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이 들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캡슐호텔.
약 2년 만에 한국에 가면서 몇 년간 미뤄온 일본 여행을 이번에는 꼭 하겠다는 각오로 다양한 계획을 세웠다.
미국에 살며 일본 여행을 하는 건 한국에서 유럽여행을 가는 것과 비슷한 시간적, 경제적 비용이 든다. 편도 비행시간만 해도 14시간이나 걸려서 서울 사는 직장인이 주말에 도쿄에 가듯 떠날 수는 없는 여정이다. 이번엔 미루고 미뤘던 일본 여행을 하기 위해 한국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기로 했다.
마침 언니의 직장 겨울방학과 내가 가는 날짜가 맞물려 유후인과 하우스 텐보스에 함께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정해진 일정이라 비행기 티켓과 호텔 예약을 2주 전에 가까스로 끝냈다.
뉴욕에서 한국까지는 직항으로 약 14시간 반 가량 소요되고, 보통 JFK공항에서 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탄다. 밤 12시~1시 정도 비행기를 타면 인천공항에 아침 5시 정도에 도착하게 된다. 도착한 당일 낮에 언니와 인천공항에서 만나서 오후에 일본행 비행기를 같이 타는 스케줄이었다.
인천공항에는 택배서비스가 있어 국내외로 짐을 부칠 수 있다.
짐을 부치고 다락휴로 향했다.
다락휴는 워커힐 호텔에서 운영하는 캡슐호텔로, 새벽 5시 반쯤 입국한 후부터 후쿠오카 행 비행기를 타는 오후 5시까지 편하게 쉴 곳을 알아보다 찾았다. 원래는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인천공항 인근 호텔에 가려고 했는데 여기가 가격도 더 저렴하고 공항을 벗어날 필요 없이 연결되어 있어 바로 결정했다. 인천공항 내에도 샤워실이 있다는데 출국장에 있어서 내 스케줄로는 시간이 애매했고, 공항 지하 1층에 있는 스파보다는 단시간이라도 침대에서 편하게 잘 수 있는 이곳이 더 좋아 보였다.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면 손발은 퉁퉁 붓고 얼굴은 푸석푸석해진다. 긴 비행 내내 끊임없이 물을 마셔도 수분기 없이 칙칙한 흙빛의 빵빵한 몰골로 입국장을 나서게 된다. 게다가 본가가 대전이라 공항에서도 4시간가량 버스를 타야 해서 나의 뉴욕발 대전행 여정은 언제나 길고 고되다. 이번엔 공항을 떠나지도 않은 채 12시간 이내에 비행기를 또 타고 일본으로 가게 되어, 내 저질체력이 그 스케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비행시간이 14시간인데 한 번에 30분 이상 자질 못하니 참 피곤한 체질이다. 비행기에서 잘 자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호텔이나 친구네 집 등 자는 공간이 바뀌면 그 낯섦에 취해 오히려 집에서보다 더 잘 자는데, 비행기나 자동차 등 이동수단 안에서는 불안함 때문에 도착 때까지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 맘 놓고 잘 수 있는 체질인가 보다.
공항에 도착하니 온몸이 퉁퉁 부어 찌뿌둥해서 얼른 샤워를 하고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입구에 가서 앉아 있으니 친절하게도 30분 일찍 체크인하게 해 주었다. 체크아웃도 30분 당겨졌지만 어차피 넉넉하게 잡아놓은 시간이라 상관은 없었다. 오후까지 총 8시간 이용하기로 했고 결국 한 시간 반 일찍 체크아웃했다.
방은 깨끗하고 심플했다.
좁지만 혼자 쓰기엔 충분히 넓었다. 코트를 걸 수 있는 옷걸이와 거울, 의자, 깨끗한 타월 등 몇 시간 머무르고 가기에 필요한 시설은 다 갖추고 있었다. 와이파이 번호를 모른 채 방으로 와버려서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시던 하우스키퍼 분들께 여쭈려고 방문을 여니, 당신들이 시끄러워 방해가 된 줄 아시고 화들짝 놀라셨다. 너무 죄송해하시는데, "그게 아니고요, 와이파이 어떻게 연결하는지 몰라서요..." 했더니 그중 한 분이 금세 프런트에 다녀오셔서 비번을 알려주셨다.
