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 시드니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신청 기간도 따로 없고, 아무때나 호주 이민성에서 온라인 신청을 하면 된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호주 워홀 비자를 신청했기 때문에 퀸스타운 병원에 전화해서 비자 건강검진 예약을 했다. 당연히 예약이 바로 잡힐 리가 없다는 것을 예상했지만, 한 주가 지나고 그 다음 주 금요일 오후에야 검진이 가능하다는건 정말 너무하다. 외국에 나와보면 정말 한국 병원이 최고라는 걸 알게 된다. 물론 그 편리함을 위해 희생되고 있는 의료산업 종사자들의 과도한 노동은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이 때,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길에 나는 한번 죽다 살아났다.(고 생각한다)
그 날 따라 날씨 때문에 내가 타야할 배가 미뤄졌고, 부랴부랴 운전해서 퀸스타운으로 달려가는데 건강검진 예약 시간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중간 쯤 되서부터 눈이 사정없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치고, 길은 미끄럽고, 속도는 나지 않았다. 뉴질랜드 건강검진 센터는 예약시간이 조금이라도 지나면 가차없이 예약을 취소시키고 다음 예약은 또 다음주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번 검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조급한 마음과 달리 날씨는 가혹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엄청나게 큰 트럭이 내 차 앞을 막았다. 시속 60키로미터로 천천히 가는 트럭 뒤에서 답답한 마음에 추월을 하고 싶은데, 뉴질랜드 도로는 일차선이다. 눈보라 치는 날씨 때문에 중앙선 넘어 차가 오는지 안오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몇번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안전하게 시속 60키로미터로 트럭과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가기로 마음을 내려놓았다. 퀸스타운에 가까워졌을 때쯤, 나를 지나쳐갔던 차들이 크게 연속 추돌사고가 난 모습을 발견했다. 다행히 나는 한발 늦게 가고 있어 그 사고에 엮이지 않고, 트럭과 함께 안전하게 지나쳐갔다. 반대편에서 경찰과 구급차가 그제야 달려오고 있을 만큼,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사고였다. 나도 그 차들을 따라가려고 하다 포기하고 속으로 내 앞으 트럭에게 온갖 욕을 다 했었다. 그런데 만약 그 트럭이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나는 정신없이 밟았을 것이고, 눈이 오는 이 시기에 길에서 미끄러지거나 분명 이 사고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 트럭은 일부러 나를 천천히 가게 만든, 그래서 나를 살린, 결국에 내 건강검진도 놓치지 않고 받게 해준, 신이 보내주신 트럭이었다.
그 때 큰 교훈을 얻었다.
천천히, 내 마음이 편안하게, 안전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 빨리 가려고 하지 말라고.
우여곡절 끝에 퀸스타운에서 건강검사를 마쳤다. 사람들이 꽤 많이 호주 비자를 발급받는지 리셉션에서부터 의사쌤까지 다들 서류 처리가 익숙해 보였다. 소변검사 하고, 엑스레이 찍고, 의사쌤과 어디 아픈데 없는지 간단히 문답하고 끝났다. 금요일에 검사 받았는데 일요일에 이민성에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호주 비자가 발급되었다.
시드니에 도착해서 관광 하면서, 이력서를 보냈던 크루즈 휘트선데이의 연락을 기다렸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보고, 공원에서 뒹굴거리기도 하고, 드디어 호주의 서핑 비치도 처음으로 가봤다. 하지만 막상 호주의 해변을 본 나의 감상은, 뉴질랜드 남섬에 비해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 라는 것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뉴질랜드에서 비정상적으로 일이 빨리 구해졌던 거고, 호주 취직은 그렇게 널널하지 않았다. 우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따야하는 자격증 리스트는 RSA, Food Safety, First Aid, Recreational Boat License...아니, 뭐가 이렇게 요구하는게 많아?!
먼저 RSA (Responsible Service of Alcohol). 이 자격증은 알콜을 서빙하려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자격증이다. 크루즈 보트에서 술을 파니까 이게 있어야 한단다. 주별로 알콜 판매 법규가 달라 주 별로 자격증을 따야 한다. 나는 퀸즐랜드에서 일할거니까 RSA 퀸즐랜드를 신청했다. 온라인 코스로 하면 저렴하다. 지식을 쌓는 목적의 자격증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법규가 있다는 식으로 미리 알콜 판매 관련 교육을 시키는 목적이다. 이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호주의 술 관련 법규에 대해 알게 되어서 유용했다. 예를 들면 술에 취한 사람에게 술을 판매하면 판매자도 벌금을 낸다는 거. 그래서 술에 취해 보이면 술 판매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알콜 관련 규제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는 국회의원들이 이런 법규를 낼 리가 없지만.
