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연평 바다에 얼싸 돈바람 불어!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제목이 <군밤타령>인 줄은 몰라도, 한국인이라면 어디에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노래. 늴리리야나 도라지타령처럼 교과서에서 다뤄서, 혹은 아리랑과 같이 우리나라의 대표 노래로 꼽히기 때문에 아는 게 아니라, 살면서 자연스럽게 귀에 감긴 노래. <군밤타령>은 명실상부 한국 민요 중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본능적인 '국민 노래'다.
나와 <군밤타령>의 인연은 내가 3살이었던 1997년으로 흘러 올라간다. 어머니의 기억을 빌리자면, 국악과 나의 인연은 3살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온 엄마 눈앞에 <군밤타령>을 흥얼거리는 내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고! 혹자는 뱃속에서부터 자주 들은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아니면 내가 신동이어서 그랬을 거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어떤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랬다기보다는, <군밤타령>의 멜로디가 어린아이의 귀마저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쉽고, 직관적이며, 치명적인 중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마성의 노래에 홀린 것은 비단 어린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후보자들이 군밤타령의 리듬에 "변화의 바람"을 실어 노래했고, 영화 <베테랑>(2015)에서는 황정민 배우가 맡은 '서도철 형사'가 '승진이 왔네~' 하며 어깨춤을 췄다. 이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예능에서 흘러가듯 등장한 장면들까지 더한다면 이 노래는 더욱더 다양한 곳에서 많고 작은 어깨춤을 책임졌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VIxNXGyaKI
심지어 이 노래의 흥은 국경조차 넘었다. 캐나다 최대의 민영방송사인 CTV에서는 해마다 설날이면 일기예보 화면의 배경음악으로 <군밤타령>을 튼다고 한다. 한국의 음악 하면 떠오르는 <아리랑>이나 <한오백년>을 제치고서 말이다. 물론 한국의 대표 정서로 꼽히는 '한'이 잘 드러나는 슬픈 곡조의 두 곡보다는 신나는 <군밤타령>이 새해의 설레는 분위기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에 선택됐을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상징과도 같은 <아리랑>을 제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노래의 흥겨움과 중독성은 이미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번역을 위해 가사를 뜯어보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제목은 <군밤타령>인데, 후렴을 제외한 본 가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군밤 이야기가 단 한 줄도 없다고?
늦가을에서 초겨울,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수개월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얼굴들이 다시 거리에 나타난다. 고지혈증이니, 콜레스테롤이니 건강 염려증에 걸린 사람처럼 철저히 식단을 지키던 사람들도 단연코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냥 지나치지 못할 호떡과 어묵이 다시 세상에 나오고, 기름 없이 담백하게 구운 버블호떡과 국화빵을 파는 트럭이 동네 어귀에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붕어빵'이다. 사람들의 열렬한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맘때면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의 '동네 지도'에는 '붕어빵 지도'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세 마리 이천 원, 예년보다 좀 더 오른 가격에 슬퍼하면서도, 기꺼이 지갑을 열고 가격을 지불한다. 이때가 아니면 또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겨울의 신호탄이 '붕어빵'과 '호떡'이라면, 1930년대 경성의 겨울엔 '군밤'이 있었다. 밤은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이었던 삼국시대에 쓰인『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 마한조(馬韓條)에서도 등장했을 정도로 우리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작물이다. 밤은 또한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수확이 되는 가장 흔한 작물 중 하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은 '평양밤'과 '양주밤'으로, 평양밤은 속껍질이 잘 벗겨지고 단맛이 강해 특히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양주밤은 그 크기가 크고 맛이 좋아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군밤타령>에서의 '군'은 '굽다'의 활용형 '구운'이 '군'으로 줄어 굳어진 형태로, 이름 그대로 '구운 밤'을 의미한다. 1835년경 쓰인 것으로 보이는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는 군밤과 군고구마를 만드는 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집 앞 편의점에만 가도 다양한 과자와 간식이 기다리는 지금과 달리, 불에 굽기만 해도 훌륭한 간식이 되는 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겨울철 따뜻한 간식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군밤장수의 수는 일제강점기,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급증하였는데, 이들은 날씨가 선선해지는 가을 무렵부터 초봄까지 활동하며 낮부터 새벽 2시까지 밤을 팔았다고 한다. 당시 군밤의 가격은 10전. 당시 고무공장 여공들의 하루 평균 임금이 60전에서 80전이었다고 하니, 달달하면서도 포만감을 주는 군밤은 춥고 배고픈 저녁 품에 품고 집으로 돌아가기에 가성비 넘치는 야식이었을 것이다.
