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 - 취업
상하이에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긴 했지만 확실히 중국인 친구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중국어를 한다고 해도 나는 상하이에서 ‘외국인’이니까.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나의 일자리는 중국에서 꽌시-관계-를 통해 구해졌다. 상하이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상하이에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냥 혼자 왔다고 하면 다들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왔냐고 했다. 아는 사람이야 가서 만들면 되는 거지 뭐, 라는 안일하고도 당돌한 생각으로 왔었는데, 혼자 좌충우돌하다보니 이래서 ‘인맥’이 중요한건가, 라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나의 인맥이란 어학연수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뿐인데.
내 친구들 중 부모님이 상하이 출신인 친구가 있었다. 현재 그 친구의 가족은 독일에 살고 있지만 친척들이 상하이에 살고 있는데, 나도 그 친구를 따라 친구네 큰아버지네 댁에 놀러간 적이 몇 번 있었다. 어쩌다보니 같이 식사도 하고 놀러가기도 할 만큼 꽤 친하게 지냈다. 그 큰아버지가 내가 일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발벗고 나서서 자신이 한국 회사 대표를 안다고 하시며 소개를 시켜 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외국계 회사에 취업을 하고 싶어서 기웃거리던 중이라 한국계 회사라고 해서 그다지 열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바로 다음날 인터뷰를 보자고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큰아버지가 안다는 ‘한국 회사 대표’는 중국 롯데 HQ 대표님이셨고, 인터뷰를 통과하면 기획/경영 지원 팀으로 입사하게 되는 거였다. 현지 채용이라 예전에 비해 연봉이 오른 건 아니지만, 정말 스마트한 중국인 팀장님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내가 바라던 ‘다른’ 일이었기에 나의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명함과 가장 문제가 되는 취업비자까지 일사천리로 발급해 주었다. 역시 대기업이 좋긴 좋다. 그제야 알았지만 한국에서 2년 이상 근무한 경험이 있던 것이 중국 취업 비자 발급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왜 1년만에 퇴사하지 않았을까 후회했는데 2년 넘게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되다니.
그렇게 나는 상상치도 못하게 한국 대기업의 해외 지사에서 현채로 근무하게 되었다.
우리 사무실은 동방명주가 있는 루지아주이의 고층 빌딩 40층에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 24층에 근무하면서 정말 높은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40층이라니. 심지어 40층을 뛰어넘는 건물들이 루지아주이에는 많이 있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우리 팀장님 빼고 나머지 팀장님들은 모두 한국에서 파견 나오신 주재원 분들이었고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현지 중국인이었다. 나는 유일한 한국인 현채 직원이라, 그래서 주재원 팀장님들과도, 내 또래 여직원들인 현지 직원들과도 박쥐처럼(?) 어울릴 수 있었다.
루지아주이로 출근하게 되면서 가까운 곳으로 집을 구했다.
내가 상해에서 집을 얻을 돈도 없고, 자연스럽게 하우스 셰어로 들어가게 되었다.
첫번째 하우스 셰어는 전부 외국인인 친구들과 살았는데 다들 외향적이고 항상 거실에 모여서 놀고 있어서, 미래에 대한 고민, 글쓰기,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나와는 좀 맞지 않는 집이었다.
두번째 하우스는 중국인 둘, 나를 포함한 외국인 둘 이렇게 살았는데 이전 집보다 다들 개인주의적이어서 오히려 나는 편했다.
첫번째 집은 내가 상하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역인 프랑스 조계지 쪽에 있어서 힙한 장소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고, 두번째 집은 상하이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난징동루 쪽에 있어서 황푸강 와이탄(번드)과 가까워 강변 산책을 가기 좋았다.
두 ‘하우스’ 다 단지 내에 위치한 아파트를 (아마도 불법으로 개조하여) 세 내준 것이었다. 서울의 아파트와 비교해서 다른 점은, 상하이의 아파트들은 좀 더 독특한 공간들이 많다는 것이다. 발코니들도 네모 뿐 아니라 둥그런 모양도 많고, 창문도 커다랗고 튀어나온 창문이 많아 창틀 자체를 작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아파트가 아닌 ‘빌라’에 사는 친구들 집에도 놀러간 적이 있는데 내부 공간이 마치 해외 하우스같이 생긴 집들이 많아서 놀라웠다.
