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탓이 아니다.
그래서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사람을 탓할 수조차 없으니까.
아마 상대방은 이런 내 생각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을 한 사람,
나와 비교했을 때 운이 좋아보이는 사람,
그다지 엄청 잘나보이는 것도 없는데.
상대방이 잘나서 배가 아픈 감정이라기보다는,
나를 탓하고 자책하는 감정.
빛나는 사람의 곁에서 내가 더 초라해지는 감정.
나 혼자 있을 때는 충분히 나도 빛난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빛나는 사람의 옆에 서면 나도 모르게 비교가 되면서
나의 빛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그런 감정.
상대방이 잘난척 하지 않아서, 상대방이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서
차마 욕하지도 못하고
맞장구 치다가
뒤돌아서서 괜히 이렇게 나 혼자 상대적 박탈감이나 느낄거면 뭐하러 만났지, 하는 그런 감정.
상대방이 나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도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 없이 대하고 싶지만,
어찌어찌 그 사람 앞에서는 그런 마음을 잘 숨긴다 싶다가도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밀려오는 씁쓸한 느낌.
너무나 자연스런 감정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너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지만,
너를 보면서 내가 스스로를 찌르고 아파하게 되니,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좀 더 강해질 때까지라도
너와 멀어지겠다고.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랬다.
어이없이 그렇게 차단당한 상대방은 영문을 몰랐겠지.
왜 내가 거리를 두는지,
왜 나와 더 친해질 수 없는지.
지금도 나는 '자신'을 챙기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고,
스스로 되새겨야만 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나에게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믿는다.
마음 깊은 곳의 나는 너무도 소심하고 마음이 여려서
아무 잘못도 없는 상대방이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그냥 내가 상처받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니까.
절연이라는 극단적 방법이 아니라면 나는 그냥 계속 우울했을 것이다.
상대방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사진을 볼 때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상대방을 부러워하면서, 나에게는 왜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지 마음아파 하면서.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고,
내가 조금 더 단단해져서, 그 사람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아마 나는 그 사람과 진정한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기회가 지나가고 말았다면,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반대로 가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굉장히 좋은 인연일 것 같은 사람이라고 느꼈는데도, 상대방이 훅 거리를 두어버린 것일까.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상대방이 그냥 내 존재 자체를 부담스럽게 느끼거나
내 존재가 그 사람 마음의 무언가를 괜히 건드리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나.
그러면 난 또 나도 모르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되어 버리는데.
하지만 그것 역시 내 잘못이 아닐 것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에 대해 생각하고, 나를 받아들이는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그 사람의 문제다.
내가 나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니 상대방이 인연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야지.
결국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주변의 사람들은 줄어들어 가고,
상대도 충분히 단단하고, 나도 충분히 단단해서
사람 둘이서 충분히 성숙한 관계를 맺고, 이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란
정말 정말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 역시 내가 용쓴다고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가 충분히 나를 귀중히 여기는,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그리고 기다림 끝에 만난 귀중한 인연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는 것.
예전에 읽었던 기도문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달라던 구절이 있었다.
뭐든지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지
왜 이렇게 기도를 할까, 생각했었는데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무의식의 통제와 남의 마음까지는 도저히 어떻게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몇번이고 쓰라린 상처를 받고 나서야 배우게 되었다.
문득 돌아보니
이제 과거에 그렇게 나를 괜시리 우울하게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도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빛나는지보다
나 자신의 빛에 집중해 왔다.
(물론 서울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는 불가능했다. 거기에서 빠져나온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 시간들이, 나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효험이 있었나보다.
자랑스러운 나 자신.
하지만 여전히 기억한다.
네가 부러워서 나의 초라해 보이는 인생이 우울해지던 그 감정을.
그렇게 내가 부러워했던 너도, 남몰래 그런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