군밤의 대중적인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당시의 신문 기사나 소설을 보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거리 곳곳에 군밤장수가 등장했다거나, 군밤 장수로 일하는 형제가 자주 등장한다.(간밤, 경성에 발생한 화재의 원인이 군밤장수 때문이라는 기사도 많이 등장한다.)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두툼한 솜옷으로 무장한 그들의 존재와 패션은 그 자체로 '겨울이 왔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알리는 알림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군밤과 함께 사랑받았던 '군고구마'나 '엿'이 아닌 '군밤' 타령이 우리네 삶에 들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 <군밤타령>은 공사판의 노동요가 통속민요화 된 <경복궁타령>처럼 군밤장수의 노래가 전문가의 편곡과 기교를 입고 재탄생한 노래일까? 여기서 반전이 드러난다. <군밤타령>이 언제부터 불렸는지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구한말에서부터 불린 노래라고 하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신민요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작곡가 미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당대의 히트곡 제조기였던 작곡가 '전수린'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1932년 빅터(Victor)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음반에 전수린의 이름이 있고, <황성옛터>를 부른 이애리수와 강석연이 불러 대히트를 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군밤타령의 시작이 황해도 민요인 <자진난봉가>에 닿아있다는 설도 있다. 작곡가 전수린이 황해도 지방의 특색이 담긴 지역 민요의 가락을 차용해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4/4박자의 경쾌한 곡으로 편곡해 의도적인 '상업적 리메이크'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의 '군밤장수'들이 부른 타령에 뜬금없이 돈바람이 부는 '연평바다'가 등장한 것도 납득이 간다. 황해도(서도) 지역, 특히 '연평 어장'은 특히 참조기가 많이 잡힌 황금어장이 있었던 곳. 1960년대에는 한반도 최대의 참조기 파시가 열렸던 바다라고 하니, 연평바다에 열린 조기 파시는 황해도인들에게 그 자체로 돈이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펜을 멈추고 한참을 상상했다. "과연 군밤장수의 호객 소리가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어 명곡이 탄생한 것일까? 아니면 작곡가가 만든 최신 유행가를 거리의 군밤장수들이 호객용으로 따라 부른 것일까?"
그 순서가 무엇이든 확실한 건 하나다. 이 노래는 치열하게 겨울을 나는 사람들의 뜨거운 입김 속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군밤타령>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유일하게 일곱 개의 가사를 선정한 곡이다. 보통은 가창자들이 즐겨 부르는 대목이나 곡의 전체 내용을 보여주는 다섯 구절이면 충분했지만, 이 노래만큼은 예외였다. 마치 자꾸만 손이 가는 겨울철 군밤처럼, 어느 한 구절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톡톡 튀는 매력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섯 개로는 부족해서 꾹꾹 눌러 담은 일곱 가지 맛의 향연, 이제 본격적으로 <군밤타령>을 들여다보자.
⭐️ 얼싸 좋네, 아 좋네 군밤이여. 에헤라 생율 밤이로 구나
번역: Eol-ssa, so good! Ah, so good! Roasted chestnuts! E-he-ra! Fresh chestnuts are here!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얼싸', 또는 '에헤라'를 음역(Transliteration)하여 곡의 쫄깃한 맛이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얼싸 좋네, 아 좋네'는 'so good'으로 통일해서 한국어 가사와 영어 가사의 형태가 같은 형태를 가질 수 있도록 꾸몄다.
노래의 이름이 된 '군밤'은 '군 (Roasted)'과 '밤(Chesntus)' 그대로를 사용했다. '군밤' 할 때 'Roasted'를, '이~여!'에서 'Chesnuts'를 부르면 원박도 살릴 수 있고, 직역 그 자체가 원문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여' 하는 부분이 마치 온전한 '문장 형태의 구절' 모양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장'으로 만드는 대신 명사를 던짐으로써 노래의 맛을 살리고자 했다.
'생율 밤이로 구나~'하는 후렴의 마지막 부분은 이 노래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부분. '생율 밤'은 익히지 않은 '생 밤'을 의미한다. 방금 전에 군밤이라고 했는데, 후렴구의 뒷부분에서는 생율 밤이라니. 번역에서는 'Fresh'를 사용해 1) 'Roasted (구운)'과 반대되는 'Fresh(생), 또는 2) 자료 자체의 '신선함'을 담아보고자 하였다.
1️⃣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평 바다에 어얼싸 돈바람 분다
번역: Wind is blowing, wind is blowing! Money wind from Yeonpyeong sea, Eol-ssa, Blowing towards me!
