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무리하는 드로잉의 시간이 넥플릭스로 대체되어버린 지금 나는 사소한 즐거움을 잃어버렸...
독일에서 4년 동안 한결같이 나의 사소한 위안이자 살아있는 원동력은 하루 한 장 드로잉이었다. 하루에 한 장이상 그리지 않고는 잠들지 못했다. 세상에 하얀 종이와 나만 남는 순간이 눈물 날 것처럼 행복해 미칠 것 같았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요가매트에서 물아일체를 느끼던 순간과 같았다. 스케치를 하고 지그시 여백을 바라보면 종이 위에 컬러가 비쳐 오른다. 종이 위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컬러를 쫒아 물감을 섞고 색연필을 칠한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 판단은 논외로, 나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나만의 말투, 어투와 같은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는 순간이 이렇게 재미나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
독일에서 돌아와 4년의 공백을 채우려 애쓰는 동안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베를린에 비해 10배속으로 흐르는 일상 속도에 맞추기 위해 많은 책을. 유튜브를 트렌드를 쫒아 마구 들이켰다. 잠드는 시간까지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유튜브를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잠들었다. 에어 팟을 낀 채로 눈을 비비고 일어날 때면 아픈 귀와 피로감으로 맞이하는 아침을 만든 지난밤을 후회하지만 적막 속에서 잠드는 것이 더 불안했다. 독일로 떠난 날부터 한국에서 나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불면증이 마법처럼 사라져, 머리 대면 바로 잠들던 건강한 숙면 생활은- 역시 한국에 도착한 순간부터 사라졌다.
회사에서의 역할, 가족에서의 역할, 친구의 역할.. 그 무엇 하나 삐걱하는 순간 망해버릴 것 같은 공포가 드는 고국에서의 하루는... 고단하고 고독하다.
나 하나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데.. 다들 이대로 사는 게 괜찮은 걸까? 행복할까? 두리번거리는 나만 이방인 같아 서글프기도 했다. 베를린에서의 나답게 사소한 행복을 발견할 넉넉한 시간을 추억하며 남몰래 베갯잇을 적시는 이유이다.
한국에서 넉넉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선 돈을 많이 벌어보자 싶다. 그럼 또 미래를 위해 인내하고 견디어야 하나? 오늘이 당장 행복해지는 사소한 즐거움이 필요한 이유다. 당장 유튜브를 넥플릭스를 꺼둔 채, 하얀 종이와 독대가 절실하다.
타인의 성공 콘텐츠를 많이 안다는 것으로 막연한 불안감을 채우는 것은 이제 시시하고, 늘 한 발자국 늦는 것 같아 지루하다. 나의 콘텐츠로 내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절실함을 당장 종이 위에 풀어내어 보자.
진 says
나만의 취침전 의식(ritual)
요즘 초저녁잠이 생겼다. 퇴근 후 딸아이 저녁을 챙겨주고 나면 졸음이 쏟아지는데, 아이가 혼자 노는 동안 소파에 누워 1시간 정도 잠을 잔다. (그렇다, 나는 방치형 육아를 7년째 하고 있다) 아이가 계속 이거 갖다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하기 때문에 깊이 잠드는 건 아니고 '누워 있었다'에 의의를 둘 정도의 얕은 잠을 잔다. 이 시간은 밤 10시 이후의 나만의 시간을 위한 충전이기도 하다.
밤 10시, 딸아이가 드디어 잠이 들었다. 갑자기 온몸을 휘감던 피로가 사라지는 이 기분은 무엇? 이때부터 나의 밤은 시작된다. 일단 30분 정도 사이클을 탄다. 요즘 왼쪽 무릎이 안좋아져서 무릎 보호대를 하고, 유튜브로 김미경 TV를 틀고, 부지런히 페달을 밟다 보면 금방 땀이 난다. 그리고 운동을 마치면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한다. 그다음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는데,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있는 벨르바디핏(셀룰라이트 제거 크림)을 복부와 팔뚝, 허벅지를 마사지하며 열심히 바른다. 촉촉하고 청량감이 있어 바르면 기분이 굉장히 좋은데, 가끔은 이 순간을 위해 운동하고 샤워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머리를 말리고 부엌으로 가서 전날 마시다 남은 와인병을 따고 와인 에어레이터를 꽂아 와인을 따른다. 와인이 공기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잔에 채워지는 그 소리가 무척 좋다. 그리고 와인잔을 들고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거나 사업 아이템을 고민한다.
2시간 남짓한 이 시간,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고 나 스스로에게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글만보면 굉장히 우아한 시간 같지만, 장소는 어수선한 부엌 식탁 위이고, 드레스코드는 색상 조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미솔에 엉덩이가 축 처진 늘어난 파자마다. 그만큼 남 신경쓰지않고 나에게만 집중하는 이시간이 하루중 가장 큰 즐거움이다.
문 says
나는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딱 알맞은 수준의 정리정돈과 청소 습관을 가지고 있다. 같이사는 사람이 아주 살짝 피곤하게 느끼는 정도. 그런데 깨끗한 환경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정도는 해야지. 암요암요.
아무리 피곤해도 로쇼쿄를 재우고 내려와 사랑하는 시스타가 재작년에 후쿠오카 여행길에 사다준 후쿠오카 스벅 텀블러에 얼음을 가득채운후 네스프레소로 디카페인 룽고를 진하게 내려 아이스로 시원하게 마신 후에 낮 시간동안 어질러진 집을 치운다.
베이킹소다로 주방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빨래를 삶고 로봇청소기를 돌리고 어지러진 물건들이 제자리에 다시 착착 정리되어갈때의 그 느낌이란.
그리고 참 난 락스 냄새가 좋다. 독한 냄새때문에 유해하다고 선호되지 않는 소독액이지만 나는 락스가 빠지면 왠지 하루가 끝난거 같지 않은 찝찝함이 든다. 그런데 몇달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때 유한락스 홈페이지에 올라온
청소가 끝난 후 배수구에 락스를 후루루룩 뿌려준 후 찬물로 씻어내 락스향이 후욱하고 올라올때, 그제서야 하루가 마무리됨이 느껴진다.
요즘엔 좀더 시스테마틱하게 효율적이고 위생적으로 집안을 정리하는 법에 대해 고민중이다. 적은 리소스로 깔끔해 보이는 매직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집에는 물티슈 뽑는 취미와 서랍속 물건을 꺼내는 것을 좋아하는 아기와 매일 신발을 갈아신는데 신발장에 신발을 넣는 법을 모르는 지네랑 테라스에 맨발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와 애기매트에 발바닥자국을 남기는 빅풋이 살고 있어 효율적이고 위생이고 나발이고 당분간은 그저 열심히 치울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