어째서 이렇게 다른 거지? 반면에 그럼 한국은 왜 그렇게 단조로운 거지?
한국식 아파트 그리고 원룸에서만 살던 나에게, ‘공간’ 그 자체가 주는 매력에 대해 알게 해 준 것이 상하이의 건축과 인테리어였다. 내 방을 꾸미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상하이에서 '이케아' 매장에 가봤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 막 이케아 광명점이 생겼고, 그 전에는 한국 사람들의 관광 루트 중 상하이 이케아 가 들어있기도 했다. 이케아, 데카트론, 디즈니 같은 서울에는 없지만 상하이에 먼저 들어간 외국 기업들을 보면서 나는 (인정하기 싫지만) 서울보다 더 잘나가는 것 같은 상하이에 조금 질투를 느꼈다.
두번째 이사도 마치고, 어느정도 새로운 직장에도 적응했다
확실히 서울에 비해 해외 지사의 분위기는 여유로운 편이었다. 정확히 9시까지 출근하고, 정확히 6시에 퇴근했다. 더 빨리 갈 필요도, 더 늦게 갈 필요도 없었다. 회식도 없었고 점심도 프리했다. 대개 일주일에 한번은 팀장님과 먹고, 한번은 다른 사람과 먹고, 나머지는 나 혼자 도시락 같은 걸 사 먹거나 배달시켜 먹었다.
먹을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서울에 비해 길거리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아침식사도 너무나 발달되어 있고, 고를 수 있는 점심의 종류도 얼마나 다양한지. 특히 루지아주이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식당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고르기 귀찮으면 소위 말하는 구내 식당으로 가면, 내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식들이 나왔다. 내가 시켜 먹으라고 해도, 몰라서 못 시켜먹었을 음식들을 알게 되는 재미.
내가 하는 일도 좀 더 적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팀인 만큼 팀장님을 보조해 보고서를 작성할 일이 많았는데, 자료를 찾으면서 중국 시장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덩달아 중국어 실력도 늘어갔다.
경영 지원 업무의 일환으로 상하이에 있는 롯데 마트 컨설팅을 간 적도 있다.
보고서의 내용은 아마 한국 해외 지사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식 기업문화를 기대하는 한국인 상사는 현지 중국인 직원들에게 실망하고, 중국인 직원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인 상사를 따르지 않는다. 현지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내도 그 아이디어의 승인을 받기 위해 한국 본사까지 서류를 보내야 하고, 그 동안 상황은 이미 변해 버린다. 몇 번 이런 일이 반복되자 현지 직원들은 아무도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지 않게 되었고, 현지 직원만큼 실무를 모르는 매니저 들은 효과적인 문제 해결책을 낼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한국인 상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대개 주재원으로 나와 있으며 오래 머무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현지 직원들의 ‘리더’가 되도록 교육시킨단 말인가? 거기다 한국 직장 문화에서 ‘리더’가 아니라 ‘보스’에 더 익숙한 분들을.
모두가 답은 알지만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
중국과 한국의 조직문화 차이도 느낀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후로 수평적 조직구조를 더 선호하게 된 반면, 한국은 오히려 일본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라고 하는데, 정작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오히려 위계질서가 덜하다고 느껴지다니.
취직한지 6개월만에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는 일이 터졌다.
중국의 롯데에 대한 소위 ‘사드 보복’(2017)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 팀은 사업 확장을 논하는 대신 사업 축소에 관한 보고서를 계속 작성했다.
회사 전체의 분위기는 흉흉해져만 갔다. 롯데가 중국에서 사업을 철수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현지 직원들을 일자리를 잃는 것을, 주재원 분들은 한국으로 언제 어떻게 다시 들어갈지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사드 보복이 심할 때는 롯데 간판도 내렸고, 한국인 직원들에게 택시 타지 말고, 돌아다니지 말라고도 했다.
중국 정부가 국민들에게는 애국심을 유발시키고 한국에게는 경제적인 제재로 압박을 주면서 그 두 가지를 사용하여 정치적,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단순히 뉴스 기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상하이에서 나의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있는 곳이 바로 태풍의 눈이었으니까.
