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2학기의 시작은 집 옮기기부터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어린 내가 아버지와 큰 말싸움(싸움 거리나 됐겠느냐마는)을 하고는 방에 들어 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어머니께,
"엄마, 얼른 짐 싸. 나는 이렇게 더 이상 못 살아!"
하고는 엄마의 휴대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하더란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하, 이놈 크면 짐 좀 싸겠는데' 하셨다고 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확하다. 그것도 200%.
전국 방방 곡곡 대회와 공연에 다니면서 싸다녔던 한복 짐가방을 제외하면, 나의 본격적인 짐 싸기는 유학 전 잠시 다녔던 포천의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는데, 금요일 수업이 끝나는 순간 짐을 싸서 읍내에 있는 광역버스정류장으로 날아다닌 덕분에 나는 자칭 짐 싸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내 수첩 안에는 항상 '준비물 리스트'가 존재했고, 가서 없는 것보단 무거워도 다 가지고 있는 게 낫다는 신조로 정말 없는 게 없는 짐가방을 자랑하며 반년 여를 보냈더랬다.
가디언 선생님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정착했던 나의 첫 번째 집 양광위에씨우는 사실 (1) 유학원 선생님 아시는 분의 집과 (2) 의과대학 기숙사를 거쳐 자리를 잡았던 '세 번째' 거처였다. 한 학기를 무사히 살아내긴 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던 마란광장 근처 학교 앞 거리가 아니라 학생 기숙사 근처였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높이의 계단을 넘어 다녀야 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맨 위층이었던 6층이었기 때문에 집에 가기 위해서 또 계단을 올라야 했다. 단순히 계단만이 문제라면 정말 다행이지만, 폭설이 내린 다음날부터 내 방 천장에서 물이 새기도 하고, 난방도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 그냥 내 느낌이 추웠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은 집이었다.
원래는 나와 룸메이트 A 두 사람이 살던 집이었지만, 1학년 2학기 때 한 사람이 더 들어오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작은 집은 아니었지만 방이 두 개뿐이었기 때문에 나 혹은 언니가 새로운 룸메이트(이하 루미 언니)와 방을 같이 써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이는 곳 불편으로 이어졌다. 결국 우리는 학기 중에 이사를 감행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살게 될 '네 번째' 집이었던 이곳은 바로 완허신지아위엔(万合新家园). 단지 내 가장 안쪽에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건물의 바로 앞에 있던 아파트였다. 이미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여가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많은 선택지가 있진 않았지만, 새로운 룸메이트가 올 거라는 소식을 듣고 중국에 남아있던 A언니가 미리 봐 두었던 - 그다지 좋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 집이 아직 빈집으로 남아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그곳으로 계약을 했더랬다.
우리 집은 4층이었는데 - 한국에서 4를 F로 표기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선호하지 않아 대개 유학생들이 살고 있었다 - 엘리베이터가 없긴 해도 전에 살던 집보다 2층이나 낮다는 사실 하나에, 집이 별로라는 말은 그다지 뇌리에 남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옷장이 없어 책장을 옷장처럼 써야 했던 이전과 달리 크나큰 옷장 두 개와 서랍장 하나, 그리고 책상 두 개가 나를 반기고 있었기에, 학기 중에 정신없이 이사를 해야 한다는 불편함 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였다.
방 세 개가 있는 만큼 우리 집은 그 당시 유학생들 집 중에서 제일 큰 거실과 큰 주방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Sky Life가 설치되어 있어서 한국 방송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뚱땡이 브라운관을 가지고 있는 화질구지의 오래된 티비였지만 - 내가 생각하는 10년 전은 굉장히 예전 같은데 생각 외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과 비슷하다는 점이 놀랍다 - 실시간으로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덕분에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날은 우리 집이 동네 사랑방이 되기도 했다.
내게 1학년 2학기는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우선 룸메이트(a.k.a. 루미 언니)가 하나 늘기도 했고, 원래부터 같이 살았던 룸메이트와 이별을 한 학기이기도 했으며, 또다시 새로운 룸메이트를 맞이했다 (룸메이트 B). 유학원 선생님이나 교수님 '추천' 없이 순전히 나의 선택으로 수강 과목들을 고르기도 했고, 학생회와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또 그 무렵 나의 첫 스마트폰(무려 아이폰 3GS였다)을 샀고, 할로윈을 앞둔 10월의 어느 날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가 나의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간곡한 설득에도 미국과 스페인은 '너무 멀다'는 이유로 한사코 거절한 어머니는 내가 나중에 또다시 가까운 국가로 이주하면 꼭 가주마고 약속하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변화는 바로 중국 엄마와 이별했다는 점이었는데, 어른의 세계(?)의 단골 주제인 '사기'의 한 부류였던 '유학 사기' - 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 의 당사자가 되면서 내가 모르는 여러 금전적 사연들이 얽히고 얽혀 나는 이제 어른으로부터의 도움에서도 독립을 하게 됐다. 아니 '해야만 했다'. 수도 전기세를 직접 내기 시작했고, 매달 스마트폰 요금을 지불했고, 직접 마트에서 음식 재료를 사야 했다.
