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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Feb 28. 2019

하고 싶은 것보다 잘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

나도 한때는 열정이 밥 먹여주는 줄 알았다.

K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에 새로 들어온 그녀는 첫눈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외모였을 뿐 아니라 외모 이상으로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친근하고 외향적이어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웠다. 빠릿빠릿 일도 금방 배우고 귀엽고 순수하지만 호락호락 휘둘리지 않는 강단도 있었다. 외향적인 성격과 특출 난 외모만 빼면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여동생이 없는 나에게 K는 친여동생 같은 존재가 됐고, 언니가 없는 그녀도 나를 믿고 따랐다.


첫 연애에 필요한 적당한 밀당, 꿈과 미래에 대한 결정 등 이십 대 초반인 그녀가 하던 수많은 고민에 내가 아는 모든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 진지하게 상담해 주었다. 마음속 깊이 나를 믿고 내 조언에 진심으로 도움을 받는 것 같은 그녀를 보면 그 나이 때의 내가 생각났다.


그녀는 어학연수를 몇 년 한 후 어느 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수많은 배우와 연예인을 배출한 히노데 고등학교 출신으로, 그녀와 함께 졸업한 이들 중에 활발히 연예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녀의 꿈을 지지했고, 우리는 최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자신을 마케팅하는 것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처음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후 K는 일본으로 돌아가 적극적으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바로 작품의 역할을 따내진 못했지만 광고 영상이나 화보 등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애 같기만 하던 K의 사진이 도쿄의 여기저기에 등장하고 있는 사실이 신기하고, 내 일처럼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광고 촬영을 시작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는 게 바람직해 보였음에도, 그녀는 배우로서 기획사를 찾지 못하는 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꽤나 알려진 일드에 조연으로 여러 번 출연한 동료 배우와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몇 달간 지내며 고가의 연기 수업을 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일본에서 기획사를 찾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의 나라로 떠났다.


유럽으로 간 그녀는 얼마 안돼 배우로서 에이전시를 찾아 계약에 성공했다. 에이전시를 통해 유럽뿐 아니라 미국 드라마의 오디션까지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야속하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종종 메시지로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곤 했는데 작년 말부터 그녀는 자기를 만나러 놀러 올 수 없는지 수시로 물어왔다. 요즘 고민이 많아 힘들고 우울했다고 하며 계속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어떤 것 때문에 우울하고, 무엇 때문에 괴로웠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이미 몇 년이 흘렀는데 별 성과가 없는 채로 나이만 먹는 것 같아 고민이었을 것이다. 


나는 재능이 없나.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걸까. 그만둘까 계속 밀어붙여야 하나. 고민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이유는 나도 그런 시기를 진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나와 상담하고 싶었던 건 최근 기획하고 있는 영화의 구상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5분 남짓되는 독립영화를 두어 편 제작했고 둘 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운도 꽤 좋아서 무엇이든 집중해서 노력만 하면 남들보다 잘 풀리는 편이었다. K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배우지만, 그 일이 잘 풀리고 있지는 않은 상황에서 오디션만 기다리고 있느니 인디영화 제작이라도 해서 본인의 능력을 선보이는 건 현명한 전략이었다.


그녀가 구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해 들어보니, 아직 스토리와 주제가 없는 단계였다. 시간을 들여 자세히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설명했지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건 그냥 아이디어야. 스토리도 플롯도 주제도 없는 그냥 아이디어.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한테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할지 조언을 구하는 거였다유명한 시나리오 작가(혹은 영화감독이었는지도)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영화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늘 자기한테 어마어마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그걸 영화로 만들면 분명 대박이 날 거라고 하죠.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굉장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감독이 아니라서 영화로 못 만들고, 작가가 아니라서 글로 옮기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게 핵심이에요.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 누구나 아이디어는 가질 순 있지만 그게 다 흥미로운 스토리가 될 수는 없어요.

마크 트웨인도 그랬다. "누구나 아이디어를 가질 수는 있다. 수많은 종이를 낭비하지 않고 하나의 반짝이는 문단으로 표현해내는 게 어려운 것이다."  

재능이 없는 쪽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봤자 소중한 시간만 흘러간다. 

"언니, 나 이제 곧 스물아홉이다. 내가 스물아홉이라니. 스물두 살 때 처음 배우 한다고 했을 때와 상황이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많은 감정이 묻어났다. 나는 그녀가 잘하는 건 뒷전인 채 이상(理想)에 매달리고 있는 게 속상했다.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한 채 흐르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녀는 최근까지 현지의 일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만뒀다.


