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생으로 산다는 것 Ⅰ
혐일, 혐한, 그리고 관심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국악을 시작하면서 나는 종종 대회에 나가 상을 타고는 했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 밤낮으로 연습하고 학교를 빠지는 것은 별로였지만, 교문에 걸리는 플래카드와 금요일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수녀님께 상장을 받는 것은 꽤 좋아했다. 방송부 아나운서가 되면서 학교 뉴스를 촬영하고 또 학교 뮤지컬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점차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워낙 작은 학교이긴 했지만, 다른 학년의 학생을 비롯해 학부모,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나를 보면 '아 그 국악 하는 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럴 때면 마치 내가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인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더랬다.
사람들이 나를 안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에 진학했을 무렵이었다. 우선 한 학년에 백여 명 정도가 전부였던 초등학교와 달리 한 반에 40명이 넘고, 한 학년에 300명이 넘는 중학교는 늘어난 그 인원수에서 오는 중압감이 있었다. 그 300여 명 중에서 우리 학교 출신은 나 하나였고, 내 이름이 학교에 알려지는 것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화장실을 가다가도 "쟤가 걔야?"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우리 반으로 나를 보러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커진 몸집만큼 머리도 커졌고, 부정적인 감정을 알아채는 것은 더 빨라졌다. 그렇게 나는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다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귀찮거나, 불쾌하거나,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됐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은 긍정적일 때보다 '부정적일 때' 더 위험하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명인사가 된 것 마냥 관심의 중심에 있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피땀을 흘려가며 아이돌이 되거나 나처럼 학창 시절의 추억을 포기하고 밤낮으로 연습실에 갇혀 있을 필요도 없다. 바로 '국제학생'이 되는 것이다. 미국도 좋고, 유럽도 좋지만, 학교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 당신에 대한 소식은 더 빠르고 신속하게 전교생에게 전달될 수 있으니까.
우리가 외국인이라고 광고하는 가장 쉬운 방법, '이름'
우리 학교 1층에는 여러 공지사항들을 올려두는 TV 스크린이 있다. 국제학생들을 위한 미팅 (비자 등의 안내를 위한)이나 사물함 관련 변경 사항, 또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가라는 등의 안내를 하곤 하는데, 어느 날 이렇게 내 이름이 떡하니 티브이를 장식한 적이 있었다. 오고 가며 알림을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내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한국인 언니 오빠들부터 외국인 친구들, 그리고 중국 친구들까지 여러 사람들이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 앞에서 마주친 교수님들 또한 내게 샌디를 찾아가 보라고 말해주었다. 혹시 동명이인이 아니겠냐고? 중국 캠퍼스에서 Cho, Sohyun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공교롭게도 '나 하나'였고, 저건 내 이름이 맞았다. 교수님들은 나를 찾기 위해서 학년 대표 혹은 section 장에게 연락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혹시나 모를 동명이인들에게 줄 혼란을 막기 위해 학번을 넣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내 이름 자체가 나를 가리키는 '브랜드명'인 셈이었다.
지금 무엇을 입고 있나요?
이름도 이름이지만 우리가 실은 이 사회에서 내부자가 아니라 외부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요인들은 꽤 많다. 당신이 미국인이거나 유럽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저 사람은 중국인이구나' 혹은 '아, 한국인이다' 하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게 그런 '감'은 '95%'의 확률로 잘 맞아떨어지곤 한다. 2010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 '야구모자'에 (남성의 경우) '카파 바지'를 입고 다녔고, (여자의 경우) 치마레깅스에 후드티를 입거나 롱샴 쇼퍼백을 들고 다니곤 했다. 정확히 같은 브랜드가 아니어도 대충 옷 스타일이나 헤어, 메이크업을 보면 쉽게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얼굴만 봐도 조금씩 다르게 생기지 않았나?) 타지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보면 반가워서 시선이 갈 것이고, 외지인을 보면 달라서 시선이 갈 것이다. 마치 우리가 히잡을 쓰고 다니는 여성을 보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절대 일본인인척 하지 않기
중국에 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중국이 일본을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것이다. 2010년대 초, 중국에서는 엄청난 혐일 시위가 있었고, 유니클로를 비롯한 여러 일본 매장들이 말 그대로 정말 '박살'난 사진들이 인터넷 기사들을 수놓았다. 일본 차를 탄다고 해서 끌려 나와 맞은 차주도 있었다. 그래도 대련은 비교적 조용히 넘어가나 했는데, 어느 날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 길가 위에 마카로 쓰인 다음의 글을 목격하였다.
