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 대학생이 되다

여기가 진짜 제가 살 기숙사라고요?

by 환한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16살에 대학생이 되었다. 말이 좋아 16살이지, International Age로 하면 고작 15살일 뿐이었다. 북경에 있는 캐나다 국제학교에서 1년 동안 고3 생활을 하며 대학을 준비할 생각이었지만 출국 당일 목적지가 대련으로 바뀌었고, 그저 학원에서 레벨테스트 보는 것처럼 가볍게 풀고 나오라더니 덜컥 붙어버렸다. 문화콘텐츠 경영컨설턴트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언젠가는 오겠지 했었던 경영학과지만, 이렇게 빨리 대학을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엄마는 수능 잘 보라고 엿 사다가 철문에 붙이고 하느님 부처님 찾아가며 기도할 일이 없어졌다며 기뻐했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학교 기숙사에 살면서,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정해준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들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1년 치 계획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모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세웠던 계획이, 대련에서 머문 고작 며칠로 인해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대학에 합격했다고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겐.


Clara_Cho_China 1329.jpeg 2년 동안 수없이 지나다녔던 학교 가는 길. 습한 우리나라와 다르게 그늘에 있으면 그래도 시원했다.


내가 2010년 가을 학기에 들어야 할 수업들을 설명해주는 교수님의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짜주는 시간표대로 사는 삶은 끝났으며, 이제는 네가 알아서 살아가라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등록하는 법, 1학기에 수강할 과목에 대한 설명일 뿐이었지만 마치 나의 선택에 따라 학교 주변 내가 선택한 아파트에서 내가 정한 사람과 살면서, 내가 원하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내가 듣고 싶은 시간대의 수업을 짜야한다며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의 선택'이라.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줄곧 교복을 입어왔는데, 하다못해 입고 다니는 옷까지 선택을 해야 하다니.


며칠을 고민한 끝에 추석 명절에 맞춰 한국으로 돌아왔다. 명절을 핑계로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볼 요량이었다. 결국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서 홀로 서기는 아직 어렵겠다는 나의 의견과, 아직 대학을 가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부모님의 의견이 일치했고,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중국 체류 동안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 조선족 사장님 회사 근처 의과대학의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부족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울 요량이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난 뒤, 나는 다시 대련으로 향했다. 이제 진짜, 유학이 시작된 것이다.


Clara_Cho_China 1335.jpeg 학비 낼 때쯤 되면 오곤 하던 예쁜 광장


대련에 도착하니 가디언 선생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퉁퉁 부운 붕어 눈을 해서는 선생님을 따라 기숙사에 짐을 내려다 놓고 키를 받은 후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다녔다. 이불을 비롯한 침구류를 사고, 세숫대야도 구매했다. 내 작은 몸 하나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 기숙사에 가져다 놓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엄마와 아빠가 다 해주던 일이었는데, 이제 진짜 혼자가 된 것 같았다.


"잘 자고, 내일 회사로 와요! 시간표는 그때 알려줄게~~"


"네 부사장님, 잘 들어가세요!"


입소 준비는 점심 즈음 시작해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급한 대로 집에서 가져왔다면서 전기로 충전해서 쓰는 핫팩과 (배 아플 때 보건실에 가면 주는 뜨거운 물 주머니와 같은 기능을 하는 전기난로인데, 요 몇 년 핫한 전기 손난로보다 10년이나 이른 이때 전기난로 주머니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대왕 사이즈의 보온병을 손에 쥐어준 뒤, 나와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나의 생활을 도와줄 친구, 샹지아항과 인사를 시켜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가디언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부족한 중국어와 영어를 사용하여 서로에 대해 조금씩 파악하며 내가 한 학기 동안 지낼 기숙사 방 문을 열었는데........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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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아빠 사무실에 가면 볼 수 있었던 - 문을 열면 딩~ 하고 쇠가 울리는 소리가 나는 - 철제 가구가 스치고 지나가면 옷에 흰 가루가 묻는 흰색 벽과 회색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더구나 2층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창문 밖에는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언니, 음... 여기 원래.. 아니 진짜..."


"응?"


"우리 둘 말고 또 오는 사람 있어?"


"아 여기, 원래 네 명이 사는 방인데, 네가 네 명치 금액을 다 냈다고 들었어. 나는 다른 곳에 있다가 너의 적응을 도와 달라고 해서 온 거야."


