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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MAMBA Feb 06. 2022

2022년 다섯 번째 주

평소와 다름없는, 그런데 구정을 곁들인

다섯 번째 주를 마치며, 


이번 주는 휴일이 많은 만큼 따로 '직장에서의 목표'나 '개인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다만, 드라마 몰아보기에는 진심이어서, '드라마 몰아보기' '책 3권 읽기' 그리고 '잘 쉬기'를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 결과, <지금 우리 학교는>과 <고요의 바다>를 섭렵했고, <로키>를 시작했다. 영화는 <애쉬 래드 1과 2> 두 편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그리고 유플러스 OTT까지 두루 섭렵한 셈이다. 


잘 쉬는 건 운동에 누구보다 진심이 '아니었던' 5일 동안 아주 잘 먹고 잘 자는 걸로 되었고, 당초 3권이 목표였으나, 5권의 책을 다 읽었으니, '잘 놀자'는 세 가지 목표를 다 이뤄낸 셈이다. 후후


명절 전날 거짓말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덕분에 화이트 설날을 보낼 수 있었다. 비록 눈 치우기는 힘들었지만.


구정 연휴(+ 명절 증후군을 곁들인)


연차와 월차만 잘 쓰면 일주일 내내 쉴 수도 있는 황금 같은 구정 연휴가 끼어있던 다섯 번째 주. 이제 겨우 8주 차에 접어드는 삐약이 회사원인만큼 그런 여유는 당연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아니 9일까지 쉬는 친구를 부러워는 했지) 그래도 종강과 동시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만큼, 이번 구정 연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말까지 합쳐 5일이나 쉬었는데, 이틀 나오고 나니 또 이틀을 쉰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미크론도 오미크론이지만 이제껏 서울에 살면서 매 명절마다 우리 집에 오던 사촌 오빠네도 이제 울산으로 이사를 했고, 친가 식구들은 큰어머니의 어머니와 식구들을 보러 강진에 내려가셔서 평소와 달리 조용한 설 명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어머니 못지않은 큰손을 가진 엄마를 도와 올해도 열심히 빈대떡을 뒤집고 전을 했다. 


결혼도 안 한 미혼의 20대 여성이지만, 가끔 이렇게 요리를 하다 보면 왜 명절 이후에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지난 추석엔 <D.P.> 이번 설에는 <고요의 바다>와 함께한 전 부치기는 8화 전체를 다 보고도 시간이 부족해 <지금 우리 학교는>의 4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는데, 이는 다른 요리 말고 순전히 이미 속이고 뭐고 다 준비된 전을 모양낸 뒤 불에 지글지글하는 데 걸린 시간. 내가 주방에서 전 부치고 있는데 만약 거들지도 않고 티브이만 보고 있으면... 결혼생활은 잘 모르지만, 엄청 열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졸업 준비하기 

(+졸업사진 예약, 졸업 가운 예약, 그리고... 분노의 졸업식)


언제 1년 반이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는 '내가 종강을 했고 이미 직장인이며 이제 대학원생이 아니라는' 사실. 하지만 내가 졸업한다는 사실을 체감하든, 체감하지 못하든 졸업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난 2019년 8월에 있었던 대학원 졸업이 사실상 코로나 이전, 제일 제대로 된 졸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 가족들과 사진을 많이 못 찍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 오프라인으로 졸업식을 한다고 해서 많이 기대하는 한편, 곧 온라인으로 전환한다고 하진 않을까 마음을 졸였었는데,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온라인 전환 안내가 내려왔다. 


사실 졸업식에 대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구정 연휴 이전부터 시끌시끌 말이 많았다. 그야 현재 FMBA를 졸업한 학생 대부분이 (적어도 한국 학생들의 경우) 직장을 잡은 상태인 데다 직장과 병행했을 야간 과정, PMBA도 분명 거의 직장인일 것으로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학교 측이 졸업식을 평일 4시로 정해버린 것이었다. 


더구나 이 사실은 전일제 학생들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고, 야간제 학생 및 Executive MBA 학생들에게만 안내가 나간 상황이어서 더 분노해있던 상황. 몇몇 학생들은 우리의 의견도 존중해달라고, 학생들의 퇴근시간 이후에 진행해줄 것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애초에 학교에 기대 같은 걸 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영상 틀어주는 졸업식이니까 나중에 링크로 봐라'는 태도는 있던 정도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게 내 오천만 원의 말로라니. 



그래도 할 건 해야 하니까 졸업사진을 찍을 스튜디오를 수소문했다. 2019년 8월 졸업식 때는 나름 대학원 수석 졸업이라고 전공 대표라고 해서 단상에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내 앞으로 학위복을 따로 빼주었었고, 그 덕분에 인천에 가지고 내려와서 학사 졸업 사진을 찍었던 곳에서 똑같이 사진을 찍었었다. (전통 학위복은 수량에 제한이 있어서 모든 학생이 다 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학원에서는 따로 Photo Day가 있는 만큼 개별적으로 원한다면 학교를 통해 빌리라고 해서 나는 따로 대여를 진행하였다. 