抵制日货 从我做起 번역하면 '일본 상품 불매 운동, 나부터 시작하자!'라는 뜻.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고 나니 괜히 겁이 났다. 혹시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서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칼 백화점에 가서 저녁을 먹으려고 룸메이트 언니와 학교 오빠와 함께 택시를 잡아 탄 어느 저녁이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10년 전 중국에서 '택시 합승'은 종종, 아니 매일 있는 일상이었고, 어디로 가는지 묻는 기사님들 몇 명을 거친 끝에 겨우 합승에 성공해 한숨을 돌린 참이었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택시 문이 잠기자 나는 순간 긴장하며 옆에 탄 룸메이트 언니를 보았다. 앞좌석에는 기사님을 비롯해 건장한 체격의 중국 아저씨가 타고 있었다. 보통 문을 잠구는 일은 없는데 무슨 일이지, 손바닥이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너네, 댜오위다오 섬이 어느 나라 땅이야?"
댜오위타오, 혹은 '센카쿠 열도'라고 불리는 그 섬은 마치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이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중국의 한 섬이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약 300km, 대만에서는 약 200km가 떨어진 동중국해에 위치한 섬 중의 하나로 천연가스가 풍부한 섬이다. 순간 관련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 과장되게 웃으며 친한 척을 하며 대답하였다.
"당연히, 당연히! 중국 땅이지! 걱정하지 마 따거!"
하하하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이내 앞좌석 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위협적인 말투도 사라져 있었고 이내 어디서 왔느냐며 시시콜콜한 질문을 이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인인척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또 어느 날에는 한국식 족발을 파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멀쩡히 집에 가던 일본인이 죽은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그 끔찍한 날, 그 식당에는 한국인 두 팀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먼저 팀이 집에 가고 두 번째 팀이 가게를 나선 그 1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살해 동기는 간단했다. 일본인이라서였다.
북한 수령의 죽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보통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1) 남쪽에서 왔어? 아니면 북쪽에서 왔어? 2)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3) 전쟁이 또 날 것 같아? 워낙 많은 사람들이 물어서 종국에는 그냥 대답을 녹음해놓고 틀어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2011년 겨울, 김정일이 죽었다. 으레 우리나라 대통령이 바뀌거나 한미 연합훈련이 시작하면 미사일을 쏠 거라며 위협하던 북한이 떠올랐다. 앞으로 한반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중국 공안이 우리 잡아다가 북한에 넘기면 어떡해?'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에 중국과 북한은 한 팀이었고, 중국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유학생들만큼 잡기 좋은 인질은 없었다.
그러다 인천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들과 불과 1년여 전 일어났던 연평도 포격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공안에 잡혀가거나, 우리 집에 폭탄이 떨어질 거라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매일 했다. 경찰관이었던 아빠가 비상에 걸릴 때마다 했던 말도 떠올랐다.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냥 집에 얌전히 붙어 있어." 아빠는 어차피 인천이라 도망갈 수 없을 거라고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엄마는 항상 "전쟁 나면 당장 이혼하러 갈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경찰, 군인 가족들이 제일 먼저 죽을 거라고 했다. 겨울 방학을 맞이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나는 매일 저녁, 며칠 전만 해도 나와 문학경기장에서 축구를 보던 아빠가 몇 주째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2002년 여름날의 밤과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진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학원도 가지 말고 그냥 집에 붙어 있으라던 2010년 겨울의 어느 날을 계속 곱씹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햇수로 따지면 육 년이라는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해외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바로 '한국인은 한국에 있을 때 제일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외국에 나오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사회의 주류이자 절대다수(majority)가 아니며, 모든 것은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몸을 사려야 한다는 '생존 본능'을 기본으로 장착해야 한다. 내가 비주류, 소수 그룹(minority)에 속한다는 것을 빨리 인정하고 그 사회에 동화되거나 숨을 죽이고 은신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강산이 절반쯤 변할까 싶은 6년 동안 세 나라에서 국제학생으로 살면서 배운 삶의 지혜이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나, 19살에서 20살이 되면서 넘겨받는 사회적인 책임 같은 것보다 '생존을 위한 동화와 적응'을 먼저 배운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면 다 자연스럽게 배우는 본능을 나 혼자 유난스럽게 느끼고 두려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혐오가 판치는 지금 이 시국에 나와 다른 것들을 틀리다고 규정하고 배척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것 하나는 뿌듯하고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