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상은 원래 공평하지 않다

중국 - 상하이 어학연수

by ClaraSue


서울에서의 회사 생활에 지쳐 있었던 나는 어학연수를 나의 도피처로 택했다. 한국을 떠나면서 이제는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어떤 인간관계도 만들지 않고, 오로지 몇달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겠다고 말이다.


화동사범대의 학생 기숙사로 처음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몇년간 혼자 자취 하던 삶에서 2인실 기숙사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자취방에서 밥을 차려 먹는 것 대신 학교 구내식당에서 사 먹으면 되는 것도, 혼밥 하는 것도, 공용 빨래방으로 가서 빨래를 해야 하는 것도. 프로페셔널한 옷 대신 캐주얼한 옷을 대충 챙겨입고, 심지어 모자도 뒤집어 쓰고 오전 수업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오전에서 오후 네시까지 수업을 듣고 방에 돌아와 숙제를 하고 저녁 먹고 일찍 자는 단순한 삶이 된 것도 좋았다.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어색했다. 인생 처음으로 저녁 11시 전에 꼬박꼬박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음날이 너무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보면 고등학생 때부터 12시 전에 자 본적이 없다. 12시 전에 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동시에 언제나 무언갈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빴다. 언제나 잘 시간이 부족했고, 언제나 자는 시간을 줄여 무엇인갈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에게는 8시간의 수면이 필수적이었다. 8시간이 채워지면 깨어있는 시간이 너무나 집중력이 높아지고, 행복하고, 알차고, 생기 넘친다.8시간을 잘 자기 위해서는 1시간 이상의 운동도 필수적이다. 이게 내 생체 리듬이라는 걸, '자유'가 생긴 후에야 알았다. 지금까지는 무조건 잠을 덜 자고 빨리 일어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나에게 맞는 템포를 찾으면 되는 거다. 이렇게 생긴게 내 몸인걸 어쩌라고. 그래서 나보다 덜 자도 되는 사람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겠다. 회사를 다니면서 하루에 8시간이나 자고 대체 누가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회사를 안 다니는게 답인건가?





나는 생초짜 기초 중국어부터 시작했는데, 화동 사범대를 졸업한 내 또래의 20대 열정 넘치는 여자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벌써 나는 나보다 어린 ‘선생님’들에서 수업을 받는 나이가 되어 버린 거다.

중국어 수업은 나에게 굉장히 컬쳐 쇼크였다. 이런 방식의 어학 수업을 한국에서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어학 공부란 억지로 단어 달달 외워서 매일 시험보고, 문법 수업 듣고, 교재 읽고 문제 푸는 거였다. 그런데 이 수업에서는 새로운 단어를 공부하자면서 교실에서 단어 카드를 가지고 ‘게임’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10명도 안되는 소규모의 수업에서 끊임없이 문장 만들기와 말을 시키니 수동적으로 선생님 설명만 듣고 있는 것을 기대했던 나는 너무 피곤했다.


게임이라니.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고.

원래 이렇게 ‘어학 공부’를 하는 거였던가?! 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나는 이 방식에 회의적이었는데, 놀랍게도 새로운 단어와 문장들이 아주 쏙쏙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서 복습 할 때 언제 내가 이걸 다 자연스럽게 외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교육학 그리고 교수법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같은 것을 가르쳐도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같은 것을 배워도 나에게 더 맞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재미있게 가르치고 배우는 법. 이 때 내가 들었던 어학 수업이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내가 흥미를 가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벌써부터 '공부하기에는 늦었다' 라는 소리를 듣고 '뇌가 굳어간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같은 반 수업을 듣는 젊은 친구(?)들 - 20살도 안된- 이 새로운 단어를 나보다 빨리, 쑥쑥 외우는 것 같을 때면 그런 말이 사실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도 서른도 안된 어린 나이인데, 왜 나는 벌써 내가 이미 늙어버렸다, 생각하고 있는거지? 왜 벌써 '이생망' , 이번 생은 이미 망했다, 이미 너무 늦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어 버리는 거지? 내가 아니라 주변에서 그렇게 만든거다. 나이마다 해야할 일이 있고, 그 때를 놓치면 안된다고. 나이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하고, 걸맞는 위치에 있어야 하고, 걸맞는 재력이 있어야 하고.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미친듯이 집착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언제 나도 모르게 그런 가치관을 뼛속까지 받아들여버린걸까. 우리 반의 외국인 친구들이 어려서 부러운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이에 대한 집착'이 덜하다는 것이 부러웠다.