"네가 잘하는 건 이런 게 아닌데 왜 이런데 시간과 머리를 쓰고 있어? 네가 잘하는 것만 해도 시간은 모자라. 이러다 서른다섯이 돼서도 똑같은 소리를 할 수도 있어. 언니 내가 벌써 서른다섯인데 아직도 오디션만 보면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라고 할 수도 있어. 그때도 행복할 자신이 있는지 잘 생각해봐. 서른다섯은 지금까지 보다 더 빨리 찾아올 거야. 인생이 그렇더라. 갈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가." 


입 밖으로 나가는 말 하나하나가 사실은 그 나이 때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 누가 나에게 해줬더라면 좋았을 말이었다. 한 번도 그녀에게 이 정도의 쓴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알아서 잘하니까. 부딪히면서 인생을 배워가는 나이니까. 그렇게 배워야 진짜 내 인생이 되니까. 좀 돌아가고 늦어지더라도 본인이 경험하며 배우는 게 필요하다고 믿었다. 


- 너를 특별하게 하는 건 네 유머감각, 말솜씨,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해주는 쾌활한 성격이야. 또 스페인어와 일본어가 완벽한 밸런스로 원어민에 영어도 잘하고 뉴욕에 산 경험도 있어. 근데 이 모든 조건이 하나도 없어도 될 만큼 예뻐. 외모만으로도 연예인이 될 수 있는데 이런 부수적인 것도 다 갖추고 있다고! 그게 네가 특별한 점이야. 그러니 배우에만 너무 매달리지 말고 좀 더 다양한 분야에 마음을 열고 다른 시도를 해봐. 일본에 가서 버라이어티나 리얼리티 쇼에 출연해보는 건 어때? 넌 연기보다 실제 성격을 보여줄 때 가장 매력 있어. 네 매력과 특성을 이용해서 얼굴을 알리다 보면 어떤 기회가 너한테 찾아올지 모르는 거야.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다 말했다.

- 일본 버라이어티에 나가면 별 바보 같은 걸 다 해야 돼. 사실 스물세 살 때 도쿄에 돌아갔을 때 접촉해온 기획사가 몇 군데 있었어. 그중에 꽤 큰 회사도 있었고. 근데 다들 나를 버라이어티에 내보내고 싶어 했어. 나는 연기를 해서 배우가 되고 싶은데. 그래서 엄마와 상의 끝에 아무 기획사와도 계약하지 않은 거야.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 회사들이 왜 그녀를 버라이어티 스타로 만들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들은 전문가로서 누구보다 냉철하게 그녀의 이용 가치를 계산하고 그녀의 방향성을 파악했을 것이다. "연예인"으로 키우고 싶어 하는 회사는 많았지만 배우로 키우고자 계약하려는 회사는 없었다.


청춘의 꿈과 열정은 우리를 무모하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서 현실을 깨닫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참 공평하다. 그 나이의 나였다면 나도 똑같이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고 뉴욕의 음향 엔지니어링 스쿨로 유학 왔다.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성적도 잘 나왔는데 재학 중 늘 듣던 말이 

- 음악엔 미래가 없어. 스튜디오들은 다 문을 닫을 거고 음반사도 결국 한 두 개만 살아남을 거야. 너희가 슈퍼스타가 되지 않는 이상 돈이란 건 씨가 마른 분야가 바로 음악 시장이야. 운 좋게 엔지니어가 된다 해도 하루 종일 햇빛도 못 보고 별 보고 출근했다 별 보며 퇴근하며 살 거야.


"미국 음악시장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내 꿈은 너무나 막연했다. 내가 어떤 일을 잘하고, 정확히 뭘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니까 본토 음반시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무모한 열정 하나로 거기까지 왔다. 그러다 마지막 학기에 영화 사운드 후작업(Post-production) 수업에서 다양한 과제를 했는데, 교수님이 내 꼼꼼함에 감탄하며 이쪽으로 취업하길 강력 추천했다. 


- 이 분야에선 너처럼 꼼꼼하고 정확하고 손이 빠른 사람들을 늘 찾고 있어. 음악 쪽과는 달리 영화시장은 자본이 어마어마하지. 아마 몇 년만 일을 배우면 평생 탄탄한 직업을 갖게 될 거야. 영화라는 게 존재하는 이상 일도 끊기지 않고 돈도 잘 벌 거야. 이 쪽으로 나가보는 게 어때?