오지 선다 시험 이외에 3분짜리 동영상을 찍어야 제출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누가 봐도 술에 취해보이는 남자가 들어와서 술 더 내놓으라고 한다. 뭐라고 말하겠는가? 미성년자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서 술을 사려고 한다. 뭐라고 대응하겠는가. 뭐 이런 식이다. RSA와 함께 RSG(갬블링 관련업에 종사할때 있어야 하는 자격증) 도 같이 많이 따는데, 나는 카지노에서 일하진 않을 것 같아 패스했다.
두번째로 FOOD SAFETY(식품 안전 자격증) 이다. 이것도 RSA랑 비슷하게 자료 읽고 퀴즈 풀면 된다. 식당 같은 데서 음식 관련 청결 어떻게 유지해야 하나, 이런 걸 묻고, 실기 시험은 없다. 운전면허/도덕책 시험 같은 자격증 이었다.
세번째로 응급처치 자격증(First Aid). 뉴질랜드에서 따긴 했지만 호주 자격증이 필요하다. 필기 시험은 온라인으로 가능하지만 오프라인 실기 수업을 들는 것이 필수다. 하루 날 잡아 시드니에서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은 오전부터 점심시간 없이 3시 반까지 진행된다. 인형을 가지고 심폐소생술과 심재생기 실습 하고, 짝지어서 붕대도 감아보고, 뉴질랜드에서는 배울 필요가 없었으나 호주에서는 필수인, 뱀이나 해파리에 물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배웠다. 다시 한번 와일드,야생의 나라 호주에 왔다는 걸 실감한다.
함께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 필수 교육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서브웨이 매니저들이 4명정도 있었는데, 매장에서 고객이 쓰러지거나 사고가 일어날 때를 대비해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교육이 필수일까? 이런 교육 이외에도, 호주/뉴질랜드는 각종 안전 조치가 한국보다 엄청나게 까다롭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안전보다는 효율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Boat License 또한 주 별로 따야 하는 거라, 이건 퀸즐랜드 에일리 비치로 이동 후 신청했다. 필수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땄다. 역시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시험을 보고 패스하면 실기 테스트 날짜를 잡을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 일하면서 기본적인 것들을 배워서 퀴즈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실기도 테스트라기 보다는 실제로 배를 한번 몰아보고, 내가 실제로 퀴즈를 풀었나 누가 대신 해준거 아닌가 확인하는 형식이다.
나말고 호주 남자애 두명도 같이 시험을 보러 왔다. 서류 이것저것 사인 하고 한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바다로 나갔다. 보트를 타고 에일리 포트에서 아벨 마리나 포트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세 명이 번갈아가면서 배 운전 하고, 바다 위에서 배 정박 시켜보고, 포트에 배를 대는 연습을 했다. 한 시간 반 정도 후, 드디어 서류를 받았다. 이걸 가지고 TMR에 가면 드디어 자격증이 나온다. 나는 운전면허와 함께 신청해서 퀸즐랜드 운전면허 뒤에 보트 라이센스가 있다.
물론 이 모든 신청에는 돈이 든다. 지금 구직하는데 돈을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거야.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 면접에서 나를 떨어뜨리지는 않겠지!
조급한 마음을 애써 달랜다.
크루즈 휘트선데이 면접을 위해 시드니에서 무작정 에일리비치로 향했다. 프로스파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습하고 더운 날씨를 온 몸으로 느꼈다. 드디어 열대지방에 도착한거다. 퀸스타운보다 더 작은 시골 공항인 것을 보고 밀포드에 이어 또 다시 외딴 곳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공항 버스를 타고 에일리비치로 이동하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호주 풍경이 너무 황량해서 한번 더 놀랐다. 거의 사막 수준이다.
에일리 비치에 도착해서 한바퀴 걸어봤더니, 그냥 거리 하나가 끝이다. 대신 기대했던 거대한 야외 수영장-라군-은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이렇게 북 퀸즐랜드에 수영장(라군)이 많은 이유는, 바다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해파리, 상어, 악어 때문에.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들어갈 수가 없다니… 사람 살 곳이 아니다,라는 걸 가서 직접 살아봐야 인정하는 나는야 경험해봐야 아는 사람.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들 스타일 좋고 몸매도 좋다. 캘리포니아, LA처럼...(가본적은 없지만) 역시 서핑과 해변의 천국 호주인가. 갑자기 운동에 열정이 생겼다. 헬스장이 있나, 요가 클래스가 있나 찾아보니 대부분 다 옆 동네, 캐논빌에 있다. 에일리 비치에서 캐논빌 가는데 버스는 whitsunday transit 이라고 하나밖에 없고 거의 20분마다 운행한다. 그것도 일요일에는 한시간에 1대뿐. 가격도 비싸다.
여기도 차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게 생겼다.
크루즈 휘트선데이 면접은 총 10명의 지원자가 함께 봤다.
