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 살 때 제일 서러운 것은 아무래도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1학년 2학기의 시작을 연 것은 비단 갑작스럽고 고생스러운 이사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작은 심지어 이사를 가기도 전, 중국으로 돌아와 짐을 푼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어느 날 밤, 룸메이트 A에게 탈이 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는 희미한 10여 년 전 기억이지만, 잠옷바람으로 대충 외투만 걸친 채로 다급하게 응급실로 향하던 그날의 밤공기와 을씨년스러운 응급실(?)의 분위기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2011년 9월 17일 토요일 오후 10시 33분. - 스마트폰으로 남긴 사진은 당신이 그날 밤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 이 날은 내 생에 첫 스마트폰으로 처음 사진을 찍었던 날이기도 하니까. (이 날 이전까지 디카를 들고 다녔어야 했다는 사실은 스마트폰이 가방에 들어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해진 10년 후의 나에게 쇼킹하기만 하다)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알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사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던 나와 루미 언니가 아픈 룸메이트 A의 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같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주는 것, 그리고 손짓 발짓을 모두 동원해 중국 엄마가 의사에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아프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 그리고 을씨년스러운 응급실 (이라고 쓰고 의자와 링거의 방이라고 읽는 곳)에서 함께 앉아 있어 주는 것뿐.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아직도 룸메이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A 본인도 본인이 왜 아픈 것이며, 어떤 약을 맞은 것인지 모를 것이라 장담한다. 그저 중국 엄마가 몇 마디를 하자 간호사가 의자 방으로 안내했고, 그곳에 앉아 무엇인지 모를 링거를 맞았던 것이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니까. 어떤 주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A는 그 후 괜찮아졌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타지에서 현지어를 못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속으로 곱씹으면서. 부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의자에 앉을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이런 나의 바람은 불과 한 달 여가 지난 뒤 산산조각 났다. 10월 초에 이사를 하고 월말에 있는 할로윈 파티 티켓을 팔러 다니고, 엄마를 맞이하고, 또 A와 함께 살지 않게 되는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많이 지쳤던 모양인지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오죽하면 체육 수업을 듣던 중, 교수님이 너는 오늘 이론 수업만 마치고 집에 가 쉬라고 했을 정도였다. 나는 조금 어지럽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정말 내 상체가 빙글빙글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위장 감기'라고 불렀던 지독한 감기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굳이 위장 감기라고 불렸던 이유는 그저 기침 조금 하고 열 나는 보통 감기가 아니라 위로 아래로 내가 뭘 먹었는지 다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도 중국 엄마에 손에 붙들려 평소에 안마소인가 미용실인가 했었는데 알고 보니 의원이었던 곳에 들어가 A와 같은 모양새로 링거를 맞고 나서야 기운을 차렸더랬다.
지금은, 또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배가 아프던, 감기에 걸렸던, 일단 아파서 의원에 들어가면 손등에 주사를 맞았다. 1시간 여 정도 주사를 맞으면 열이 내리고 - 생리식염수 같은 게 아닐까 - 며칠 약을 먹으면 언제 아팠냐는 듯 씻은 듯이 싹 나았다. 신기한 것은 중국에서 감기에 걸리면 한국에서 가져간 종합 감기약으로는 절대 낫지 않는다는 거였다. 기숙학교에 다녔을 때는 물론이고 출국 전 약국에 들러 이 약, 저 약 바리바리 챙기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 약들을 다 털어 넣어도 중국 약을 먹기 전까지는 기침이 멎지 않았더랬다. 플라세보 효과였던 건지, 아니면 약들이 바이러스의 국적을 알아보는 건지. - 엇... 그럼 코로나도 혹시...!
한 번 호되게 당하고 난 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수적인 단어들을 암기하기 시작했다. 감마오(감기), 뚜즈 통 (배의 통증), 토우 통(두통) 등 약사에게 증상을 설명하고 내가 필요한 약을 살 수 있을 정도의 필수적인 단어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아플 때 혼자 있는 건 더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