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의 전쟁

끝이 안 보이는 과제 & 발표와의 사투, 질문하라!

by 환한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내가 '영어를 좀 하는 하는 애'인 줄만 알았다. 영어는 각종 대회와 공연에 참여하느라 학교도 종종 빠지고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 나에게 내가 학생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그 무엇'이었고, 그래서 더 잘하고자 무던히 노력했더랬다.


나의 열정을 뒷받침해주기 위해서 엄마 또한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바쁜 시간을 쪼개 영어를 즐겁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다녔다. 어린이 타임스를 구독하였고, 해리포터 DVD를 한 삼백 번은 돌려 보았다. 경기민요 전공생의 MP3에는 팝송이 가득했고, 매일 쓰는 일기도 영어로 작성하도록 하였다. 영어는 나의 친구였고, 새로운 세계였다.


영어에 대한 나의 열정에도 결코 친해질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사방이 막힌 학원에서 하루 50개, 100개의 단어를 외우는 한국식 영어 교육이었다. 애써서 학원에 데려다 놓으면 엄마보다 먼저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학교가 끝난 뒤 바로 연습실에 달려가 매일 4시간 이상의 연습을 해야 했던 나의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서는 저녁 8시, 혹은 그 이후에 열리는 중, 고등부 수업 밖에는 선택권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이런 나를 알았는지 엄마는 뒤이어 유학파 & 외국인 과외선생님을 찾아 일대일 과외를 붙여 주었다. 여기서 나는 카페에 가서 주문하는 법, 피자헛에서 원하는 피자를 시키는 법, 대형마트에서 종량제 봉투를 사는 법, 길을 찾아가는 법을 어떻게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이는 실 생활에서 쓰지도 않을 단어를 100개, 200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일이었다. 교내 말하기 대회나 자격증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것도 나의 '영어 자존심'을 세워주는 데에는 큰 몫을 했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구나,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더랬다.


그런 나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대학교에서 내가 헤쳐나가야 하는 '과제'는 외국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이전에 영어가 수많은 과목 중 어느 하나였다면, 이제는 영어도, 컴퓨터도, 역사도, 심지어는 수학과 과학도 모두 다 영어로 배우고 영어로 써야 했다.


영어도 어려운데, 영어로 수학을 배우면 얼마나 어렵겠냐는 생각에 나의 첫 학기 수강 과목들은 모두 찐 문과 향이 나는 수업들로 채워졌는데, 영어 과목 두 개와 컴퓨터, 미국 역사, 그리고 발표 수업인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섯 개의 과목들 중에서도 특히나 애를 먹인 과목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교수님도 좋았고 수업 자체도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10분 분량의 발표를 네 번이나 준비해야 하는 것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작성한 발표문을 줄줄 읽을 수도 없었다. 적절한 제스처와 공간의 이동을 사용해야 했고, 작성한 스크립트를 대놓고 읽어도 안됐다. 각 발표를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정도였는데, 먼저 초안을 작성하고 - 이때, draft 1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다 - 받은 피드백으로 수정안을 작성하여 다시 평가를 받고... 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안 되는 것을 가지고 혼자 끙끙대 봤자 완벽한 발표문이 턱 하고 나오지는 않을 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아카데믹 센터'에 밥먹듯이 드나드는 것.


우리 학교는 으레 모든 미국 학교들이 그렇듯 - 다른 나라 학교는 잘 모르겠다 - 아카데믹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와 같은 외국인 학생들은 담당 교수님의 튜터(tutor)를 찾아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최대 30분 동안 첨삭을 받을 수 있고, 미리 비어있는 자리에 신청을 해 두고 시간에 맞춰 찾아가면 되는 간단한 시스템이다. 중국에서는 학생들 대부분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TA가 영어 첨삭을 해주고 있었지만, 추후에 편입한 미국 학교의 경우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여러 과목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치 마른하늘에 단비라도 내리는 양, 아카데믹 센터의 존재는 나의 대학 생활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해 주었다. 어색한 한국식 영어 표현을 자연스러운 영어 구어체 표현으로 바꿔주고, 내가 자주 빼먹는 콤마(,)를 제 자리에 위치시키고, 헷갈리는 관사(article; a & the)의 사용을 잡아 주었다. 발표문에 자신이 생기니 제스처와 공간의 이동을 연습할 여유 또한 생겼다.


첫 번째 발표에서 가장 많이 지적받았던 제스처의 부재까지 해결하고 나니 다음은 연습이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스크립트를 보지도 못하는 거 외워버리자, 시선 처리, 동선, 제스처, 큐카드까지 모두 통으로 외워버렸다. 문장이 자연스러워지니 암기 또한 수월했다. 그렇게 세 번째 발표에서 퍼펙트 스코어를 받았고, 그 이후 떨어졌던 영어 자신감도 수직 상승했고, 비단 커뮤니케이션 수업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에 대한 자신감도 다시 차올랐다. 영어와의 첫 번째 전쟁은 나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미국으로 넘어갔을 때 한 학기 동안 입도 못 떼보고 다시 자신감을 잃었었던 건 그 보다 수년 뒤의 일이다.)



나의 영어가 많이 늘었다는 건 첨삭에 소요된 시간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학기 초인 3월, 30분의 예약시간 동안 뒷 페이지로 넘어가질 못하던 나의 비루한 영어 실력은 학기말인 6월 즈음이 되자 첨삭을 다 마치고 저녁에 뭐 할 건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10대의 말랑말랑한 뇌 (한국 나이로 17살이 됐다고 한들 생일이 지나지 않아 15살이었으니까...)가 스펀지처럼 영어를 쭉 빨아들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한국인인 룸메이트와도 영어로 대화를 할 만큼 내가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아카데믹 센터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외국인으로서 중국에서 살아가는 동질감(?)을 나누며 이곳저곳 놀러 다니곤 했다. 오락실도 가보고, 대련에 있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공원인 성해 공원 & 성해 광장 한편에 있는 바에서 열리는 본파이어(bonfire)도 보러 가고, 이케아에 미트볼도 먹으러 다니면서 우리가 한국어를 하는 것처럼 미국인들 또한 일상에서 나누는 영어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사용되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지를 종종 체감하곤 했다. 언젠가 한 번은 10명 정도가 모여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내 왼쪽 그룹이 하는 이야기도, 내 오른쪽 그룹이 하는 이야기도 못 알아듣겠고, 못 따라가겠다고 좌절한 적도 있다.


"나 어떻게 해야 해. 못 알아듣겠는데."


라고 말했을 때,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그냥 물어봐."였다. 외국은 한국과 다르게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도... 아니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외국인이고, 그들은 평생 자신들이 사용해 온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일 뿐인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제 나는 영어를 한국어만큼이나 편하고 쉽게 사용할 수 있다. 어떨 땐 한국어로 생각하는 것보다 영어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다. 10년 이상 영어를 official language로 사용한 지금, 되래 사람들은 '너의 한국어는 못 믿어도 영어는 믿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내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질문'이고, 나는 영어와의 첫 전쟁을 '질문 왕'이 되는 것으로 이겨냈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은 10년 전 나처럼 주저하지 않고 질문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영어를 가지고 놀아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졸업하고, 4년 동안 풀타임 선생님을 했었던 나이지만,


나는 아직도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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