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 휘트선데이
휘트선데이 제도에 위치해 있는 에일리 비치는 브리즈번과 케언즈 중간에 위치한 휴양지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체험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크루즈 휘트선데이 회사는 이 곳에서 각종 보트 트립을 진행한다.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보다 사업 규모가 훨씬 큰 만큼, 내가 타야 할 배도, 할 일도 더 많아졌다.
이 회사는 선원과 승무원의 역할이 나누어져서 아쉽게도 나는 선원으로서 배에 대해 배울 기회가 적어졌다. 하지만 나중에는 승무원에서 선원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었다.
취직까지 버텼던 보람이 있게, 대기업으로서 준다는 복지혜택도 좋았고, 심지어 첫 시프트를 요트로 배정받아서 감격했다. 호주에 오자마자 배가 아니라 요트에서 일하게 되다니..!
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의 일과는 차원이 다른 고생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다.
카미라 요트트립은, 휘트선데이 제도에서는 보라색 요트로 유명하다. 대부분 30명-70명 그룹으로 진행되는 소규모 투어다. 첫날은 다행히 30명정도밖에 타지 않아서 조금 여유롭게 이것저것 일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70명 이상 풀로 꽉꽉 차서 운행했다.
7시까지 출근해서 음식 싣기 등 세일링 준비를 하고 8시에 보딩을 시작한다. 세일링을 하며 모닝 티타임을 제공하면 스노클링 포인트에 도착한다. 스노클링이 끝나면 다시 다들 배에 태워서 룩아웃으로 간다. 룩아웃에서는 보트에 남아서 점심 준비를 하거나, 그리고 가이드 역할로 룩아웃에 간다.
바다를 가르는 요트에 대한 로망은 첫 날 와장창 깨졌다.
현실은 에어컨 없는 야외 공간, 그리고 비좁은 실내 갤리(요트 밑) 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었다! 스케줄도 빡빡해서 앉아있을 시간도 없었다.
점심 때, 나는 바베큐를 준비했는데 땀으로 샤워하면서 70명분 고기를 구웠다.
음료수를 세 개씩이나 원 샷 하는데도 너무 더워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왜 더운게 좋다고 했지? 기억이 안난다.
가이드 역할도 쉽지는 않다. 30분 정도 하이킹을 하고 언덕 너머로 그룹을 이끌고 가야 하는데, ‘고객을 위한’ 생수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가야 한다. 너무 힘들다 싶을 때 꼭대기에 도착하는데, 막상 올라가면 경치는 멋지다. 시드니 하버브릿지 다음으로 호주에서 사진이 제일 많이 찍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곳의 회오리도 바람과 해류에 따라 매번 모습이 바뀌기 때문에 항상 올라올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행운이긴 했다. 그런데 그 멋짐보다도 땀을 식혀줄 바람이 절실하다. 사람들 사진 열심히 찍어주고, 화이트헤븐 비치로 내려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바비큐 준비가 되어있는 보트가 데리러 온다.
화이트 헤븐 비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힐 때 항상 들어가는 곳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나는 꼭 와보고 싶었었다. 모래가 정말 하얗고, 해변에는 가오리와 아기 레몬상어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정작 일 할 때는 힘들고 지쳐서, 해변이고 뭐고 그냥 나무 아래서 널부러져서 앉아 있게 된다.
약 한시간 반 정도 점심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세일링을 해서 에일리비치로 6시쯤 돌아온다. 돌아오고 나서는 청소하고 7시에 퇴근. 이렇게 12시간을 일하는 것이다.
첫 주 카미라에서 5일 연속 일하고 그 다음 3일 쉬면서 잠만 잤다. 더위를 먹어서 입맛도 없다.
친해진 캡틴 중 한명이 날 카미라로 자주 넣어달라고 했다는데, 난 속으로 제발 카미라에 넣지 말아달라고 외쳤다. 하긴, 하루 종일 땡볕 밑에서 힘들다가도 마지막에 바람을 맞으며 에일리비치로 돌아올 때는 ‘야, 좋다, 이 맛에 요트 타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카미라가 끝나고 로스터를 확인하니 이제부터는 리프보트 seaflight에만 죽어라고 배정되어 있다.
리프 보트는 멀리 그레이트배리어 리프까지 나가 수상 폰툰에서 스노클링을 하는 데이 트립이다. 크루즈 휘트선데이는 심지어 폰툰에서 숙소까지 운영하고 있어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서의 하룻밤을 보내는 투어도 제공한다.
