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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MAMBA May 15. 2022

2022년 열여섯 번째 주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대하여

열여섯 번째 주를 보내며, 


안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취미로 시작한 태국어지만, 이미 시작한 것 그래도 번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싶어서 여러 학원이며 시험 준비 과정을 알아보던 2022년의 열여섯 번째 주. 운 좋게도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 저 책, 독학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가지게 되었지만, 독학을 하다 보니 부족한 점이 느껴져 (자고로 원래 돈을 써야 열심히 공부하는 법이다) 학원을 등록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학원을 다녀보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니 '안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라는 말이 들려왔다. 아직 자동차 할부 값을 내고 있고, 학자금 대출도 있으니 결혼 자금을 모으려면 열심히 갚고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이 나올 것임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속상함이 올라왔다. 또래에 비해 적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고, 가족을 위해 구입한 차도 곧 할부가 끝나는 데다 학자금과 저축은 상환계획과 저금 계획을 마련해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지만, 공부를 그만두고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고 해서 오랜 시간 동안 드리웠던 그림자에게서 갑자기 자유로워지는 것은 그다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리라.


공무원은 박봉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요즘에야 물가가 많이 오르고 있어도 지지부진한 월급을 보며, 공무원이 최고라고 외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적어도 우리 어릴 때에 공무원은 그렇게 많이 벌지 못했던 것 같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였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어머니에 비하면 반, 아니 1/3도 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릴 때 국악을 전공하며 내가 끝없이 퍼냈던 돈 항아리는 적어도 공무원 월급 가지고는 채울 수 없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공무원 월급'은 적긴 해도 '안전성/안정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감옥에 갇히는 큰 죄를 짓지 않는 한 다음 달에도 같은 금액이 들어올 것이고, 정년을 보장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소득이 크긴 하지만, 다음 달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영업이나 예체능과 달리 (예를 들어 코로나로 인해 공연이 사라진 이전 2년은 예술인들에게 어땠을까) 밥 굶을 걱정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박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상대적인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빠의 월급은 내가 커가는 데 있어서 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받쳐주고 있는 그 무엇이었다. 시간이 흘러 산업의 수요가 바뀌고 엄마가 제2의 직업으로 식당을 시작했을 때에도, 아빠의 월급은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받치고 있었으리라.


내가 내 인생 처음으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었던 것은, 내가 대학에 들어간 직후였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게 된 내가 너무 어려 걱정스럽다는 엄마 아빠의 말에 영어 실력을 늘려 오겠다는 핑계로 다시 잠깐 한국에 들어갔을 때 아빠는 갑작스럽게 쓰려졌고, 급성 간세포암 판정을 받았다. 감투를 좋아하는 양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본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모두에게 오지 않는다며 얼마 전까지도 환하게 웃던 아빠였다. 출국을 앞두고 난 아직 어리니까 입학을 조금 더 미루고 아빠와 있겠다고 했지만, 본인 때문에 꿈에 그리던 유학을 포기하지 말라며 비행기를 태워 보냈다. 오늘은 배웅을 못 해주지만, 방학 때 한국에 오면 공항에 마중을 나가 있겠다고.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 해 5월, 이제까지 일하느라 채 하루도 쉬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았던 3개월의 휴가를 마친 아버지는 그대로 별이 되었고, 노동절 연휴를 맞아 한국을 찾았던 그때가 우리의 마지막이 되었으니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안돼'를 마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는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내가 공부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끼지 않았던 부분에서 모든 것을 아끼기 시작했다. 옷, 가구, 전자제품, 명품 가방... 몇 년 주기로 기분 전환하듯 바꿔주던 집안 인테리어까지도. 기본이 아니라 '부가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부분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없애기 시작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절약을 시작했다. 중국에 가면 취미로 얼후를 배우게 해 주겠노라 했지만, 내가 얼후 수업을 듣는 일은 없었다. 영어로 모든 수업을 듣고 있는 만큼, 중국어 과외를 받았으면 했지만, 그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20만 원으로 각종 공과금부터 식비까지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물가를 찬양했다. 3학년을 목전에 두고 본교로 가는 대신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하겠노라 선언했을 때에도 돈이 우선이었다. 어쨌든 사기당한 3천만 원을 깔고 가는 유학생활이었으니까 (유학의 시작이 사기라니), 이미 시작이 돈, 돈, 돈이었으니까.


일리노이, 펜실베이니아, 뉴욕, 플로리다까지 많은 학교들이 후보군에 올랐지만, 결국 학비가 제일 저렴했던 미주리로 가기로 선택했다. 학과 랭킹도 높고, 지금도 다시 가고 싶을 만큼 나의 제2 고향이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예전이었다면 주저 없이 일리노이로 가겠다고 했을 것 같아서 왠지 씁쓸했다. 다행히 편입 후 바로 3-4학년을, 그것도 부전공 두 개와 함께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에 여행을 떠날 호화스러움을 느낄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말에 그럼 어디 어디 가봤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난처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행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그저 학비 외에 비싼 월세와 생활비까지 다 책임져야 하는 엄마의 부담을 하루빨리 덜어주고 싶어서, 최대 학점을 꽉꽉 채워서 들었었기 때문에.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폭풍우가 불었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졸업 후 대학원을 가기 위해 스페인에 가 있던 나는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나와 엄마가 의식적으로 아끼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모든 계획을 취소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결국 나중을 기약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대학원을 포기한 것도 아니어서 한국에서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도 많은 '안돼'와 '회유'를 마주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하지 말자, 그만 하자. 다른 건 몰라도 대학원은 포기할 수 없다고 꿋꿋이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보낸 나의 찬란한 십 대 와 이십 대. 2010년대는 그렇게 수많은 '안돼'와 '포기', '체념'으로 채워졌다. 폭풍우가 가라앉고 다시 잠잠해졌다고 해서 그 여파가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곳저곳 부서진 것들을 보수하고, 수리하고, 다시 만들면서 맞이한 20대 중반. 그리고 이제 앞으로 살아갈 20대 후반. 또 다른 '안돼'를 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2022년의 열여섯 번째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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