인사 담당자랑 매니저가 들어와서 다같이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면접이 진행되었다. 중국 친구 2명, 나, 아일랜드 친구 한명 있고 나머지는 오지(호주 현지인)였다. 성별, 연령대도 다양했다.
사실 인터뷰만 보면 바로바로 일이 진행되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레퍼런스 체크까지하고 결과가 2주 후에야 나온다는거다.
그래서 또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나는 새로운 집에 둥지를 틀었고, 월급을 받으려면 필수인 택스 넘버도 받았다. 호주 정부기관으로 전화를 했더니 나에게 보이스 아이덴티티를 등록할거냐고 묻는다. 내 목소리를 저장하면 다음번에 바로 편리하게 신원확인이 된다고. 세상에나. 이제 내 지문, 주민등록번호, 여권번호를 넘어 내 목소리까지 탈탈 털어가는구나. 미래에는 정말 나라는 사람의 사칭을 넘어 복사가 가능할 것 같다.
그렇게 거의 한달이 지나고 나서야 크루즈 웻선데이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합격 소식을 보냈다.
선원으로서 받아야 할 필수 트레이닝에는 화재에 대응하는 방법, 배가 좌초되었을 때 대응하는 방법, 누군가 물에 빠졌을 때 혹은 다쳤을 때 대응하는 법, 선장을 도와 닻을 내리거나 배를 묶는 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 순간의 실수가 크나큰 안전 사고 - 아차 하는 순간에 로프에 낀 손가락이 잘린다거나 하는 – 혹은 아주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일로 번질 수 있다.
배에서 일하는 것의 가장 독특한 것을 꼽는다면 안전과 청소일 것이다. 사실 안전을 위해 정리와 청소가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첫번째로 배에서는 ‘무게’가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이 얼마나 어디에 실려 있는지 반드시 정확히 알아야 하고, 긴급 상황을 대비해 모든것은 항상 제자리에 누구나 찾을 수 있게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두번째로 모든 물건은 기본적으로 배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기 때문에 움직임 없이 고정시키는 것이 필수다. 또 물건들이 공기 흐름을 막거나 중요한 이동통로를 막고 있어서도 안된다.
특히나 화학물질이나 엔진룸 관리 같은 경우에도 정말 민감하다. 화학물질은 심지어 베이비로션이나 선크림까지, 전부 보트 화학물질 관리 리스트에 넣고 어디에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 문서화 시킨다. 엔진룸의 기름 유출 관리야 말할 것도 없다. 아이러니 하게도 물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불에 활활 탈 수 있는 것이 배이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언제나 항상 점검, 점검에 또 점검을 반복한다. 무슨 부속품같은게 굴러다닌다 싶으면 바로 주워서 이게 어디서 나왔는지 찾아야 한다. 아주 작은 것 하나가 큰 트러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배에서 누군가 다쳤다, 하면 사소한 것이라도 바로 원인 제거에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서랍에 손이 끼었다거나 모서리가 너무 뾰족하다는 것도 서랍에 안전 장치를 설치하거나 모서리에 실리콘을 덧대는 등의 위험요소 제거 작업이 필수다.
마지막으로 어디든 항해하고 들어오면 소금물 부식을 막기 위해 구석구석 다 씻어야 한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쑤시개로 창틀 먼지 제거를 처음 해봤다. 보트는 정말 애지중지, 마치 새 페라리를 정성스럽게 항상 새것처럼 광이 나도록 닦듯이, 그렇게 관리 해야 한다.(라고 배웠다.) 하긴 페라리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비싸니까.
보트 /요트 라이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유지 관리다. 실제 항해가 절반, 관리가 절반이다.
하긴 건물 관리, 집 관리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대단한걸 가져본 적이 없는, 렌트하는 삶을 살아서 아직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소유는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돈이 엄청 많아서 그 책임까지도 외주해 버릴수 있다면 또 모르겠다. 어쨌든 보트에서 일하는 덕분에 청소와 정리에 대해서는 아주 뼈저리게 배우고 있다. 나처럼 귀찮아서 대충 서랍에 쳐박아 넣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레슨이다.
보트 자격증이 있어서 추가로 구명보트를 모는 훈련도 받았다. 제일 재미있는 트레이닝이다.
배와 자동차의 차이는, 차는 바로바로 컨트롤이 되는데 배는 그렇지 않다는 거다.
배는, 내가 키를 틀면 바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물 위에서 미끄러지면서 서서히 방향을 바꾼다. 어쩌면 내 삶은 자동차가 아니라 배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내 마음처럼 원하는 대로 바로바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물결에 휩쓸려 일렁이면서 천천히 돌아간다. 중요한 것은 내가 키를 놓치지 않고, 참을 성 있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는 것이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배는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