우리 반에서 나와 친하게 지냈든 친구들은 대부분 독일/스위스계 학생들이었는데 중국으로 주재원 나온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의 집에 몇번 놀러간 적이 있는데, 상하이의 외곽에 유럽 주재원들이 모여 사는 유럽식 하우스들로 구성된 동네가 있다.

태국 친구는 부모님을 따라 어렸을 때 프랑스로 이사를 갔고, 영국으로 대학을 갔다가, 이후에는 중국인 여자친구를 따라 상하이로 온 케이스다. 태국어, 불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지금은 중국어도 잘 한다. 이 친구처럼 다문화를 배경으로 자란 친구들이 많았다. 아빠가 스페인인이고 엄마가 프랑스인인데 독일에 살아서, 스페인어와 불어, 독어를 하고 영어는 당연히 잘 구사하며 추가로 중국어를 공부하는 친구나 유럽계와 동양계의 혼혈인 친구들.

같은 수업을 듣는 시모나는 이탈리아에서 온 40대 워킹맘이다. 패션 마케팅 쪽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친구라 패션쇼 티켓도 나에게 구해준 적이 있다. 남편이 상하이 쪽으로 주재원을 나오는 바람에 따라 나왔고, 겸사겸사 어학 수업을 듣고 있는데, 열정적인 직장인맘인 시모나를 보면 과연 내가 미래에 아이가 있는 엄마가 된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지 오히려 질릴 지경이었다. 시모나의 딸은 부모님과 이탈리아어를 쓰고, 학교는 국제학교를 다녀 영어를 쓰며, 돌봐주는 이모님은 중국어를 쓰기에 자신도 모르게 세가지 언어를 무의식중에 구사하고 있었다. 나이가 6살인데!


그렇게 다문화에서 자란 친구들이 자기 소개하는 걸 들으면, 나는 난생 처음으로 한국에서는 느껴보지도못했던 자괴감이 들었다. 평범한 한국인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한국인인 나는, 더 이상 추가로 자기 소개할 말도 없다. 나는 한국어밖에 못하고, 영어도 간신히 배웠고, 다른 언어는 잠깐 스쳐 지나간 정도다.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졌던 해외 경험의 기회를, 나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 가지려고 발버둥 쳐서 여기까지 왔다. 취직을 하고, 돈을 모아서, 간신히 일년간.


어째서 세상은 불평등한 걸까. 이게 ‘수저론’인가. 태어났을 때부터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뉘는 것.

그들에 대한 부러움에 때로는 눈물까지 흘렸던 나는 점차 그들과 친해지면서 그들 또한 내가 겪지 않았던 어려움을 겪었고, 각자만의 고민과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지 못했던 것을 서로 부러워하면서 산다. 부러워해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내가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많은 친구들 중에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의 ‘수저’에 관계 없이 가장 멋져보이는 사람이었다.

나도 언젠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 열등감과 자괴감에서 벗어나.





열등감 이야기를 하자면 외모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아마 상하이에서 나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가장 정점을 찍지 않았을까. 나는 어떻게 해도 혼혈인 친구들보다 더 눈이 크거나 코가 높거나 할 수 없었고, 각종 뮤직 페스티벌에서 만난 2, 3세 친구들은 정말 내가 보기에 너무 '쿨'하고 '힙'했다. 화장도, 패션도 그리고 말하는 스타일조차 감히 내가 범접할 수도 없을 만큼 (내가 보기엔) 멋져 보였다. 거기에 비교하면 나는 한없이 초라했다. 언제나 '안전한' 패션을 추구하는 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언제나 의식하는 나, 어떻게 해도 그냥 그런 이국적인 사람들과는 '바이브'자체가 다른 '평범한 한국인'인 나.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겉으로는 아닌 척, 예쁜 척, 자신 있는 척 했지만 사실은 외모적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한 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정도까지 갈 것도 아닌데 그렇게 나를 몰아세웠다는 거다. 마치 거식증에 걸려서 앙상하게 마른 사람이 여전히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듯이.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다 마음에 안든다고 소리치다가 가만히 거울을 보았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 거야. 거울 속의 내가 좀 불쌍해 보였다. 아무도 나에게 못생겼다고 하지 않는데. 그 말을 나에게 계속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고, 나를 아프게 찌르고 있는 사람도 바로 나였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더 '잘나질려고' 하는거지. 나를 나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내가 인정을 갈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가?