음악 프로덕션이나 믹싱에 에 천재적인 재능이나 흥미가 있던 것도 아니기에 교수님의 칭찬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난 미국 음반사에서 일하고 싶어서 거기까지 온 거였다. 유니버설, 소니, 워너뮤직 같은 레이블에 다니며 가수들의 앨범 제작과 마케팅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내 인생 가장 큰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고민을 시작했다.


하고 싶은 걸 좇아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밀고 나가보는 것과, 여기까지라도 혼자 힘으로 와 봤으니 이제라도 현실적인 결정을 내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분야로 나가보는 것. 몇 주간 밤잠을 설치며 고민한 끝에 그냥 하고 싶었던 음악 쪽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보기로 했다. 망해도 원이라도 없이 살자 싶은 마음으로.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렇게 3 년여 간 음악시장에서 이리저리 부딪힌 끝에 꿈에 그리던 음반사에 들어가서 했던 1년간의 인턴십은 취업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음악/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을 시작했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보니 더더욱 그때 음악 대신 영화 쪽으로 나갔으면 지금 얼마나 탄탄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을까 싶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이 밀려온다. 음반시장에서의 경험도 소중하게 남았지만, 그때 현실적인 판단을 해서 전망이 밝고 미래가 창창한 업계에서 내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걸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그 나이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K도 조언은 고맙지만 아마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을 것이다.

- 솔직히 지금도 일본에 가면 일을 더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건 알아. 잡지 촬영도 할 수 있고, 틈틈이 광고도 찍을 수 있어. 일본에 가면 여기보다 일이 훨씬 잘 들어오거든. 엄마도 내가 일본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긴 하는데...


내가 죽어도 음반사에서 일하겠다고 했을 때 끊임없이 말리던 교수님도 이런 마음이었으리라”음악 시장의 현실을 다 알고 나서는 늦을 수도 있어, 시간은 너무 소중해!”라는 중년의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난 시간이 소중하기에 더욱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믿었다. ‘현실은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다를 수도 있어. 나는 잘될 수도 있어’라고 생각도 했다못 먹어도 무조건 고다. 음악판 현실은 그렇다지만 나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음악에 대한 미련을 접고 돌고 돌아 현실적으로 내 재능을 살리는 쪽으로 찾은 게 바로 글쓰기였다. 시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대회에 나가곤 했고, 학교 신문에는 늘 내 글이 뽑혀 실렸다. 중고등학교 때는 내가 쓴 글이 연예잡지와 패션잡지에 실렸었고 라디오 방송에 썼던 사연이 채택되어 선물을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돌아보면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잘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 하기에 집착하며 살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잘하는 것에 대해서 평가가 박했다. 내가 잘하는 건 사람들도 흔하게 다 잘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영어? 미국 가면 초등학생들도 다 쓰는 언어일 뿐인데, 문화와 인종을 초월할 수 있는 뭔가 특별한 걸 잘해야 돼. 글쓰기? 문맹만 아니면 다 쓰는 건데, 글 못 쓰는 사람도 있나? 그런 걸로 내 가치를 평가받아선 경쟁력이 없어. 


뉴욕에서 음악도 회사생활도 그만둔 뒤 관심을 갖게 된 게 글쓰기였고 "책을 쓰고 싶다"라고 마음먹은 즈음 우연히 온 기회가 대필(代筆)이었다. 경력도 없는 내가 대필로 다른 사람들의 책을 썼고,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판되었다. 음반시장에서는 3년 넘게 일을 했어도 늘 무보수라 돈 한 푼 못 받았는데, 이렇게 3개월 만에 책을 한 권 쓰고 보수를 받고 나니 새삼 "잘하는 것"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물론 중간중간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재능을 살리는 일을 하니 내가 했던 어떤 일보다 수월했다. 쓰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보다 잘하는 것을 해보니 일도 즐겁게 느껴지고, 재능을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하고 좋은 점이 많았다.


재능을 살리며 평생을 살고 싶어서 바로 뉴욕의 헌터칼리지 영문학과에 등록해 제대로 문예창작을 배우기로 했다. 영어나 한글이나 글 쓰는 테크닉은 비슷하니, 영어로 배워서 한글 글쓰기에 응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금 그때의 선택에 크게 만족하고 있고, 그 결정을 내린 삼십 대 초반의 내가 기특하다. 


내가 잘하는 것에 집중해 노력하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때가 분명히 온다. 하고 싶은 걸 "아주 좋은 조건으로" 하게 되는 날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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