역시나 친절한 한국의 서비스. 한국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도착 후 내내 몽롱하던 피부에 확 와 닿았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대였나, 투숙객들이 나가고 청소하는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샤워장에 드나들며 복도를 돌아다닐 때도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욕실이 딸린 방도 있었지만 혼자서 쓰는데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총 8시간 이용하는데 5만 원을 넘기지 않아 비용도 부담 없었다. 샤워를 하고 와서 긴 비행의 피로가 풀리기 시작하니 금방 노곤 노곤해져서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소리 알람은 안돼서 진동알람을 맞춰두고 잤지만 오후 1시쯤 되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몇 시간이라도 꿀잠을 자고 나니 시차가 조금은 맞춰진 느낌이었다. 눈도 촉촉해지고 온 몸이 개운해져서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난 듯 에너지가 충만해졌다. 역시 잠이 보약이다.
다락휴에서 꿀같이 단잠을 자고 피로를 풀고 가뿐한 몸으로 후쿠오카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도착한 언니도 방을 보더니 가성비 갑이라며 언젠가 필요할 때 꼭 오겠다는 강한 이용 의사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캡슐호텔이 어떤 이미지인지 잘 모르지만, 나에게 캡슐호텔은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다락휴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후에 캡슐호텔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다른 캡슐호텔에 대한 도전 해 보고 싶어 졌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벚꽃놀이 일본 여행을 계획하며 각 도시마다 호텔과 료칸 예약을 다 끝냈는데 오사카 숙소가 마땅한 곳이 없었다. 벚꽃 개화기에 정확히 맞춰 계획하다 보니 2주 전에야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한 게 문제였다. 소도시는 괜찮았는데 오사카에는 게스트하우스와 5성급 호텔, 위치가 안 좋은 호텔들만 남아있었다. 겸사겸사 이 참에 본고장에서 한번 묵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캡슐호텔로 예약했다.
3주 정도의 긴 여정. 간사이 공항으로 입국해 오사카에서 이틀 머물고 소도시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오사카에서는 큰 계획이 없었고, 다른 도시로 가서 메인 여행을 하기 전 현지 적응을 하며 가볍게 몸 푸는 일정이었다.
처음 캡슐호텔에 대해 들어봤을 때 접했던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캡슐 형에 문이나 커튼이 있는 위 사진 같은 곳이었는데, 삼십 대 중반에 난생처음 나 홀로 해외여행을 하면서 저런 숙소에 묵기엔 나는 아직 여행 초보자였다.
찾다 찾다 고른 곳이 남바 역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퍼스트 캐빈이었다. 지하철에서 숙소까지 동선을 줄이기에도 안성맞춤인 위치였다.
이 곳을 이용해 보고 좋으면 다음엔 용기를 내어 정통 캡슐호텔에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여기저기 둘러보니 시설은 새것 같았고, 수시로 청소와 점검을 하는 듯 아주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침대 옆에 캐리어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문 잠금장치가 없는 대신 침대 아래 열쇠로 잠글 수 있는 금고에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다.
다락휴처럼 문이 있는 1인 샤워실을 기대했는데, 문 없이 파티션만 있는 대중목욕탕 같은 식이어서 좀 놀라긴 했다. 하지만 흠잡을 수 없이 깨끗했고 한 번에 세 명이상이 이용하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여행 갈 때 다 챙겨가지 못하는 고데기, 헤어드라이어 등 미용용품들이 갖춰져 있는 것도 편리했다. 덕분에 여기서 지낸 이틀간은 머리도 예쁘게 하고 나갈 수 있어 좋았다. 그런 시설들은 여행 내내 묵은 다른 더 좋은 호텔보다 더 세심하게 갖춰져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고 나서야 다락휴와의 가장 큰 차이점을 깨달았다.
바로 천장이 뚫려 있다는 사실. 문은 자석으로 탈부착되는 파티션이었고 윗부분은 뚫려있다.
이건 수많은 리뷰를 통해 이미 인지한 부분이었으나, 하필 내 주변에 묵는 사람들이 잡음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란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이야 폐 끼치는 걸 싫어하고 조용조용하지만, 이런 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아닌가. 그 사실을 간과했다.
어떤 리뷰에는 자기가 머문 기간 동안 주변 방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글도 있어서, 저 큰 공간에서 나 혼자만 있어서 무서우면 어쩌지 걱정하기까지 했는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다른 방 커튼을 여는 소리가 너무 가깝고 생생하게 들려서,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내 방 문을 여는 소린가 확인하게 됐다. 또 체크인, 아웃하는 시간이 모두 다르다 보니,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부스럭대며 짐을 싸는 사람, 새벽 두 시 넘어 들어와서 쇼핑한 것들을 풀어 정리하는 사람들 등등 매너 없는 사람 한 명이 막 나가기 시작하니 서로 질세라 경쟁이라도 하듯 더 크게 부스럭 부스럭 대는 통에 이틀 동안 잠을 설쳐야 했다.
