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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Apr 30. 2022

잘 노는 나라에 온, 못 노는 나라 사람

잘 노는 나라에 대해 혼자 진지하게 고찰함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는 네덜란드 사람' 이라고 느끼는 몇 안되는 이벤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손꼽히는 '킹스데이'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네덜란드도 영국처럼 왕과 왕실이 있고, 공주도 있다. 

실질적인 권력이 있거나 영향력이 큰 사람들은 아니라 영국처럼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킹스데이'는 그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이다.

공식적으로는.




비 공식적으로는 왕이건 뭐건, 그냥 오렌지 색 테마로 꾸미고 신나게 노는 날으로 보면 된다.

네덜란드의 색인 오렌지색, 네덜란드의 오란예 (오렌지) 왕가 이름에서 유래된 색깔이다.

사실 왕의 생일이라고 해서 애국적인 날이거나 그런 요소는 전혀 없다.

'네덜란드'라는 테마로 대규모 퍼레이드가 열리고 페스티벌, 각종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는 것일 뿐, 거의 할로윈이나 다름 없는 느낌이라고 하면 되려나.

퍼레이드는 운하의 나라 네덜란드답게 운하 보트 퍼레이드로 열린다. 그걸 어디서도 볼 수 없으니까 장관이라고 하겠다.




올해는 킹스데이가 한 주의 딱 가운데, 수요일이었고, 거기다 코로나도 공식적으로 끝났고,

날씨도 정말 좋아서(날씨가 좋은 날이 흔치 않은 네덜란드) 

어마어마한 킹스데이였다.

암스테르담은 인파 폭발. 그런데 암스테르담 뿐만 아니다. 네덜란드 어딜가도 다들 즐기고 있고,

특히나 대도시들은 암스테르담 못지 않게 다들 페스티벌을 즐긴다.



킹스데이 전날밤부터 파티는 시작되었고, 킹스데이 당일은 각종 뮤직 페스티벌 같은 것도 열리지만 가족적인 이벤트도 많이 열린다. 공원마다 사람들이 나와서 길거리 공연을 보고,

벼룩시장을 하는 것도 킹스데이 문화라고 한다.





나는 이미 한차례 네덜란드 남부의 카니발을 겪었는데, 

카니발은 남부에서만 하는 축제였던 것과는 달리, 킹스데이는 전국적인 축제라 또 느낌이 달랐다.


전국적인 축제라고 하는게 어떤 느낌이냐면 ....

할로윈 이태원의 분위기가 전국 어딜가든 느껴진다고 하면 된다. 

다들 분장하고 들뜬 분위기에, 분장을 하지 않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그런 현상이

한 동네, 한 도시에서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하면 된다.


카니발을 치르면서도 느꼈는데,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노는것에 진심이다. 

아기, 노인 할 것 없다. 나이가 사십 오십 육십 이 넘어서도 다들 미친사람처럼 하고 나온다. 

아무도 거리껴 하지 않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점잖은 사람이 참으로 재미 없는 사람이다. 못 노는 사람. 즐기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


그래서 누군가 '축제의 나라, 네덜란드' 라고 했나보다. 이런 거국 적인 축제 가 몇번 있고, 그 외에도 각종 파티, 페스티벌들이 많다. 우리나라에도 코로나 전에 한참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서재패 같은 것들 말이다. 

야외에서, 자유롭게 입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즐기는 분위기.



그러고보니 이런 비슷한 느낌 우리나라에서도 느꼈었다.

2002 월드컵때. 세상에 그게 20년 전 일이니, 이걸 예로 들기에는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박근혜 탄핵 시위때. 탄핵은 힘든 일이었고 날도 추웠지만 전국에서 일어났고 다들 노래도 부르고 축제 분위기였다......(나름)

...킹스데이랑 비교하니까 좀 슬프네.

한국의 킹스데이 같은 축제가 탄핵 촛불시위 라니. 






사실 나도 어디가서 노는데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테마에 맞춰 입기도 잘 하고, 흥에 겨워 얼싸덜싸도 잘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서양애들, 특히 서유럽권 애들한테 많이 배운 것 같다.

걔네들은 주로 실내에서 노는 우리와 달리 야외에서 노는게 아주 익숙하고, 

관종처럼 입는 것도 잘한다. 

어떻게 차려입을까부터 이미 '파티'의 시작이다.

