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피지
버티고 버티다가 뉴질랜드에서 결국 차를 샀다.
외진 곳에 사는 만큼, 차가 없으면 이동과 여행의 제한이 컸다. 함께 일하던 친구가 떠나면서 믿을 만한 차를 나쁘지 않은 가격에 넘겨 주겠다고 했다.
차를 사는 것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도전이었다. 먼저 나의 운전면허는 장롱면허나 다름 없었고, 차를 소유하는 순간부터 차에 대한 감가상각은 물론 관리비, 기름값, 보험료가 사정없이 나가서 저축에는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월정도 밀포드 사운드에 머무르며 가까운 곳만 간신히 차를 얻어타고 왔다갔다 하다 보니 점점 답답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때가 내가 유일하게 차를 몰고 다녀볼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차’를 한국에서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기대조차 감히 가져 본 적도 없고(아마 재정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대중 교통이 잘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능숙한 운전자는 되고 싶었다.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심지어 면허도 있는데, 연습할 기회가 없어서 차가 없어서 운전을 못하는게 싫었다. 내가 차가 필요하다고 하면, 차를 사는 대신 차 있는 남자친구를 만들면 된다는 말이나 듣는게 싫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할 수 있는데 부탁하는 거랑,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의존하는 건 차원이 다르잖아! 도시가 아닌, 차도 별로 없는 곳에서 운전연습을 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그렇게 나에게 하는 ‘투자’의 일환이라 마음먹고 중고차를 샀다. 큰 맘먹고 내린 과감한 도전이었다.
다행히 차는 오토매틱이라 (나는 2종 면허만 있다) 운전이 쉬웠다. 구불구불하기로 유명한 밀포드 로드를 다니며 나는 운전 연습을 했다. 기본 왕복이 5시간 운전이니 자연스럽게 운전실력이 늘었다. 관광객이 넘치는 퀸스타운의 주차난 속에서, 평행 주차도 잘 하게 됐다.
운전에 어설프게 자신이 붙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라고 했던가.
운전한지 6개월 차, 나는 밀포드에서 차 사고가 났다.
퀸스타운보다 더 멀리 인버카길까지 다녀오던 중이었다. 몸 컨디션이 안좋아서 빨리 집에 도착해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멈추지도 않고 내리 6시간 넘게 운전해서, 밀포드 숙소 도착을 40분 정도 남겨두지 않았던 때였다.
워낙 밀포드 로드를 자주 왔다갔다 하다 보니 코너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사실은, 비가 온 후라 길이 젖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제한속도가 30이라 써져 있던 코너를 나는 50 정도의 속도로 돌았다. 차는 코너를 돌아감과 동시에 미끄러져 돌았고, 나는 말 그대로 너무 놀라 핸들을 꺾지도 못하도 그냥 잡고만 있었다. 차는 길 옆으로 끼익 밀려 나가 후진으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행히 가파른 언덕도 아니었고,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게 아니었어서 그런지 조금 미끄러지다 멈췄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차 밖으로 나와서 확인해 보니, 기적처럼, 커다란 나무 두 개의 사이로 차가 들어와 있었다 (아니었으면 무조건 나무를 박았을 것이다.) 언덕에서 더 미끄러졌으면 호수까지 밀려 들어갔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코너길이었기에 만약 반대편 차가 있었다면 추돌사고가 크게 날 수도 있었다.
차는 언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상태라 결국 트럭을 불러 끄집어 내야 했고, 정비소로 보냈는데 놀랍게도 멀쩡하다고 했다. 나 또한 멀쩡했고 말이다. 심장이 벌렁거렸던 것만 빼면.
차 ‘사고’라고 했지만 사고라 할 것도 없을 만큼 놀랍게 일이 끝났다.
하지만 이후 나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아무래도 나는 운전을 하면 안될 것 같다는 자괴감에.
