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떡볶이를 먹어 본 적 있나요?
뉴욕에 처음 오자마자 한 일은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이었다.
이미 플로리다에서 1년 넘게 살아본 시점이라 이국에서의 정착에 큰 두려움도 없었고, 뉴욕의 분위기를 느끼고 말고 할 여유도 없이 일부터 구했다. 도착 후 3주도 안돼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이스트 빌리지 한국 식당의 서빙 일이었다. 당시 삼십 대 초반과 후반 정도 된 젊은 여사장 두 분이 동업으로 막 오픈한 곳이었는데 사장님들 인맥이 넓어서 뉴욕에 오는 한국 연예인 분들이 자주 다녀가곤 했다. 그중에도 홍석천, 배두나 님은 내가 일하던 시기와 맞았던 건지 거의 뉴욕 사는 분들처럼 자주 뵈었다.
8월쯤 뉴욕에 와서 어학원에 다니며 알바를 시작해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꽉 찬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10월이 되어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그날 밤은 영업이 끝나고 주방 이모님이 간식을 만들어주시기로 했다. 이모님은 한국분이셨는데 솜씨가 좋아 다른 식당에서 어렵게 모셔온 분이라고 했다. 솜씨도 좋으셨지만 마음도 따뜻하고 넉넉한 분이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야식을 해 주셨는데 그날의 메뉴는 떡볶이였다.
떡볶이를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제육볶음 같은 걸 해주시지) 속으로 좀 실망했지만 이모님이 당신 떡볶이는 맛있기로 유명하다고 하셔서 기대를 했다. 가게 정리를 마치고 이미 먹고 있는 다른 아르바이트생 건너편에 앉아 떡볶이를 하나 집에 입에 넣는 순간, 갑자기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며 눈물이 났다.
-와 이모, 떡볶이 진짜 맛있어요흐흑.
이모님은 세련된 분이셨고 반찬과 음식도 다 정갈한 스타일이었는데 이 떡볶이만큼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그래서 익숙하고 정겨운 맛이 났다. 얼마 전까지 살았던 한국에서도 그즈음엔 이런 떡볶이 맛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역만리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에서 90년대 맛을 보다니, 신기했다. 어른이 된 뒤 초등학생 때로 돌아가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 500원어치를 먹으며 '맞아, 이게 이런 맛이었지' 하며 흐릿했던 기억이 또렷해진 느낌이었다.
과연 이모님의 떡볶이는 특별했다.
아무 생각 없다가 갑자기 뭔가를 먹어서 감정이 복 받히는 건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뉴욕에 와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데, 아픈데도 없고 학교도 잘 다니고 쇼핑도 실컷 하면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는데 왜 갑자기 떡볶이 먹고 눈물이 날까. 당황한 건 나뿐 아니라 내 옆의 남자 알바생과 떡볶이를 만든 이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얘, 너 왜 울어. 이게 그렇게 울 정도로 맛있어?
-네 맛있어요. 신기하게 옛날 맛이 나요. 어릴 때 먹었던 맛이요. 맛있는데 막 눈물이 나네요흐흑.
뉴욕에 와서 한 달 반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오자마자 바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핸드폰을 사고 은행계좌를 열고 아르바이트를 구해 일하며 숨 가쁜 나날을 보냈다. 친구가 룸메이트와 둘이 살고 있던 집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지내며 생활에 안정을 찾는 데로 집을 찾아 이사 나갈 생각이었다. 한국의 가족들에겐 잘 도착했으니 걱정 말고 자리 좀 잡은 뒤에 연락한다고만 했었다. 내 나이 22살. 카톡도 없던 시절이다.
그즈음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다가 밤에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12시가 훌쩍 넘어 그대로 곯아떨어지곤 했다. 중간중간 타는 지하철에선 자리에 앉자마자 하도 꾸벅꾸벅 졸아서, 내리고 나면 뒷목이 뻐근할 정도였다. 그 사이 나도 모르는 내 속에 지치고 두렵고 힘든 감정이 있었나 보다. 다독일 새 없이 바쁜 생활에 꾹꾹 눌려져 있던 마음들이 한순간 왈칵 터져 나왔다.
