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돼지의 해, 3월. 우리의 만남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찾아왔다. 엄마의 자궁 안에 자리 잡은 지 7개월 여가 되었을 무렵, 겨우 고기 한 근 정도의 무게인 700g의 내가 세상으로 나왔다. 스스로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문을 열어 놓고는 얼마 못 가 죽을 거라며 출생 선고를 주저하던 의사를 설득한 건 바로 아빠였다.
태어남과 동시에 인큐베이터로 들어간 나는 그렇게 그곳에서 한 달 반을 살았고, 한 달이 1년이 되고, 1년이 10년, 그리고 약 일주일 뒤면 29년을 살아가게 될 예정이다. 곧 죽을 거라더니 어떻게 살아났냐고? 우유조차 넘기지 못하는 나를 먹이겠다고 2015년도 아니고 2005년도 아니고 1995년의 3월에 포도를 구해 양손이 모두 데어가며 즙을 내 먹인 엄마와 아빠의 정성을 먹고 자랐다. 3일에 한 번 응급실에 실려 다니던 품 속 아기는 이제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건강한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 되었다.
"뭐 한다고 3개월이나 일찍 태어났을까? 그냥 예정대로 5월이나 6월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생일이 학기 초라서 서먹한 반 친구들 대신 작년 반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하는 게 퍽 아쉬웠던 나는 종종 생일이 3월인 게 싫다고 말하곤 했다. 꽃샘추위가 올 즈음이라 춥기도 하고, 꽃이 필 때도 아니라서 헐벗은 나무들과 생일을 맞는 것도 싫었다. 신나게 생일파티를 하고 들어와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아빠는 말하곤 했다.
"엄마, 아빠를 하루라도 더 일찍 만나고 싶어서 그랬나 보지! 하루라도 더 봐야 하니까."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었지만 엄마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붕어빵'을 품안에 안겨 준다.
부모님 말은 틀린 게 없다더니, 이번에도 아빠가 맞았다. 3개월 늦게 태어났으면 자칫 sweet 16도 못 맞이하고 이별할 뻔 했다. 이별은 만남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빠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라, 16년 2개월이나 함께해 준 아빠가 있었다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라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스무 살이 되면 같이 막걸리 한잔을 하자'던가, '뿌린 <축의금>을 환수해야 하니(세상 사는 거 다 똑같다) 아빠가 퇴직하기 전 스물대여섯 정도에 결혼할 계획'이나,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강원도 여행' 따위의 크게 대단하지도 않은 일상을 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커녕 '장인어른' 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저 멀리 무지개다리를 건넌 아빠가 내심 불쌍했고, 이 험한 세상, 엄마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내 자신은 불안했다.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지금. 사람이 거의 없는 지하철에 앉아 집에 가져가기 위해 산 빵을 무릎 위에 고이 올려놓은 채, 고요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움직이는 것은 화면을 응시하는 나의 동공과 빠르게 움직이는 엄지 손가락뿐. 때때로 퇴근길에 마중을 나가면 내가 좋아하는 빼빼로를 한 손에 들고 터털터털 걷던 아빠의 모습과 내 무릎 위의 스모크 소시지 핫도그가 겹쳐 보이는 순간.
빠른 만남에 무색하게 빠르게 찾아온 이별을 모든 순간 되새김질하는 나는 또 열여섯의 나로 돌아간다. 곁에 있던 순간, 떠다 드리지 않은 물 한 잔을 생각하면서. 아빠 손에 들린 빼빼로의 맛을 상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