다행히 큰 일은 나지 않았지만 혼자 밀포드 로드에서 코너 돌다 사고 냈다는 것도 너무 창피했다. 작은 밀포드 커뮤니티는 모든 소문이 다 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곳이다. 그 당시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고, 미끄러운 길 때문에 나 뿐 아니라 다른 중국인 여자애 한 명도 차 사고가 나서 폐차를 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사고 때문에 ‘아시안 여자애들이 “역시나” 운전 못한다’ 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나는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감은 땅바닥을 치고, 진지하게 나는 운전을 관둬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여자 친구들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밀포드 로드는 원래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차 하는 순간을 겪어. 죽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잖아? 살다 보면 이런 거지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라고. 니가 못나서가 아니라.
아시안 여자애가 어쩌고 하는 말? 들을 필요도 없어. 똑같은 사고가 난 사람이 백인 남자라면, 걔한테 사람들이 너 앞으로 운전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아? 왜 그렇게 바보같은 짓을 했냐고 놀리고 그게 끝일걸. 말도 안되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너를 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일희 일비하면서, 괜히 스스로 자신감을 잃을 필요 없어. ”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나는 다시 차분하고 침착하게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그 사고 이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엉엉 울면서 역시 난 못난이라고 포기했더라면 나는 영영 운전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바라던 대로 베테랑 운전자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운전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이, 혼자 어디든 갈 수 있는 운전자.
운전을 할 줄 아는게 아주 다행이었던 때도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오른쪽 어금니가 아프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아니 도시에 살 때는 작은 치통이 있어도, 조금만 불편해도 치과를 바로 가면 되니까 한번도 큰 문제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좀 심해진다 싶어서 치과를 예약하려고 하니 가장 가까운 테아나우는 예약이 다 찼다고 하고, 퀸스타운 아니면 인버카길까지 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 곳들도 예약이 쉽지 않았다. 간신히 며칠 내로 예약해서 시내로 나가려고 하는 날, 하필이면 눈이 와서 밀포드 로드가 막혀버렸다.
거의 3일간 밀포드에 갇혀 있었는데 치통이 너무 심해서 잠도 못 자고 먹을 수도 없었다. 진통제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치통이란 것이 이렇게 아픈 것인 줄 몰랐다. 지금까지 이렇게 아플 정도로 참아본 적이 없으니까!
드디어 밀포드 로드가 열렸다는 말이 들리자 마자 나는 차를 몰고 퀸스타운의 치과로 달려갔다. 응급 상황이라 지금 당장 진료를 봐야 한다고 돈도 더 냈다. 5시간 동안 아픈 뺨을 부여잡고 혼자 운전해 나가면서, 치과 한번 가는데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를 가야 하는게 정상인가,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년이 지나자, 함께 하던 동료와 친구들도 다들 자신의 길로 하나씩 떠났다.
나도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공식 취업비자 발급 요청을 해야 할까? 이 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가? 뉴질랜드 생활은 충분히 좋았지만, 이대로 정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지금껏 용감하게 혼자서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도 나는 혼자 갈 수 있을까? 특히나 혼자 울면서 운전해 5시간을 나갔던 사건이 트라우마처럼 자리잡았다. 어째서 나만 빼고 남들은 다 짝을 찾아 서로 의지하며 여행하고,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혼자'여야 하는 것일까. 내가 함께하는 파트너를 구하는데 너무 까탈스럽게 구는 걸까?
파트너는 없지만, 내가 방문할 수 있는 친구들은 있다.