-아이고, 정아가 뉴욕에 혼자 와서 많이 힘들었나 보네. 그래 천천히 많이 먹어.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좀처럼 멎지 않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떡볶이를 먹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웅크려져 있던 마음이 따뜻하게 풀어졌다. 다 먹고 나니 눈물도 그치고 왠지 속이 든든해졌다. 알 수 없는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2005년 초가을의 어느 밤이었다.
난 여전히 뉴욕에 살고 있고, 그때 일했던 나의 첫 뉴욕 식당은 그 사이 몇 번이나 다른 식당으로 바뀌다 지금은 스페인 바스크 식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2년쯤 전 근처를 지나다 친구와 들어가 와인 한잔 하며 옛날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내부에 들어가니 내가 기억하던 장소는 상상도 안 될 만큼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유학시절 늘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비싸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면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미국 웨이터 월급은 팁이 거의 모든 걸 차지하니 음식값과 가게가 얼마나 바쁜지만 봐도 직원들 페이가 계산이 된다. 이 정도 손님에 이 정도 수의 직원이면 저녁에만 일해도 돈 엄청 벌겠다. 이 시간에 이렇게 손님이 바글바글하면 일당이 얼마 정도 나올 테니 일주일에 3~4일만 해도 생활비는 거뜬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던 시절이다.
그런 시각은 레스토랑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나서도 한참을 갔다. 식당일을 안 한지 5년도 넘었어도 외식만 하러 가면 숨 쉬듯 자연스레 머릿속 계산기가 두드려졌는데, 몸과 마음이 완전히 손님의 마인드로 굳어진 건 불과 1~2년 정도밖에 안 됐다.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중에 "버스데이 걸(Birthday Girl)"이란 소설이 있다. (스포 주의)
여자 주인공은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인데, 스무 번째 생일날 일을 하면서 룸서비스로 호텔 사장의 식사를 배달하러 갔다가 사장으로부터 스무 번째 생일 선물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는 말을 듣는다. 그녀가 소원을 빌자 사장은 아주 진지하게 그 소원이 이뤄졌노라고 말한다. 그녀의 소원이 뭐였는지는 끝까지 나오지 않지만, 몇십 년 후 그때의 소원이 이뤄졌냐는 친구의 질문에 주인공은 지금의 나는 결혼을 해서 아이가 둘 있고, 아우디를 끌고, 일주일에 두 번 친구들과 테니스를 치러 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소원은 이뤄진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녀처럼 아우디를 끌고 테니스를 다니지는 않지만, 나도 예전을 돌아보고 지금의 삶을 보면 "이 정도면 내 꿈이 이뤄진 게 아닐까"란 생각을 종종 한다. 매일 학교와 인턴십, 알바를 오가느라 한 달에 하루나 이틀 간신히 쉬던 시절엔 8시간 넘게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미국 땅에서 비자나 신분 걱정 없이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있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직장에 다닐 땐 일주일 내내 5분에 한 번씩 이메일 확인을 안 해도 되는 게 소원이었고, 다달이 월세나 생활비 걱정 없이 원할 때 여행을 갈 수 있게 되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소박한 꿈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소원들이 이뤄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행복의 기준을 현실적으로 잡아서 만족도가 높은 건지도 모른다. 평일 낮에 한가롭게 백화점에서 구경을 하다가, 한국에 가서 두 달씩 지내다가도 수시로 '내 소원이 이뤄진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해주고, 레스토랑에서 그때의 단골손님이 나를 보던 따뜻한 어른의 눈빛으로 직원들을 대하고 그들에게 넉넉하게 팁을 주고 나올 때,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아직도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식기세척기를 쓰지 않고, 전기 제품들은 평소에 코드를 뽑아놓고 산다.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가도 밤새 꼼꼼히 따지고, 비싼 물건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가격 때문에 내려놓는다. 그래도 이렇게 집에서 글도 마음껏 쓰고 유튜브도 한번 해볼까 하며 생계활동은 두 달 세 달 미루며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있는 지금의 여유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한 삶이다.
그날 이모님의 떡볶이 맛이 정확히 어떤 맛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어김없이 그날의 감정이 떠오른다. 떡볶이 한 접시가 나를 보듬어줬던 것 같은 그날의 울림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