올렸다.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 소도시에 태어나 자란 그녀. 학교가 끝나면 미관지구에 와서 군것질을 하며 돌아다니던 중학생 시절의 그 친구는 10년 후에 자기가 뉴욕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며 패션위크 때마다 바쁜 사람으로 꽤나 잘 나가게 될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것. 그래서 더 위대하고 신기하다.

밤이 되면 더 운치 있고 예뻤다.

*일본 벚꽃여행을 계획하는 팁*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는 벚꽃 개화기가 매년 초 발표된다. 벚꽃철인 4월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정확한 날짜의 개화기를 알 수 있다. 전년도에 맞춰서 계획을 짜면 그해의 날씨에 변동이 생겨 평년보다 늦거나 빨라질 수 있어 개화기에 못 맞출 가능성이 있다. 


특히 여행기간이 2박~3박 정도로 짧은 경우에는 벚꽃이 하나도 피지 않은 상태를 보거나, 꽃이 다 지고 텅 빈 나무만 보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비라도 내려 날씨에 변수가 생기면 개화기에 딱 맞춰가도 꽃이 많이 졌을 수도 있다. 나는 3월 중순까지 기다려서 최대한 업데이트된 날짜에 맞춰 4월 첫 주부터 3주 가까이 되는 여정을 짰다. 그 결과 처음 도착했을 땐 꽃이 조금씩 피어나는 시기였고, 중간쯤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어느 도시를 가도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있었다.

떠나는 날 아침에야 처음 본 파란 하늘. 좋은 날씨가 하루라도 있어 다행이다.

안타깝게도 구라시키에 머무르는 기간엔 내내 흐리고 비가 왔다.


몇 번에 걸쳐 여행을 다녀본 결과 나는 어딜 가도 비를 맞고 다니는 일이 잦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을 따라다니는 날씨 운이란 게 정말 있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번 여행 전에도 후에도, 내내 맑았던 도시에 내가 도착하고 나면 흐려지고 비가 왔다.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비록 하늘이 맑은 날은 거의 없었지만 구라시키에서의 여행은 매일매일이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다른 계절에도, 혼자 말고 누군가를 데리고도 꼭 여러 번 더 가보고 싶다.

흐려도 좋았다, 구라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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