<군밤타령>의 가장 아이코닉한 가사이자 제일 유명한 구절. "Wind is blowing"을 반복하여 첫 번째 구절의 '바람'을 살리고, 후반부의 'Money wind'와도 감성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연평 바다의 돈바람'은 1) 지역 이름의 '연평 바다'를 품고 갈지, 2) '돈바람'을 어떻게 할지 (a. 비슷한 의미의 영어 단어를 사용할지, b. wind의 느낌을 가져갈지, c. 아니면 단어 그대로 직역해서 한국어 가사의 의미를 살릴지) 고민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해도'나 '서해'와 같은 대체 단어를 쓰는 대신, '연평 바다'를 'Yeonpyeong sea'를 유지하기로 했다. 가사의 '위치'를 바꾸게 되면 '돈바람'과의 연결성을 잃는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군밤타령이 황해도 민요 <자진난봉가>에 뿌리를 두었다는 설이 '진짜'라면, 그 정체성이 될 수 있는 지역적인 색깔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바람 (Money wind)'은 여러 옵션이 있었다. '소득'과 연관된 'windfall'과 'bonanza', 두 단어를 사용해서 '많은 소득이 발생한' 또는 노동에 있어 '수지가 맞다'는 부분을 살리는 옵션. 그리고 황해도/연평 바다의 '조기잡이' 또는 '어업'과 관련된 '만선'의 옵션.
windfall: 뜻밖의 횡재, 우발적인 소득
bonanza: 노다지, 수지맞는 일, 또는 신나는
Return with a full load of fish: 만선이 되어 돌아오다
Boatful of fish: 만선
노래의 배경을 파고들기 전의 나라면, '뜻밖의 횡재'를 뜻하는 'windfall'을 사용했을지 모른다. 후렴의 '돈바람'이 마치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바라는 요행, 또는 '일획천금의 기회'를 노래하는 '돈바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windfall'이라는 단어에는 'wind'가 들어있어서, 가사의 앞부분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군밤장수'가 견디는 '겨울바람의 추위'와, 연평 바다에서 조기를 잡는 어업인들이 일하는 모습은 '뜻밖의 횡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두 번째 옵션이었던 bonanza는 'blowing'과의 라임 (b)을 노려볼 수는 있겠지만, 노동은 '수지'가 보장되지 않아도 열과 성을 다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bonanza가 담을 수 있는 노동의 세계가 너무 좁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Money Wind'. '돈'과 '바람'을 직역해 '시적 허용'을 노린 'Money wind'였다. 돈이 바람처럼 날리는 모양. 그 'Money wind'가 나를 향해 부는 (Blowing towards me) 상상을 하며.
2️⃣ 달도 밝다 달도 밝아 우주 강산에 어얼싸 저 달이 밝아
번역: Moon is shining, oh so bright. Over the universe, Eol-ssa! The Moon is shining.
2절에서 4절까지는 나 스스로가 경성의 길거리에 서서 새벽 2시까지 군밤을 파는 군밤 장수가 되어 가사를 바라보았다. '달도 밝다, 달도 밝아'. 각자의 일터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추운 겨울밤. 시끌벅적하던 경성의 거리가 점점 조용해지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군밤 장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세먼지도 없고 공장도 없이 깨끗한 그 시절 그 하늘에 뜬 달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밝고 빛나지 않았을까? 지금보다 가로등은 어둡고, 건물들은 잠들어있었을 테니.
3️⃣ 개가 짖네 개가 짖어 눈치 없이도 어얼싸 함부로 짖네
번역: Dog is barking, loud and mad, Take a hint, go eat a nut, Eol-ssa, stop your barking!
번역하면서 여러 상상을 할 수 있어서 특히 매력적이었던 3절의 가사였다. 요즘이야 아파트가 워낙 많다 보니 공원이 아니고서야 개가 짖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없겠지만, 도시에서 살짝 벗어나 주택 지역에만 와도 낯선 사람의 발걸음 소리에 목청을 높이는 파수꾼들의 목소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너 누구야!' 하면서 월월 짖는 강아지들에게 군밤 (Chesnut 대신 '견과류(nut)'를 사용했다) 한 알을 던져주고 눈치 있게 ('Take a hint') 그만 짖을 것을 노래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또는... 눈치 챙겨. Take a hint 해서 주인 데려와! 군밤 사 먹게! 하고 주인을 설득해오라는 장사꾼의 작은 바람...)
4️⃣ 산도 설고 물도 선데 누구를 바라고 어얼싸 나 여기 왔나
번역: Strange mountains, Strange waters. Who was I hoping to meet, Eol-ssa! Why did I come?