리프보트도 카미라처럼 7시까지 출근이다.
요트에서 일하다가 오니, 실내 에어컨이 있는 보트가 이렇게 행복한 장소인 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8시에 보딩해서 해밀턴 아일랜드를 들렀다가 리프로 출발한다. 3시간 정도 바다를 가르고 항해하는 만큼 배멀미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몇 백명 수용 가능한 큰 배고, 내 폰툰 도착 전까지 주 업무는 배멀미 하는 사람들 돌보기 및 식음료 판매였다.
11시부터 3시까지 약 4시간동안 폰툰에 머무른다.
그 시간동안 사람들은 스노클링 하고, 배에서 제공하는 부페를 즐기고, 폰툰에서 뒹굴거린다. 물론 승무원들은 스노클링 액티비티 진행하고, 잠수함 액티비티도 진행하고, 부페도 진행하고, 그 와중에 점심시간도 가진다. 밀포드와는 다르게 배에 셰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업체에서 부페 음식을 받아다가 제공해 준다. 30분마다 업무가 재 배치 되니까 차라리 시간도 빨리 지나가고 좋은 것 같다.
밀포드와 또 다른 점은 모든 보트에 수상 액티비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안전 규칙 설명, 장비 설명, 안전사고가 생겼을 때 대응하는 법을 숙지하고 고객들에게 전달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 때문에 보트 슈즈와 편광 렌즈 선글라스도 필수다.
스노클링 하는 고객들을 안내 하다 보면 의외로 스노클링을 한번도 안해본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어떻게 마스크를 쓰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래도 용감하게 물에 들어가서 물고기 보겠다고 하는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 해파리 방지용 웻수트를 골라주고, 구명조끼를 체크해주면서 한국에서 워터파크에서 일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한다. 호주에서 비슷한 일을 하게 될 줄이야!
넓게 펼쳐져 있는 산호초를 보는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어렸을 적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투명한 하늘색 바다 사진을 보면서, 언젠가 저런 곳에 꼭 가보리라 생각했었다. 아예 그런 곳에 살게 될 줄 몰랐지.
리프에 갈 때마다 나도 뛰어들어서 수영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운이 좋으면 가끔 점심시간에 스노클링을 하고 오기도 한다.
그렇게 폰툰에서의 4시간이 불같이 지나가고, 다시 거친 바다를 지나고, 애프터눈 티를 제공하고, 해밀턴 아일랜드 들렀다 에일리비치로 돌아오면 6시다. 역시 1시간동안 청소하고 7시 퇴근! 이번에도 12시간이네.
풀데이 리프 트립뿐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는 별도로 7시에 보딩해서 2시에 돌아오는 반나절 리프 트립도 운영하고 있다. 배는 seahorse와 sea odyssey 라는 작은 두 대를 번갈아가며 사용한다. 풀데이와는 다르게 해밀턴 아일랜드를 들르지 않고 리프로 직행하고, 폰툰에서도 2시간만 머무르고 돌아온다.
100명 정도 탈수 있는 작은 보트이고, 승무원 팀도 4-5명으로 작다. 6시까지 출근에, 하는 일은 풀데이랑 비슷한데 규모가 훨씬 작다보니 상대적으로 덜 피곤했다. 대신 작은 보트라 흔들림은 훨씬 심하다.
다행히 나는 배멀미를 하지 않아 작은 배에 배정되어도 큰 문제는 없다. 2시 반 전에 돌아와 점심 먹고 청소를 하면 4시에 끝난다. 12시간씩 일하다가 일찍 끝나니 심지어 에일리 비치 라군에 갈 시간까지 생겼다. 9 to 6, 하루 8시간 일하던 때가 그리울 줄이야.
한동안 리프/폰툰 트립 보트에서만 일을 하다가 드디어 화이트헤븐비치 투어 보트에 배정을 받았다.
리프보트보다 30분 일찍 6시 반에 출근한다. 이 투어는 풀데이, 오전, 오후 투어 세개가 있는데 셋 다 보트 하나로 진행된다.
7시 좀 넘어서 풀데이, 오전 투어 고객들을 에일리비치와 해밀턴 아일랜드에서 픽업해 화이트헤븐 비치로 간다. 비치에 도착하면 물때에 따라 작은 보트에 태워서 사람들을 해변으로 나르거나, 아니면 배를 해변에 대서 사람들을 내려준다.