아무리 시장이 크고 사업이 잘 나가더라도 중국 정부가 한마디 하면 순식간에 상황이 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중국이었다. 많은 외국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은 마치 계륵과 같은 존재인 것 같다. 그 큰 잠재력 넘치는 시장을 포기할 수가 없는데,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아니라는, 다른 시장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영 리스크가 너무 큰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외국 기업은 중국에서 모 회사와 연락하기 위해 vpn을 사용한다. 구글 등을 사용해야 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vpn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해 버리면? 갑자기 vpn 사용이 불가능해 지면서 혼란에 빠진다. 그러다 또 뭐가 안정되면 정부는 슬그머니 vpn을 풀어준다. 대개 이런 식이다.
나는 지금껏 '글로벌'과 '세계화'가 언제나 좋은 것, 우리가 추구하고 확장해 나가야 할 방향, 이라 배웠다. 말 그대로 세상은 넓고, 시장은 크고, 할 일은 많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글로벌은 리스크와 마찬가지라는 것은 느낀다. 기회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그만큼 많아진다. 심지어 많은 문제들이 컨트롤 하기 힘든 바깥상황에 좌지우지된다. 국제 정세나 환율같은 것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동성이 높아진 이 시대에 인간은 전 지구를 누비며 비즈니스를 하고, 여행을 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이런 삶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맞는' 삶인가?
어디에선가 인간은 자연스럽게 본래 태어난 곳 반경 얼마 내에서 몇명 내의 사람들과만 교류하고 그렇게 살다 죽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글을 읽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앞서서 '글로벌'이라는 가치를 전파한 제국주의자들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우리도 '글로벌'한 사람과 조직이 되어 세계적으로 성공하고 말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믿어왔던 나도, '글로벌한 인재'가 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던 나는 점점 그것이 정말로 '옳은' 방향인지 모르겠다. 글로벌이 되어갈수록, 문제는 많아지고, 스트레스는 높아지고, 행복은 멀어져 간다. 뜬금없이 중국과 미국의 정치 싸움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되어 버리듯이.
내가 중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 시위가 진행되었다.
해외 거주민으로서 박근혜 전 대통령 사태를 외국인 친구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내가 말하면서도 왜 이렇게 후진국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지, 이거 내가 내 얼굴에 침뱉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세계의 교민들도 대사관 앞에서 시위에 참여했는데, 중국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한번도 시위라는 것에 참여해 본적이 없는 나는 난생 처음 한국에 돌아가서 광화문 시위에 참여했다.
그 때 처음으로 내가 너무 쉽게 포기했던 건가, 생각했었다.
나는 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회사 점심시간에 티비로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에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렸다. 그래서 '글로벌'라는 말을 앞세워, '탈조선'을 목표로 삼았었다. 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떠남 밖에 답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글로벌한 세상에서도, 나는 여전히 한국에 연결되어 있었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글로벌'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굳건하게 머무르면서 옳다고 믿는 바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촛불 시위를 통해 한가지 더 배운 것은,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살 수 없겠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 세대와는 다르게 태어났을 때부터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사회는 책으로 밖에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억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나라에 와서 살아보고 나서야,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어떤 단어를 검색하려고 했는데, 그게 ‘금지’된 검색어임을 알았을 때.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럴리가 없는데)
중국 경제에 대해 수업시간에 몇 마디 했다가(심지어 부정적인 이야기도 아니었다) 갑자기 교장실로 불려가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는 협박을 들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 시키기 위한 한국에서의 시위를 보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놀라워하는 중국 택시기사님을 만났을 때.
티벳과 신장에 대한 이야기를 온라인에서 하면 바로 잡혀간다는 중국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중국의 똑똑한 젊은이들이, 천안문과 심지어 한국의 5.18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앞에 타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어쩌면 내가 상하이, 롯데에 있을 때 사드 문제와 일련의 사건들이 터진 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변하면서, 나는 ‘중국’에서의 삶을 진지하게 재검토 하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중국 정부의 대처를 보니 그 때 나의 선택이 맞았다는 것을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