이 가사에서 가장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설다'라는 단어였다. 사실 20년 넘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설다'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일상생활에서 이 단어를 뱉을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 형용사로서의 '설다'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설다 (형용사)
1. 익숙하지 못하다 (e.g., 귀에 선 목소리)
2. 빈틈이 있고 서투르다 (e.g., 일이 손에 설어서 영 진척이 없다)
창피하게도 평소에 '설다' 대신 '서툴다' 또는 '익숙하지 않다'와 같은 표현을 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산과 물이 굉장히 험하다'는 의미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를 '익숙하지 않다'라고 이해하게 되면, 군밤장사를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에 와 낯선 도시에서 자신이 선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군밤장수의 마음이 좀 더 잘 느껴지는 것만 같다.
Who was I hoping to meet? Why did I come (here)? 혹시... 유난히 장사가 되지 않는 저녁이 아니었을까?
5️⃣ 봄이 왔네 봄이 왔어. 금수강산에 어얼싸 새봄이 왔네
번역: Spring is here, spring is here. cold winter’s gone, Eol-ssa! (New) Spring is here.
여러 민요를 듣다 보면, '봄'을 노래하는 가사를 많이 만날 수 있다. 민요 가사의 '봄'은 단순히 계절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희망, 그리고 풍년(풍요로움) 등 개인의 다양한 (희망 어린) 소망을 담고 있다. 이 가사에 1) 군밤장수 나 2)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대입해 보면, 돈을 벌어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삶, 또는 광복 등 다양한 '봄'을 노래할 수 있다.
6️⃣ 너는 총각 나는 처녀 처녀총각이 어얼싸 막 놀아난다
번역 1:You are a bachelor, I am maiden, You and I, together now, Eol-ssa! Let’s dance all night!
번역 2: You are single, I am single. Let’s dance all night, pouring, drinking, pouring, drinking!
<군밤타령>은 또한 남녀 간의 사랑을 흥겹게 표현한 가사들이 많다. <군밤타령>을 5절에서 딱 끊어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군밤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은 것 같은 가삿말도, 남녀 간의 사랑을 담은 가사도, 어느 하나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번 가사는 1번 버전과 2번 버전, 두 가지로 준비해 보았다. 첫 번째 버전은 '총각'과 '처녀'의 의미를 살린 가사로, '독신남'이라는 뜻의 'bachelor'와 '처녀 또는 아가씨'라는 뜻의 'maiden'을 사용해 번역했다. 두 번째 가사는 '결혼을 안 한 사람'에 포커스를 두고 성별과 관련 없이 '너도 혼자고 나도 혼자니까 밤새 부어라 마셔라 즐기자!'와 같은 의미를 담아보았다.
7️⃣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에 어얼싸 풍년이 왔네
번역: Good times are here, good times are here. To this fair land of ours, good times are here.
마지막 7절은 민요를 가창할 때 많이 쓰는 무대의 '레퍼토리'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골라보았다. 노래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마지막 절을 종종 '희망' 또는 '풍년', 또는 '만세!' 하며 희망찬 가사로 채우는 경우가 많은데, 군밤타령에도 딱 어울리는 가사 ('풍년이 왔네~!')가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웠다.
'풍년'의 사전적 의미는 '예년에 비해서 농작물 수확이 좋은 해'를 뜻하겠지만, '풍년'을 큰 그림에서 보면 '어제보다 더 나은 날'이 온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풍년을 '좋은 날 (good times)'로 의역해서, 드디어 우리에게 '좋은 날'이 왔다고 노래할 수 있는 가사를 만들고 싶었다.
군밤타령의 가사를 뜯어보다 보면, 1930년대 경성의 군밤장수와 2026년의 우리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영하의 칼바람을 맞으며 "군밤 사려!"를 외치던 그들의 절박함은, 오늘날 빌딩 숲에서 "존버"를 외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연평바다 돈바람 vs 로또 (또는 주식... 떡상?) 노동요의 탈을 쓴 이 노래가 사실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1930년의 군밤장수가 꿈꾸던 '돈바람'이 군밤의 완판이라면, 2026년의 우리는 '인생은 한방, 로또 1등!'이라는 돈바람을 기다린다(또는 주식의 떡상... 10만 전자를 부르짖던 6층일 때 샀어야 했다, 이렇게 나도 일확천금의 기회를 또 떠나보냈다).