우리 회사는 해변에 큰 천막을 쳐놓고 얼음물, 아이들을 위한 개별 텐트, 각종 장난감 등을 제공하는데 크루 이외에 포토그래퍼 한명이랑 마사지사 한명도 상주하고 있다. 크루들은 풀데이 트립으로 온 사람들을 데리고 힐인렛 투어를 가거나, 해변에 가서 사람들이랑 놀아주고, 사진도 찍어 준다.
오전 투어 사람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면 크루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한 팀은 오전 투어 고객 들을 데려다주고 오후 투어 고객들을 픽업해 돌아오거나, 나머지 팀은 해변에서 풀데이트립 손님들을 위한 바비큐를 진행한다. (그놈의 바베큐!) 비치 보트는 마치 카미라와 리프 보트의 중간같은 느낌이다. 실내와 실외가 적당히 공존하는...
투어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면 텐트와 짐을 다 정리한다. 원터치 텐트를 처음에 어떻게 접는지 몰라 헤맸는데 나중에는 1분내로 촥촥 텐트를 접게 되었다. 짐들을 보트로 다 실어나르면 다시 에일리 비치로 출발. 막노동이 따로 없다.
처음엔 이것저것 정신 없었는데, 몇 번씩 같은 보트들을 타고 나니까, 대충 각각의 보트와 각각의 투어에서 어떻게 스케줄이 진행되는지 알 것 같다. 짧은 관광투어만 진행됐던 밀포드보다 훨씬 바쁘다. 바다를 볼 시간도 없고, 사람도 더 많고.
사실 밀포드에서도 대개 보트 내부에서 일했지 이렇게 호주에서처럼 '야외'에서 일하진 않았다. 나는 밖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사무실 컴퓨터 뒤에만 앉아있는 사무직의 삶이 정말 지겨웠는데, 이렇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해가 내리쬐면 살을 태우는 '바깥일'을 해 보니 참으로 강한 자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는 삶'은 자연친화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나의 일을 자연 친화적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호주 시골의 삶 또한 자연 친화적이다.
엄청나게 큰 거미는 물론이요, 도마뱀은 나타났나보다 하는, 귀여운 수준이고 빨래를 널 때 뱀이 안나와야 할 텐데 하고 걱정하고, 저녁에는 길을 뒤덮은 두꺼비와 개구리를 피해 다닌다(우기라서). 호주 바퀴벌레는 한국 바퀴벌레보다 훨씬 크고 날아다닌다. 울며 겨자먹기로 그 바퀴를 혼자 잡고, 마당 풀밭에 누워있다 이상한 벌레에 물려서 고생까지 하고 나니 왜 사람들이 모던한, 도시의 삶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것도 같다.
자연 친화적인 삶은 사는 나의 머리는 비맞아서 떡지고, 매일 최대한 화상을 덜 입기 위해 선크림을 게이샤 수준으로 발라서 얼굴에 뾰루지는 올라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까매진다. 이제 벌레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지 않고 주워 담아서 밖에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거뜬히 출근 한다.
어쩌면 북 퀸즐랜드 자체가 사람을 강인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해파리가 있어도 그냥 수영하고, 외진 해변에서는 악어를 걱정하고 패들보드나 서핑보트를 타고 나가서는 상어를 걱정하면서도 그냥 수영한다. 극독을 가진 브라운 스네이크를 걱정하면서도 하이킹을 가고, 대부분의 일은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그러려니, 하고 맥주나 마시고 넘어가는 아주 널널한 마인드.
퇴근하고 돌아와 집 앞에 있는 캄캄한 수영장으로 첨벙 뛰어든다.
물 속에 누워서 보는 밤하늘의 별이 쏟아져 내릴것 같다. 야밤에 혼자 물에 둥둥 떠서 별을 보는 일상이라니.
언젠가 누군가 나보고 온실 속의 화초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 밑에서 진정한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래서 온실 바깥으로 나가면 버텨나가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온실이 아닌 곳에서 더 강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자신을 어떤 사람이냐 믿느냐에 따라 달렸다. 온실 바깥의 '자연 친화적인 삶'은 상상하는 것 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누군가는 어떻게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온실 밖 자연에서 이렇게 찰나의 보석같은 순간들을 컬렉팅 하고 있다. 화려함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