이런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에 귀마개와 코골이 방지 패치 등이 있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차라리 자는 곳과 짐을 두는 곳을 분리한, 더 저렴한 일반 캡슐호텔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불편했던 점은 바로 잠글 수 없는 문이었다.
2박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이나 누군가 내 방 문을 열어젖혔다. 첫 번째는 방 번호와 화살표를 제대로 보지 못한 듯한 새 투숙객이었고, 두 번째는 아침시간에 다들 나간 줄 알고 문을 연 하우스키퍼(심지어 남자 직원 ㅠ.ㅠ)였다. 다행히 두 번 다 옷을 챙겨 입은 채 나갈 채비를 하던 중이라 크게 민망한 상황은 없었지만(오히려 상대 쪽에서 더 크게 당황), 그 일이 있고 나니 밤에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둘째 날 아침,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라운지에서 근처 가야 할 곳을 검색하고 있는데 청소하는 여사님이 들어왔다. 마침 일어서려던 중인데 그분이 나를 보고 미안해하니 괜히 내가 죄송해졌다. 다들 나간 시간, 이제 청소해야 하는데 텅 빈 라운지에 게으른 관광객이 혼자 여유를 부리고 있을 줄은 모르셨을 것이다. 나보고 계속 있으라며 나가시는데, 나도 나가야 하는데 계속 있으라고 하시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고 손사래를 치며 나도 나갈 참이었다고 빈 음료수 병을 보여주며 같이 웃었다.
체크아웃 전날 밤 신사이바시 인근에서 일하는 T를 만났다. 뉴욕에서 오래 산 일본인 동갑내기 T는 긴 미국 생활 후 일본으로 컴백한 지 5~6년 정도 되었다. 지인의 여자 친구였는데 마침 나와 동갑이라 더 가까워졌다. 이 친구는 일본에서 산 적 없는 내가 90년대 후반 일본에서 유행했던 노래들을 다 알고 있는 걸 신기해했고, 나는 일본인들 사이에 한국 사람처럼 화끈하고 솔직한 이 친구에게 정이 갔다.
뉴욕에서 친했던 대부분의 일본 친구들은 지금 도쿄로 오사카로 다들 컴백해서 살고 있다. T는 간사이의 어느 소도시 출신인데 학교 졸업 후 자연스레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대도시인 오사카에 정착하게 된 케이스다.
친구가 이 년쯤 전에 뉴욕에 와서 만났지만 이렇게 일본 땅에서 만나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맥주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내가 근처 캡슐호텔에 묵고 있는데 불편해서 잠을 설쳤다고 하니 내가 남편 없이 혼자 오는 건 줄 몰랐다며 다음번에도 혼자 오면 오사카에서는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했다.
오늘 밤이라도 짐 빼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는데, 어차피 다음날이 체크아웃이고 기차를 타야 해서 고맙게 마음만 받았다. 자기 고양이도 내가 가서 예뻐해 주면 덜 외로워할 거라고 다음번엔 꼭 자기 집으로 오란다.
그렇게 이틀 밤을 뜬눈으로 캡슐호텔에서 보내고 지친 몸으로 다음 행선지에 가서 일반 비즈니스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서야 일본 도착 삼일 만에 처음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예민하고 민감한 성향이란 건 후천적으로, 경험과 교육에 의해 생긴다.
민감하고 잠귀가 밝은 어른들은 많이 있지만, 아이들은 어디에서든 피곤하면 잘 자지 않는가. 물론 어디서나 머리만 닿으면 잘 자는 우리 언니 같은 어른들도 많다. 그렇게 장소 안 가리고 잘 자는 것도 복이다.
나도 어릴 땐 잠귀가 밝지도 않고 예민하지도 않았다. 사는 곳이 변하고 다국적인 룸메이트들과 살아보고, 상식을 뛰어넘는 이웃들을 둬 보고 밤낮이 바뀐 채로도 살아보니 이제 캡슐호텔에선 잘 수 없는 민감한 인간이 되었나 싶어 울적해진다. 이십 대 초반이었으면 아마 똑같은 상황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잘 자고 잘 놀다가 좋은 기억만 갖고 가지 않았을까 싶어서.
지금으로선 캡슐호텔이나 에어비앤비보다 일반 호텔을 위주로 이용할 생각이다. 어딘가 방음처리가 잘 돼있는 쾌적한 캡슐호텔이 있다면 또 도전의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