월급만으로는 '내 집 마련'이라는 풍년을 맞이하기 어려운 시대. "바람이 분다"는 가사는 단순한 겨울바람 묘사가 아니라, 내 인생에도 제발 한 번쯤은 시원한 '돈바람'이 불어오길 바라는 간절한 주문이 아니었을까. 군밤장수가 10전짜리 군밤을 팔며 '돈바람'을 노래했듯, 우리는 5천 원짜리 로또를 사며 이 노래를 부를 지도.
낯선 도시의 이방인 "산도 설고 물도 선데 누구를 바라고 나 여기 왔나." 앞서 이 가사를 번역하며 '설다'를 '낯설다'로 해석했을 때,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던져진 사회 초년생들. 익숙한 골목도, 반겨주는 이도 없는 낯선 동네 자취방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느꼈던 그 막막함.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올라왔지만, 가끔은 "내가 도대체 뭘 위해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인가" 싶은 현타의 순간들. 이 구절은 100년의 시간을 건너, 낯선 도시에서 홀로 버티는 모든 청춘에게 건네는 위로다.
솔로 예찬 (또는 타의적 비혼 선언) "너는 총각 나는 처녀... 막 놀아난다." 이 부분은 요즘 세대의 연애관, 혹은 라이프스타일과 찰떡이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시대. 선택을 하고 싶어도 몸 뉘일 곳 하나 마련할 수 없어서 결혼은커녕 연애도 포기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이 노래 속에 얼핏 보인다. 단편적으로 보면 "너도 싱글? 나도 싱글? 그럼 오케이!" 하며 복잡한 조건 따지지 않고 순간의 즐거움에 충실한 "MZ들의 연애"같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이 어려운 시기에 연애조차 사치라며 "막 놀아나는(자유로운)" 삶을 택한 (비자발적) 비혼주의자들의 체념 같기도 하다. <군밤타령> 속 청춘남녀는 미래를 약속하며 낭만적인 사랑을 속삭이기보단,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도 일단 오늘 밤 신나게 놀아보자고 말한다.
<군밤타령>은 참 묘한 노래다. 가사만 떼어 놓고 보면 "춥고(바람), 낯설고(산도 설고), 돈이 필요하다(돈바람)"는 팍팍한 현실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멜로디는 세상 그 어떤 노래보다 신나고 경쾌하다. 심지어 3살짜리 꼬마가 듣자마자 춤을 출 정도로.
어쩌면 이것이 우리네 인생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겨울바람은 매섭고 현실은 딱딱한 군밤 껍질처럼 우리를 가로막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달콤하고 고소한 '평양밤' 같은 희망이 숨겨져 있다는 믿음을 품는 것. 그러니 껍질을 까는 그 고단한 과정조차 "얼싸 좋네, 아 좋네!" 하며 신명 나게 버텨보자는 배짱을 두둑이 가지는 것 말이다.
가사 속에 '군밤'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시작한 번역이었지만, 마침표를 찍을 때쯤 나는 군밤보다 더 중요한 노래의 '주체'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군밤장수'다. 모두가 잠든 밤, 낯선 도시의 달빛 아래서 추위를 견디며 군밤을 팔고, 행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랑가를 부르고, 내일의 '돈바람'을 꿈꾸며 목청을 높이는 사람. 이 노래는 군밤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치열하게 겨울을 나는 '사람'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지금 당신의 계절이 비록 혹독한 겨울일지라도, 혹은 낯선 곳에서 홀로 떨고 있을지라도 너무 움츠러들지 말기를. 우리의 군밤타령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머지않아 당신의 인생에도 기가 막힌 '돈바람'과 따스한 '새봄'이 불어올 테니까.
각자의 노동요를 귀에 꽂고 매서운 바람에 맞서 키보드를 치고, 가끔은 동료들과의 간식 타임으로 숨을 고르기도 하고, 홧김에 지른 가방 할부금을 갚으며 직장 생활의 수명을 연장해보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 각자의 자리에서 바람을 맞고 선 우리는 모두 프로 군밤장수이고, 언젠가 불어올 돈바람을 맞이할 자격이 충분하니까.
자, 그러니 일단은 어깨를 펴고, 뜨끈한 군밤 하나 입에 물고 힘차게 외쳐보자. "에헤라, 바람이 분다! 얼싸 좋네!"
필자 노트:
1. 파시: 파시(波市)란 해상에서 열리는 시장을 뜻한다. 해상에서 시장이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장은 내륙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일반적인 상설시장이나 오일장과 달리 어종이 잡히는 때에 반짝 형성되었다가 어업이 끝나면 사라진다.
2. 콜롬비아 레코드의 <군밤타령> 발매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