지난번 졸업 땐 행정/언론의 파란 전공 후드를 받았었는데, 이번엔 경영학과 후드인 밤색을 받게 될 예정이다. 대여 시간이 하루로 한정되어 있어서 다시 인천에 내려왔다가 찍고 반납하러 서울을 가는 것은 어렵겠다는 판단에 학교 근처의 사진관을 수소문했다. 20만 원은 훌쩍 넘게 들겠지만, 또 이때가 아니면 언제 찍겠냐는 생각에 바로 예약을 걸었다. 졸업 사진을 예약하고 나니 진짜 졸업을 하는 느낌이다. 



한복이 왜 거기서 나와? 


이번 주 나의 분노에 정점을 찍은 것은 바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나온 '한복'이었다. 중국에 있는 56개 소수민족의 대표들을 모아놨다는데, 거기서 앞으로 굴러서 봐도 뒤로 굴러서 봐도 너무 21세기형 한복이 나온 탓이다. 생방을 보던 나는 내가 지금 본 것이 무엇인지 눈을 의심했다. 그다음에 중국 측에서 할 말도 예상 가능했다. '조선족의 것이다!!' 



2017년에 하와이에 갔을 때, 현지 풍물단이 부르는 진도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있다. 가사를 듣던 나는 깜짝 놀랐는데, 2002년부터 당시까지 국악을 해온 나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가사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농악과 진도아리랑을 '하와이 농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후 민속음악 분야의 교수님을 찾아뵙다가 의외의 사실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바로 본국을 떠나온 문화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미국에 살다 보면 이미 한국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인 '남자는 주방을 들어오면 안 된다'라거나 '여자 목소리는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라거나, 또는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네 8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형님 동생 사이도 그렇다 (약간 미국에서 더 군기를 잡는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 사회는, 한국의 문화는 그들이 미국으로 넘어간 80년대 이후에도 계속 변화에 변화를 거쳐 현재가 되었는데, 80년대에 미국으로 간 한인들에겐 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한복을 생각해보자. 학술적으로, 전문가의 시선으로, 이런 말은 차치하고 그저 일반인의 시선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올 무렵과 조선 중기, 조선 후기의 한복 모양은 같은가? 아니면 조선족들이 중국 영토로 이주할 무렵 입었던 한복과 현재의 한복은 같은가?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계속 '살아있을 수 있도록 (living heritage)' 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므로,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형을 유지한 채 시대에 맞게, 기술에 맞게 변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요는 그들이 적어도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입는 옷'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면, 경복궁 일대를 지나갈 때 쉽게 볼 수 있는 21세기형 한국의 한복이 아니라 (심지어 머리 장식을 비롯해 댕기까지 너무 요즘 사극에 나온 트렌드를 반영한 코디가 아니던가) 수십 년 전 조선시대의 한복이 그들 방식으로 변화한 옷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 일을 한 번 바라봐보자. 중국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로 조선족 아리랑을 포함해 여러 소수민족의 문화를 자국의 지방문화재로 등재해왔다. 물론 무형문화에 '영토' 개념이 적용되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한 국가의 무형문화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그 문화가 '어느 특정 국가의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예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소수민족들의 무형문화가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시 지방문화재쯤으로 하나둘씩 등재되고 있다는 것은 경계할 만하다. 이는 비단 조선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소수민족들의 문화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만약 우리나라보다 '조선족 가야금 산조'를 중국이 먼저 등재하게 되면, '가야금 산조 = 중국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문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황희 장관은 말했다. 이 문제를 들먹여서 우리가 얻을 국익이 무엇이냐고. 하지만, 한복과 한국 문화의 주인인 우리가 침묵하고 있으면, 그것은 '암묵적 동의'가 된다. 한복이 한 푸가 되고, 가야금 산조는 조선족의 것이 원형이 될 것이며, 한류를 이끄는 아이돌들은 중국 출신이 될 것이다. 


한국이란 이름을 세계가 알게 된 데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살던 2010년대 초, 많은 미국인들은 손을 한데 모아 합장하며 '니하오'라고 외쳤다. 유럽에서 살았을 땐 '중국인이냐' 묻고, '일본인이냐' 묻고, 그다음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같은 동북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용히 있으면 세계인들은 더욱 쉽게 우리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조용히 우리의 문화를 잃는다. 


이런 말을 아무리 외치고, 아무리 연구를 해도, 과연 소용이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2022년의 다섯 번째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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