룸메이트 하나가 오고, 하나가 가고, 또 다른 언니를 맞으면서 여러 작은 규칙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바로 '설거지', '빨래'와 같은 지극히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것이었다.
첫 번째, 설거지는 일주일 동안 한 사람이 맡아서 처리한다.
두 번째, 빨래는 따로 빨래 바구니에 모아 두었다가 세탁한다.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 간단한 룰은 생활하는 데 있어 평안함을 주었다. 화장실이 하나이긴 했지만, 중국에 있다 뿐이지 미국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와 루미 언니와 달리 B언니는 중국 대학에 다니고 있어 수업 스케줄이 달라 서로 씻거나 하는 부분에서 시간이 겹치지 않았고, 식사 부분도 함께 나가 먹거나 함께 준비해서 먹는 등 함께 요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주방을 어지럽히는 부분도 함께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다. 빨래는 개인 빨래 바구니를 두고 모아 두었다가 세탁하도록 했는데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기로 암묵적 동의를 했다 - 이전 룸메이트는 세탁기 안에 빨 옷들을 넣었었기 때문에 사용하려면 룸메이트의 빨래를 대신하고 나의 것을 세탁했던 나로서는 제일 좋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완허에 살면서 좋았던 건 나의 방앗간이 즐비해있던 란위지에와 가깝다는 점이었다. 중국 학생들 기숙사와 가까운 양광 아파트는 식당도 몇 없었을뿐더러 있다 해도 무턱대고 들어가서 시켜먹기엔 내 중국어 실력이 받쳐주지 않아 의식주의 '식'부분에서 애로사항이 많았는데, 완허는 한국 식당들과도 가깝고 마트와도 가까워 장보기에도 용이했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번화가에 가는 것도 쉬웠고, 비가 엄청나게 오던 날 길이 잠겨 빙 돌아가거나 학교에 가다가 신고 있던 신발이 벗겨지는 일도 없었다.
1년 동안 나의 홈 스위트홈이 되어 준 완허 집은 여러 모로 장점이 많았던 집이었지만, 또 그와 동시에 수많은 두통을 안겨 준 집이기도 하다. 그 원인 중 제일은 바로 집주인.
우리 집을 제외하고도 많은 집을 가지고 있다는 집주인은 근처 대학에 교수님이셨는데, 가끔 집에 불쑥 찾아오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나곤 했다. 한국 밥솥에 쓰여 있는 버튼을 중국어로 바꾸는 것처럼 선한 마음씨만 있으면 한국어를 모르는 불쌍한 집주인을 도와주는 착한 임차인이 될 수 있는 일도 있었지만, 문을 두드리거나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자 가지고 있던 키를 무지막지하게 돌려대며 무단으로 들어오려고 하기도 했다. 문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무섭게 안쪽을 쳐다보고 있는 집주인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던지.
가장 큰 갈등은 이사 가기 전 보증금을 돌려받으려고 했을 때 일어났는데, 셋이 합쳐 3000위안이었던 보증금이 1800위안으로 줄어 각각 400위안씩 손해를 봤음에도 불구, 역대 유학생 중 유일하게 악덕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은 전설의(?) 임차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 알고 보니 유학생 등쳐먹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 보증금 빼기 몇 주 전, 갑자기 펑 터진 밥솥 때문에 주방의 전기를 한참 동안 사용할 수 없었는데, 집주인은 분명 이사할 때 우리가 가구와 같은 집기를 제외하고 시설과 관련된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본인이 고쳐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기는커녕 수리를 위해 돈을 더 받아내려고 갖은 애를 썼더랬다. 어이없게도 이 일은 집주인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휘둘릴까 봐 걱정되어 함께 있어 주었던 룸메의 남자 친구가 하릴없이 집을 두리번거리다가 주방 쪽 두꺼비집이 내려가 있는 것을 보고 쓱 올려준 덕분에 아무 문제없이 마무리되게 되었는데, 그때 혹시 오빠가 오지 않아서 두꺼비집 때문인 것을 모르고 돈을 물어 주었다면 도대체 얼마를 물어주었을까,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2학년 1학기까지 살았던 완허와는 미국으로 가기까지 - 우리 학교는 2+2 프로그램을 운영해 중국에 남아 졸업할 수도 있지만 보통 3학년 때 미국 본교로 넘어간다. - 1년이 남은 룸메이트와 한 학기만이 남은 내가 집 계약 기간 차이로 서로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이별하게 되었다. 우습게도 불과 1년 전, 아주 질색을 했었던 양광 아파트 근처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적어도 1년 뒤의 일.
참 일도 탈도 많았던 완허지만, 아주 가끔은 학교가 끝난 뒤 란위지에에서 밥을 먹고, 신마트에서 장보고 요구르트 하나 입에 물고 집으로 터덜터덜 오던 저녁의 공기가 퍽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