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참 여유로워 보일 것 같다.
남들은 한창 돈 벌고, 돈 모으고, 연애 하고, 아니 연애 할 시기는 이미 끝나서 결혼하고 애 낳아 키우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을 이 시기에,
나는 띵가띵가 나 혼자 놀고 먹으며 하고 싶은 일이나 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있으니까.
내가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봐도 가끔 참 여유롭다, 느껴진다.
컨디션이 괜찮으면 새벽에 일어나지만, 보통이면 8시 반,
그것도 피곤하면 대부분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서
평일 오후에 한가롭게 쨍한 햇볕을 받으며 공원 산책을 하거나 까페에 앉아 있노라면,
밤에 자리에 누워 내일부터 끔찍한 한 주가 시작된다는 스트레스 따위는
느낄 필요가 없이 행복하게 잠자리에 드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에도,
사람이 몰리는 주말 대신 평일 브런치나 음악회를 예약할 때에도
멋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느긋하게 장을 보고 집에서 맛있는 걸 해 먹을 때도
물론 여행을 가서 관광하고 휴양하면서 뒹굴거릴 때도,
참, 여유롭게 사네, 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한 것은 여유로운 나를 알아차림과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미약할 지언정 죄책감과 불안감이
쭈뼛이 고개를 든다는 것이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러다가 인생 망하는 거 아닌가
뭔가 잘 못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더 바쁘고 더 힘들게 살아야 하는거 아닌가
나를 더 채찍질 해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남들은 다 힘들게 사는데 나만 너무 미래 없이 사는거 아닌가
이러다가 결국 개미와 베짱이의 교훈처럼,
남들 다 개미처럼 행복하게(?) 누릴 때 나는 베짱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아닐까
잘못된 선택인가?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남들처럼 사는게 나은게 아닐까
20대 때는 사실 여유가 있었어도 이런 감정들 때문에 여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여유로움'은 나에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여유를 느낀다는 것은 내가 열심히 살지 않는 증거로 생각되고,
항상 나는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것이 많고, 여유를 만끽할 시간 따위는 나에게 없다고 생각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항상 조급하고 불안하고 초조했는지 모르겠네.
아마도 온 세상이 나에게 '너의 젊음을 낭비하지 말라' 라고 외쳐대는 탓이었을 것이다.
너의 젊음을 불태워라!
온 몸을 던져 살아라!
너의 20대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너의 20대가 너의 30대를, 40대를, 그리고 너의 인생 전체를 좌우할 테니.
결론적으로 몸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마음만 죽어라 초조하고 불안하게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았다.
스트레스 받을 거면 더 열심히 살던가, 더 열심히 살지도 못할거면서 스트레스는 왜 받는겨??
어른이의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고
아, 그때가 진정한 내 여유로운 시간이었구나,
그 때 조금 더 즐길걸
하는 후회를 수십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내 삶의 여유를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렇게 아름답고 눈부시고 결코 영원하지 못할, 스쳐지나가는 찬란한 시간들이었는데
왜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에 짓눌려, 미래만 바라보느라고
내가 더 흠뻑 누릴 수 있는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말았을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맞는지,
그렇게 후회를 하고, 배우고 나서도
지금도 여전히,
불안이 나의 삶을 잠식할 때가 있다.
미래를 바라보면 앞이 깜깜할 때. (이력서는 죽어라 날리는데 답이 안온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칠 때. (수입은 없는데 지출은 끊임없다)
아빠 어디가에 나오는 애들이 너무 귀여울 때. (나에게도 결혼과 아이라는 것이 있긴 할까?)
어딘가 놀러가고 싶은데 같이 가자고 할 사람이 없을 때. (이런 인간관계만 가지고 어떻게 살지?)
아무리 생각해도 돈과 미래에 답이 안나올 때,
현재의 여유는 가뭄 논바닥처럼 바싹 말라버리고
내 눈에는 돋아나는 아름다운 봄꽃도 더 이상 안 보이고,
내 귀에는 아름다운 노래도 더 이상 안 들린다.
우연히 예전에 쓴 일기를 보았는데,
제목이 '불안이 너의 삶을 잠식할 때'였다.
내가 이런 글을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몇 년 전 그때 내가 쓴 글이 지금의 나를 위로했다.
불안이 너의 삶을 잠식할 때,
눈을 감고 크게 숨을 쉬고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최선을 다해서 현재를 살아가고, 느끼고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넣어두자.
그러고보니 그 때도 참 불안해 했었는데.
겉으로는 한량처럼 살면서.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안하고 외롭던 시간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그때보다 내가 한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 불안함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상황이라면 불안정한 대로,
아무리 '안정'되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대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이 안정이 지속될지, 지속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이렇게 안정적으로 사는게 맞는건지 고민한다.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건,
다들 크고 작은 불안함을 가지고 살더라.
아마 한치 미래도 볼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모두 느끼는 감정인가봐.
종종 불안에 잠식되는 건 나만이 아닌거다.
절대로 불안하지 않을, 완벽한 삶은 결코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의 삶을 잠식할 뻔한 나의 불안을 조금 걷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