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결산
열일곱 번째 주를 마치며,
안 괜찮던 것들이 괜찮아지던 열일곱 번째 주.
어릴 때부터 나는 유난히도 나물을 먹지 않았다. 채소를 싫어한다거나 특정 작물에 알레르기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 오히려 쌈 먹는 맛에 삼겹살을 먹을 지경이다 - 초등학교 1학년 때 잔반통 앞에 서서 아이들이 다 먹었는지 검사하시던 수녀님이 남긴 반찬을 한꺼번에 먹게 해 한번 체하고 토한 뒤로는 지금껏 나물만은 먹기가 싫었다. 그래서 누군가 채식을 권유하거나 채소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면 내가 육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 삶에서 고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여 말한 적도 있었는데... 요즘 들어 시금치가 너무 맛있는 거다.
아마 그 시작은 2016년, 아이들 급식 지도를 하면서 햄, 계란말이만 먹는 아이들을 골고루 먹이기 위해 - 아아, 억지로 다 먹게 했던 수녀님의 마음도 아이들이 골고루 먹고 잘 크길 바라는 나의 마음과 같았으리라, 다만 나는 아직도 입이 짧다 - 평소라면 손에도 대지 않았을 시금치를 먹기 시작하면서였을 것이다. 어느 순간 식탁에 올라온 나물 반찬들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엄마가 나물 반찬을 해 줄 때면 그게 너무 반갑게 느껴지는 순간까지도 생겨난 것. 비슷한 맥락에서 이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훠궈의 백탕이 사실은 그 순한 맛으로 나의 혀를 감싸 사실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에 퍽 반가워졌던 4월이었다.
예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치과 치료도, 방치하면 더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선제적인 조치를 해야 하며 그를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먼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꼭 감고 매 주말 치과를 찾았던 4월을 마무리하며 -
나에게도 언젠가 호그와트의 입학통지서가 날아올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11살까지 나는 나에게도 언젠가 부엉이가 찾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와 함께 2000년대를 보낸 90년대생이라면, 어쩌면 그 어떤 마블 영화 보다도, 따다다다다다다다~ 하는 해리포터 시리즈, 그리고 신동사 시리즈가 더 가슴을 울리리라.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 반지의 제왕이며 판타스틱 4며(응?) 스파이더맨이며 여러 판타지,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컸지만 내게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리포터의 마법세계가 1등이라 자신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3A2_8EWwxc
그래서 각설하고 4월의 내 최애 영화는 신동사, 그리고 그중에서도 열심히 전갈 춤을 추는 뉴트다 (feat. 과묵한 형의 춤 선...)
4월에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두 손은커녕, 한 손에 들어오는 독서량에 작은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중에서 한 권을 꼽자면 나는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꼽겠다.
작년에 문학동네 북클럽게 가입하면서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어릴 때 읽어댔던 그 수많은 작품 중, 물론 박완서 작가의 책이 있었겠지만 '박완서'라는 작가의 작품을 인지하고 읽은 것은 작년이 처음이었다.
휴일을 맞이하여 도서관을 찾았다가 그녀의 이름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 책을 대출목록에 올리는 나를 발견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라니.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니.
작가 본인의 일상을 녹여낸 글일 텐데도 나는 마치 박완서라는 소설 속 주인공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을 훔쳐본 느낌이 들었다. 아 내가 이래서 그녀의 글을 좋아했었지, 작년에 읽었던 그 책들이 왜 좋았었는지 그 이유도 다시금 떠올랐다. 앞으로도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박완서' 세 글자를 만나면 꼭 주저 없이 집어 들지 않을까 확신을 준 책.
4월에는 무려 두 개의 신발을 샀다. 하나는 내가, 하나는 엄마가 샀는데, 그 이유가 (내가 생각해도) 약간 황당하다. 자동차... 보험... 무려 10개월로 나누어 할부로 붓고 있었는데, 그 할부가 끝난 기념으로 지른 것이다. 물론 아웃렛에 들렀다가 홀린 듯 산 거라 통장에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물건이나 옷을 험하게 쓰지 않는 편이라 신발 하나를 사면 6년 7년은 족히 신는 내가 두 개의 신발을 그것도 같은 해 같은 달에 샀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야 있겠지만 드문 일이 아닌가 싶다, 나 스스로도.
캔버스의 장점을 꼽으라면 가벼움과 발목을 잡아주는 고정 능력이라고 하고 싶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발목 인대를 다쳐 발목이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때때로 뇌의 의사와 다르게 삔다거나 덜 반응하기로 결정할 때가 왕왕 있어서 절뚝거릴 일이 종종 생기는 편인데, 하이를 신은 날은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키 155가 무슨 하아?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대 입은 옷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뭐 기 작으면 캔버스 하이를 못 신게 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던 작년 6월 즈음, 대학원에서 함께 팀 프로젝트에 임했던 사람들이 한 데 모여 나름의 종강 파티를 즐겼다. 거리두기가 있을 즈음이라서 비록 3 대 3으로 각기 다른 곳에서 나뉘어 먹는 작은 소소한 뒤풀이였지만 그때 여의도에서 먹었던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엄마랑 꼭 먹으러 와야겠다고 다짐했던 양고기 식장 '라무진'
우연히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도에도 라무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까지 안 가도 된다는 행복함과 만족감에 당장 시간 맞을 때 저길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4월에 그 바람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물론 먹다 보면 느끼해서 많이 안 들어간다는 점이 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할 땐 언제나 쉽게, 멀리 가지도 않고 양갈비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주말 = 평일에 못 하는 일을 하는 날'이라는 공식이 생겨버린 것 같다. 대학원에 다닐 땐 졸업 논문을 쓰거나 과제를 몰아하기에 좋아서 주말을 모두 갖다 바쳤고, 때때로는 지인의 부탁으로 영어 첨삭을 해주거나 해외 논문 초벌 번역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한 주가 오롯이 일로 채워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봄이긴 하지만 아직 찬 바람이 불던 4월의 어느 주말. 때때로 장이 들어 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산책하기도 좋은 어느 거리로 나섰다. 뭔가를 사야겠다는 목적성도, 꼭 지켜야 하는 마감도 없는 그저 시간이 나니까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갔던 곳.
거창한 무언가는 아니지만 일상에서 누린 소소한 순간을 행복으로 가득 찼던 2022년 4월 최고의 순간으로 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