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시험 일정 좀 바꿔주세요!!
나는 학창 시절, 학교를 유난히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국악을 시작한 터라 수련회, 현장학습을 비롯한 여러 활동에 늦게 합류해야 했거나 빠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수업을 빠지는 것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친구들과 한 공간에서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목적 없이 빙글빙글 운동장을 돌아다니는 것, 놀이터에서 노는 것 같은 별 것 아닌 일들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방학이 오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방학이 되면 소위 말하는 '산공부'를 가서 더 열심히 노래해야 했고, 또 엄마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것도 잠시, 갑자기 시작된 유학생활에 나는 잠정적으로 노래를 그만두어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침을 차려 먹고, 설거지 통에 대충 그릇을 던져 놓은 다음에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와서 과제를 하고, 잠을 자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공연이나 대회 때문에 학교를 못 갈 일이 없게 되었고, 하교 후 밤늦게까지 연습실에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었고,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갈 수가 있었고, 번화가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거나 함께 모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 넘쳐나는 과제와 시험, 그리고 가정사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에너지 넘치던 학기 초의 모습은 사라지고 매 순간마다 한숨을 쉬어대는 지친 대학생 하나만이 남았다. 이제 더 이상 학교를 갈 수 있음에 기뻐하던 어린 나는 사라지고, 이거 하나만 끝나면, 저 과제만 끝나면, 하면서 방학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나만이 남아 있었다 - 지나고 보면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학에 가면 공부 안 하고 논다는 것은 적어도 미국 대학생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으니까.
"이 날 49재인데 혹시 그전에 학기가 끝날까?" 귀국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나에게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공교롭게도 49재 날은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주의 월요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교수들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기말고사를 먼저 봐서라도 한국에 일주일 먼저 들어가야 했으니까.
친애하는 OOO 교수님,
사랑하는 가족의 49재에 하고자 하는데, 기말고사 일정을 조율할 수 있을까요?
49재라는 것이 생소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49재는 한국의 장례 문화로...
국제학생으로 산다는 것.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약 6여 년의 유학생활 중 느낀 점은 교수님들이 특히 '귀국'이나 '가족'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나이스 하다는 점이었다. 코로나 시국인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방학 시즌에는 자신이 원하는 조건(e.g., 시간, 항공사, 금액)에 맞는 비행기 표를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미리 사놓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흔히) 기말고사 스케줄이 추후에 확정되었을 때 발생한다. 한국과 워낙 가까워서 하루에도 여러 번 비행기가 있는 대련은 그래도 덜했지만, 미국에 있을 땐 약 한 달 여 정도 시간을 남겨놓고 보통 귀국 비행기표를 구입하곤 했다.
49재라는 한국의 장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교수님들에게 왜 가야만 하는지를 구구절절이 설명한 장문의 이메일은 성공적으로 열매를 거두었다. 교수님들 모두가 귀국 전 본인의 오피스에서 개별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개중에는 별로 까다롭지 않은 조건 (e.g., 다른 학생들에게 시험 문제를 발설하지 않는 조건)을 덧붙인 경우도 있었지만. 애초에, 시험 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대학 시험의 국룰 아니던가.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할 시간이 며칠은 적어진다는 점에서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비하면 그 정도의 부담은 부담도 아니었다. 대학생의 여름 방학은 무려 3개월. 중국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2주간 군사훈련을 하기 때문에 (신입생) 1학년 수업을 듣는 나는 9월 초까지 놀(?)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뭘 먹을지 따위의 것들을 생각하며 신나게 짐을 쌌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한창 시험 준비에 열을 올릴 때 나는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종강 무렵 사귀게 된 중국인 남자 친구와도 난데없이 3개월간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된 셈이지만, 나는 그저 연락 잘하면 되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쿨하게 비행기에 올랐던 기억이 있다. - 한 달만 일찍 돌아와 본인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자던 말도 단호박처럼 거절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진짜 못됐다 -
친구들과 다음 학기를 기약하며, 그리고 좀 더 성장한 대학생이 될 2학기를 기약하며, 대학생으로서의 첫여름방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