네덜란드에는 그래서 파티샵, 코스튬 샵이 되게 많고 사람들이 별걸 다~~산다. 이런걸 누가 사 하는 것까지 다 사는데, 그것도 어떻게 해서든 다 개성적으로 뜯어고쳐서 자신만의 걸로 바꾼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더치 친구는 대체 그런 옷은 악세사리는 어떻게 만드는지, 엄청 잘해서 대단하다 생각했는데,와서 보니 걔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게 '기본'이었던 것이다. '잘' 놀려면.


나는 조금 부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표현하는 걸 고민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얘네들은.

이런 축제를 통해, 파티를 통해, 

자기 멋대로 꾸민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너는 어떻게 꾸미고 싶냐고 격려 받으면서.

우리는 반면에 머리만 길러도, 치마길이만 틀려도 맞았는데. 


 

더치 애들은 다들 킹스데이를 파티데이라고 한다.

'쉬는 날'이 아니라 '노는 날'이라고.

'노는 날'이 공휴일이 될 수 있다니? 

나라에서 '노는 날'을 장려하다니? 


예전같았으면 나는 참 좋은 나라다, 까지만 생각하고 말 것 같다.

어쩌면 한국은 왜 이런게 없을까, 답답하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에는,

 내가 예전에 본 영드 '더 크라운'의 왕실 가족과 마거릿 대처 장면이 생각났다.




새롭게 영국 총리가 된 대처는 전통에 따라 영국 왕실과 친목도모의 자리를 가진다.

왕실 사람들은 대처를 자신들이 평소에 즐기는 이블디블 게임에도 초대하고, 사냥에도 초대한다(초대라기 보다는 끼워줘야 해서 끼워준다.)


그런데 왕실 사람들에게 있어, 안 그래도 뻣뻣해서 재미 없는 사람인 대처는 (별명이 철의 여왕일 정도로) 게임도 못하고, 사냥 갈 때도 top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오고, 여튼 잘 놀지도 못하는 재미 없는 사람이다.

결국 답답한 여왕이 묻는다.

"아니, 이 게임 안해봤어?"

"안해봤는데요"

"그럼 가족끼리 쉬는 시간에 뭐하고 놀아?"



대처는 여왕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한다.

"우리 가족은 (너무 가난해서) 놀 시간이 없었고요, 쉬는 시간에는 일을 했습니다."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 상위클래스 사람들이나 놀 수 있었다는 말이다.

대처는 그런 가난한 집안에서 공부로, 야망으로 성공했다.

그 성공 뒤에 즐거운 게임할 시간, 사냥다닐 시간 같은 여유 - 돈과 시간의 여유-는 없었다.

드라마 작가들의 의도가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재미없는 대처에 이입해서 굉장히 찡했다.


참 우리나라 같다, 생각했다.

우리는 뒤늦게 강제로 개화된 이후 여기저기 수탈당하고, 식민지가 되고, 대리 전쟁까지 치르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 내면서,

우리가 조선시대일때 이미 '제국'이었던 나라들을 따라잡기 위해 발버둥쳤다.

먹고 살게 없어서 미국에서 밀가루 타다 먹던 시기에, 

'놀기 위한 날' 따위는 사치였다.


네덜란드는 제국주의 국가였고, 

그들이 더 부강해지고 잘 살고, 잘 '놀'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같은, 식민지 역할을 했던 나라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스페인의 통치아래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때가 있지만, 그 이후 스페인의 뒤를 밟아 해외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현대 네덜란드에서는 그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반성하는 용도로 언급하지 

그렇게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는 않는다(제국 주의 시대가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것만 빼고...) 

적어도 그 과거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 전, 네덜란드가 최초의 동인도 주식회사를 설립했었다는 사실을. 



언젠간 우리나라도 일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저녁에 술을 한잔 하는 것이 아닌

인생을 재미있고 즐겁게 살기 위해 술을 마시는 문화로 온전히 바뀌게 될까?


특사를 네덜란드로 몰래 보내던 우리나라는

이제 당당히 네덜란드에서 대규모 K페스티벌을 열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맺힌 한,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자긍심은

그 어떤 '잘 노는 나라' 도 가지지 못한 우리의 아이덴티티,

아무리 '잘 놀지 못하는 나라'라고 해도 주눅들 필요 없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이유도 없다.

불공평한 게임에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으니까. 



즐기고 배우되,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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