뉴질랜드의 최남단에 위치한 스튜어트 아일랜드에 가서 거기에서 현지 가이드를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 야생 키위새를 찾아 헤맸다. 야행성이라고 해서 밤에 작은 불빛에 의존해 해변을 걸어다녔는데도 키위를 볼 수 없어 차를 몰고 숙소로 돌아오는 와중, 길에서 키위를 보았다! 생각보다 작은, 닭 같은 느낌이었다. 키위 보다 더 멋졌던 새는 단연 알바트로스였다. 멀리서 볼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본 알바트로스는 엄청나게 컸다. 갈매기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게 무섭게 생긴 알바트로스. 바닷바람을 가르며 유영하고 있는 2미터 가까이 되는 알바트로스를 보면 나도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뉴질랜드 남섬에서부터 차를 몰고 로드트립을 하면서 북섬의 오클랜드까지 올라갔다. 오클랜드에서 친구를 만나 피지로 향했다. 피지도 여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크루즈 선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이 때 크루즈 선 회사가 나중에 내가 호주에서 일하게 될 회사일 줄,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우리는 만타레이를 보기 위해 피지의 만타 리조트로 항했는데, 도착하자 마자 만타를 보았다. 이 때는 수면 위에서 거대한 형태만 봤는데, 다음날 아침 만타가 나타났다는 징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스노클을 끼고 물 속으로 들어가서 만난 만타레이는 고래 다음으로 내가 물속에서 탄성을 지르게 만든 놀라운 생명체였다. 디즈니 영화 모아나에서 할머니가 만타레이가 되어 모아나의 길을 안내하는데, 작은 배를 이끌 수 있을 만큼의 그 크기가 사실이었다. 만타는 물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그게 먹이를 찾는 행동이라고 했다.
피지에서 우리가 묵은 리조트는 산호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그 곳에서 산호를 연구하는 해양 생물학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따라 산호 숲을 스노클링 하면서, 나도 해양 생물학을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한국에서는 못했겠구나, 나는 문과 출신이라서.
갑자기 문과/이과로 나누어서 공부를 시키는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나는 나의 또다른 가능성을 너무 일찍 닫아버린 걸까. '문과'라는 틀에 갇혀서.
그래, 해양 생물학까진 아니더라도 어쩌면 다시 과거의 꿈, 다이빙 강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이룰 때가 되었는지도 몰라. 나는 피지 여행을 함께한 친구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친구는 오클랜드로 돌아가고, 나는 호주로 향하기로 했다. 북호주의 열대 바다에 대한 꿈을 다시 이루러 가 보자!
밀포드의 크루즈에서 일하던 친구들 중에는 호주에 있다가 뉴질랜드로 넘어온 친구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이 호주의 케언즈와 Whitsundays의 회사들에 추천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보트에서 일 하는 댓가로 무료로 다이빙 강사 트레이닝을 시켜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거대한 산호의 숲,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도 있고, 매일같이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도 있고.
우연히 공항으로 가기 전 시내를 어슬렁 거리던 우리는 한국식당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친구는 한국인이 아니지만 한국음식을 좋아하니까. 나는 신나서 앞장서 들어갔는데, 테이블에 앉자 마자 주변을 살펴보고 경악했다. 그 때 한참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피지로 간 한국인 사이비 종교 집단에 대한 이야기가 방송 중이었는데, 우연찮게도 그 종교 집단-은혜로교회-가 운영하던 식당이었던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한국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 보이진 않았다. 여기에서 갇혀서 맞고 있나요 라고 차마 물어볼 순 없었고, 우린 떡볶이와 김밥 같은 분식을 시켰다. 이 집단에 돈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먹고 나오는데도 마음이 참 찝찝했다. 그래, 외로움에 못 견뎌 사람을 찾다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바에는, 차라리 혼자 가겠다.
때때로 몰려오는 외로움 대신, 선택한 자유.
누구에게도 나의 여권을 맡길 필요 없고, 누구에게도 제발 내 여권을 돌려달라 말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도 나의 휴가를 요청할 필요도 없고, 누구에게도 휴가 다녀왔다고 보고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도 나랑 같이 가자고 부탁할 필요도 없고, 내가 가기 싫은 곳을 억지로 함께 갈 필요도 없는 자유.
혼자인게 두려웠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지도 못했겠지.
앞으로 나는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