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퇴사하겠어? 를 해냅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9월 초였다. 아직 한여름의 옷을 입고,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면서도 고작 앞자리 하나 바뀌었다고 조금은 시원해지지 않았나 자기 최면을 거는 이상하고도 다가올 차가운 바람이 기대되는 그런 달이었다.
팀장님께 잠깐의 시간을 요청하던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날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했던 면담인데, 그 주제가 퇴사가 되었다는 것 하나에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그게 뭐라고 (나 같은 근로자에겐 사실 그게 '뭐'긴 하다). 손끝이 차갑게 식고 긴장감에 숨이 막혔다. 심장이 귀 옆에서 뛰기라도 하는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처음 하는 퇴사도 아닌데, 긴장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 처음 퇴사할 때는 막 대학원을 졸업한 시기라 모두가 이제 다음 챕터로 가겠구나 했었던 시기였고, 두 번째 퇴사 또한 일이 대학원 수업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히' 퇴사 수순을 밟았었는데, 대학원을 다니지도 않고 이직을 한 것도 아닌데 퇴사를 하려니 나 자신이 마치 무책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퇴사하겠습니다.”
단 일곱 글자를 내뱉고 나서야, 내 어깨에 힘이 얼마나 들어가 있었는지를 알았다. 팀장님의 반응은 예상했던 범위 안에 있었고,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말을 실제로 해냈다는 사실이었다.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던 문장이 공기를 가르며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결심의 시작은 두 달 전, 7월의 건강검진 결과를 받아 들면서였다. 결과지를 들고 의사의 말을 들을 때, 머릿속이 멍해졌다. 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1개월 후 추적 검사가 필요하다”는 항목이 7개나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거의 모든 '노란불'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4년 동안 왕복 5~6시간의 통근, 거의 매일 이어진 야근을 견뎌내며 잠은 점점 줄어들고, 불면증과 스트레스가 일상이 되어있긴 했다. 한때는 재밌고, 한때는 흥미로웠던 일이 이제는 짜증과 피로로만 다가왔다. ‘이 상태로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9월 초 실제로 말을 꺼내기까지의 시간 동안,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취업하지 못하는 2030’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이렇게 지친 상태로 회사를 그만두고, 기약 없는 취준의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 여기서 버티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야 할까?’
회사에서 나는 객관적으로 잘하고 있었고, 기회도 많았다. 그 모든 걸 스스로 걷어차는 것이 맞는 걸까. 퇴사를 결심한 나를, 나 스스로가 가장 믿지 못하고 있었다. 퇴사를 말하기 바로 전날까지도, 아니 바로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사람들은 쉽게 퇴사하는 2030에게 끈기가 없다고 했고, 경기가 좋지 않아 회사들이 문을 걸어 잠글 거라고들 했다. 이런 시기에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잘하는 짓인지, 뉴스에서 말하는 '책임감 없는 2030'이 되는 것보다 몸을 갈아 넣어 일하다가 스트레스로 과로사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퇴사 선언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약 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회사생활이 한순간에 3주 남짓한 시간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다.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 하고 싶었는데, 일주일간 감기와 장염으로 병가 & 재택을 하고 나니 내게 남은 기회는 고작 아홉 번이 전부였다.(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처음으로 '내가 회사 생활을 정말 잘했구나'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처음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벽돌 한 장부터 쌓아 올린 어카운트들을 다른 사람의 손에 온전히 쥐어주기 위해서 인수인계서를 준비하고, 퇴사를 위한 Off-boarding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어느덧 퇴사의 순간은 다가와, 교토로의 출국도 하루를 남겨놓고 있었다. 퇴사하는 날에도 야근으로 마무리한 나의 세 번째 회사 생활이 끝났다는 것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추석 연휴가 끝나면 당연하게 출근할 것 같고, 내일부터 '백수'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은 백수 전야.
여행가방 위에 덩그러니 놓인 여권과 항공권, 환전한 지폐와 한 권의 여행 책. 평소라면 빼곡한 계획표를 만들어놓았을 나지만, 퇴사에 정신이 팔려 여행이고 뭐고 다 뒤로 제쳐버린 지금은 달랐다. 슈퍼 J는 이렇게 슈퍼 P의 꿈나무가 되어, 난생처음으로 아무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퇴사와 여행 사이, 그 낯선 틈 사이에 내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