아무리 내가 더 '잘나고 예쁜' 사람이 되려고 해 봤자, 언제나 세상에는 나보다 더 멋진, 더 잘나가는, 더 돈이 많고, 더 힙한 사람이 있다. 세상은 그런 의미에서 공평하지 않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는 이상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 앞에서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열등감을 느낄때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완벽한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 앞에 섰을 때였다. 아무리 ‘이상’해도 자신감이 있고 당당하면 이상하게 보였던 것조차 아름답게 느껴지고, 아무리 예뻐도 스스로 어떤 부분에 주눅들어 있고 자신감 없어 보이면 그 예쁜 부분조차 참으로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아우라와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아우라와 표정은, 성형같은 쉬운 방법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마가 넓으면 넓은대로 예쁘고, 좁으면 좁은대로. 가슴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내 스타일이 평범하면 평범한 대로, 너무 특이하면 특이한대로, 그냥 세상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나 자신이 되는 것.


그리고 추가적으로 필요한 'take me or leave me' 태도. 나의 외모를 여기저기 꼼꼼하게 수도없이 지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말해주고 싶다. 이게 패키지니까 맘에 안들면 나도 필요 없다고.

물론 아직까지도 나는 완벽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되진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나를 후려치는 것을 그만 두게 되었다. 콤플렉스에 눈물 흘리지도 않게 되었다. 한국을 벗어나, 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록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모두 공평하게 완벽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다들 각자만의 방식으로 아름답다.







의도적으로 한국 친구들을 많이 만들지 않은 것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는 확실히 적었다. 그래도 예전 한국 회사에서 알던 사람들을 상하이에서 만나 홍첸루에 몇번 가기도 했다. 홍첸루는 상하이 한인 타운인데, 주말에 가면 오히려 한국인 보다는 놀러온 중국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이미 치맥, 떡볶이 등 한국 음식은 상하이의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한 느낌이고 코리안 바비큐, 그러니까 고깃집도 상하이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한국도 가깝고, 한국 음식이나 한국 문화도 쉽게 찾을 수 있고.


한인타운에서 상하이 주재원으로 나온 분들을 만나면서 또 자연스럽게 주재원 파트너로 나온 분들도 만났다. 초반에 몇번 만나고 그만 뒀는데, 그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불공평하다.

나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해외파견을 다닐 확률이 더 높았을까. 주재원으로 외국에 나왔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주재원으로 나가봤자, 내가 싫어했던 회사 업무는 그대로였을테지만 그것이 더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나도 나 혼자가 아니라 파트너가 있었다면, 주재원 '남편'을 찾았다면 더 편하게 해외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왜 어떤 사람은 심지어 '원하지도 않는' 해외 생활을, 나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획득'할 수 있게 된걸까.

왜 나의 삶은 좀 더 편하지 않을까. 더 쉽지 않을까.

불공평하게도.







나는 불공평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현재는 내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내가 주체성과 독립성을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돈도 없는 늙다리 어학연수생으로 (대부분의 한국인 어학연수생들은 다 대학생이었다) 혼자 와 있는거지. 그놈의 자유가 뭐길래! 그래서 나는 불공평한 세상을 탓할 수가 없다. 탓할 필요도 없고. 내가 내린 선택에, 내가 책임을 지는 거니까.


1년간의 상하이 어학연수는 즐거웠지만, 끝이 다가오자 나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이상 직장인이 아니고, 학생이다. 그 말은 곧 수입이 없고 지출만 있다는 말이다. 잠깐 한 아르바이트는 재정적으로 도움도 되지 않았고, 어학연수를 위해 모아둔 돈은 떨어져 가고 있었으며,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먹고 마시는 상하이 라이프, 도시에서의 삶은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돈'이었다.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돈, 아니 집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집세와 전기세가 나가니 숨 쉬는 것부터 '돈'이라고 하겠다.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며 커진 씀씀이 – 쇼핑과 맛집/까페 투어와 문화생활 – 은 상하이에서 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어학연수가 끝나고 무엇을 할지 거기까지의 계획은 세우지 않았었다. 막연히 상하이에서 취직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 하지만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여전히 눈앞이 깜깜했다.

하필이면 엄마가 한국에서 쓰러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차차 회복하셨지만 그 일 때문에 한국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장녀로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건지 불안감과 초조함이 미친 듯이 나를 덮쳐왔다.


어학연수 졸업을 하기도 전에 나는 여기저기 자소서를 써 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