그렇구나. 원래 네 명이 살 수 있는 곳인데 내가 불편할까 봐 방 하나를 다 빌린 거구나. 정말 위로가 되었다. (전혀) 방 안에 화장실도 있고 세면대도 있어서 좋은 방이라고 했다. 그나마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을 헤멜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자, 이불만 깔아 놓고 물 받으러 가자."


물을 왜 받으러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알겠다고 대답하고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얇디얇은 매트리스는 매트리스의 쿠션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무릎을 옮길 때마다 아파왔다. 여기서 자다간 담 걸려 일어나지도 못하겠구나, 입이 안 돌아가면 다행이겠구나 하고 되뇌면서. 얇은 솜이불을 두터운 혼수이불로 바꾸겠다고 다짐하면서.


11'4'6 007.jpeg 세상 태어나 이렇게 얇은 매트리스는 처음 본다.


필요할 테니 급한 대로 집에 있는 거라도 가져왔다는 큰 보온병의 '필요'는 곧 알게 되었다.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저만큼은 못 마실 텐데... 와 같은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수도꼭지를 양 옆으로 돌려봐도 쫄쫄 쫄 물 한 바가지 뜰래도 100만 년은 걸리는, 손 한 번만 씻으려고 해도 한 5분은 걸리는 세면대에서 따뜻한 물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저 큰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받아 와 미리 떠 놓은 찬물과 섞어 세안을 해야 하는 거였다. 처음 화장실을 보고 샤워기가 왜 없는 것인지 의아해한 것이, 갑자기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출처: 구글 검색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응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연두색 대왕 보온병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써야 한다면 언젠가 내 취향에 맞는 새빨간 보온병을 마련하리라 마음먹으면서, 언니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공용공간으로 향했다. 언니는 화, 목, 토에 씻는 것 어때? 하고 묻자,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물이 안 나오면 어차피 겨울이니까 샤워는 목욕탕(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을 찾을 때까지 최대한 참아 보고 격일로나마 머리라도 감자는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 나의 서툰 중국어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은 나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1'4'6 005.jpeg 그 와중에 취향에 맞는 우유도 찾았다. 흰 우유 외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호두 맛 우유였다.


한겨울의 대련은 정말 추웠다.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발이 시렸고, 추울까 봐 가디언이 챙겨준 전기난로는 충전하려고 꽂기만 하면 전기가 끊겨 다음 날 아침 누군가에게 수리 요청을 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암흑 속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저 멀리로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머리를 감기 위해서는 한 개의 대야에 물을 받으면서 다른 대야에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물을 섞은 뒤 찰박찰박 마치 미술시간 수채화 붓을 닦는 통처럼 힘겹게 헹궈내야 했기 때문에 린스는 포기했다. 내가 짧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도 소소하게 행복의 요소들을 찾았다. 우선 군고구마. 폐석유통에 굽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먹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적어도 이것은 1년 반 뒤의 일이었다. 추운 겨울, 하굣길에 내 머리통만 한 고구마를 사고, 흰 우유와 함께 먹으면 단돈 5위안(당시 1위안 160위안 정도로 계산하면 겨우 800원 정도)으로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아침 등굣길에 사 먹는 1위안 빠오즈 (3개)와 또우장(콩물) 도 헛헛한 유학생의 속을 든든하게 채워 주었다.


수업시간 이외에 열심히 학교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닌 덕에 공용 샤워장도 찾았다. 워낙 자주 오니 주인장과 안면을 틀 정도의 사이가 되긴 하였지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뜨끈한 탕에 몸을 담글 수 없다는 것은 애석했지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학교 식당에서 뜨끈한 미시엔(가래떡 맛 쌀국수)를 먹으면 완전 천국에 온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11'4'6 006.jpeg 문제의 그 전기난로. 저것만 꽂으면 정전되는 통에 나는 결국 고무로 된 물주머니를 샀다.


끝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겨울의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1달 만에 백기를 들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10월의 한기는 참아내도, 11월의 한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070 전화 하나 연결하기 힘들었던 중국의 기숙사 생활, 그리고 옆에서 살뜰히 챙겨주었던 샹지아항 언니를 뒤로하고 한국에서 영어를 좀 더 배운 뒤 1월 학기에 내가 다녔어야 할 대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메일을 통해 사진을 받아 본 엄마도 미련 없이 찬성했다. 제대로 씻기조차 어려운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딸을 재울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저 멀리 이제는 기억도 흐릿한 개발구에서 맞이한 진짜 중국의 모습은 춥고, 또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