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 산이 아니라면, 내려가면 된다. 과감하게.

호주 - 에일리비치, 휘트선데이

by ClaraSue


이번 시프트는 특별히 크루즈쉽 트랜스퍼에 배정되었다. 보트는 시 오딧세이.

휘트 선데이 제도로 큰 크루즈쉽이 오면 우리 회사에서 외주 액티비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다. 크루쉽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리프 폰툰으로 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스노클링을 시켜주고 다시 크루즈 쉽으로 데려다 주는 상품이다. 외주 계약이다 보니 고객 만족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투어 프로그램들보다 고객 서비스 만족 측면에서 좀 더 신경 쓰는 것 같다. 시작하기 전부터 팀 리더가 우리의 고객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자고 동기부여 하는 일장연설을 했다.


밀포드에서부터 다양한 팀 리더를 만나고 그들을 관찰하면서, 내가 팀 리더가 된다면 과연 어떻게 팀원들이 열심히, 행복하게 일하게 동기 부여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도 저런 연설을 할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인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친구일 수도, 온전히 보스일 수도 없는 중간 실무 관리자의 위치. 확실히 알게 된 건, 모든 팀 리더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언제나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까.

지금까지 나는 항상 팀원의 역할만 했지만 언젠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로 가게 된다면 어떤 리더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내가 팀장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또 시작이다. 그 고생을 하고 막상 산에 올라와 보니, 이 산이 아닌가벼, 하고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나. 대체 언제까지 이 산, 저 산, 기웃거릴 거야?





아침에 출근해서 다른 투어와 다름없이, 보트 점검하고 음식과 비품들을 싣는다.

그런데 출근 시간이 5시 반이다. 너무 졸리다 정말. 지금까지 6시, 6시 반, 7시 출근을 해 봤는데 5시 반 출근은 처음이다. 만약 페리에 배정되면 5시 15분까지 출근이란다. 강제로 아침형 인간이 되고 있다. 놀랍다. 9시까지 출근도 힘들어하던 내가 새벽 5시 반에 출근하고 있다니.


이게 가능한 이유는 밤 10시 전에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일하다 보니 앉아만 있는 사무직일 때보다 잠도 잘 온다. 불면증 같은 것이 싹 사라졌다. 도시에 살 때는 10시는 자러 가기 참 이른 시간이었는데. 언제나 올빼미형이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사실은 아침형 인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때보다,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고 활기차다. 신기하다.



밀포드에서도 이런 크루즈십 트랜스퍼가 몇 번 있어서 가까이 가본 적이 있다. 휘트선데이에서 만나는 크루즈선도 역시 엄청나게 커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위용에 압도된다.

배 탑층에는 심지어 워터 슬라이드도 있다. 대체 이런 배는 어떻게 모는 건지, 어떻게 이런 거대한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언제나 놀라운 것은 이런 거대한 배도 밧줄 몇 개로, 닻 하나로 정박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를 ‘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크루즈 쉽에 도착하고 나서도 크루즈 선과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스탠바이만 30분이 넘도록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손님 맞이가 시작된다.

사람들을 태우고 나서는 매번 폰툰 트립에서 하던 일과 같았다. 모닝 티 준비하고, 스노클링 진행하고, 점심 먹고. 하지만 100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을 케어하는게 훨씬 즐거웠다. 크루즈 선 고객 뿐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승객들이 휘트선데이 제도라는 정말 아름다운 곳에 놀러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들 행복해 한다. 행복한 사람들과 행복한 상호작용을 하는 긍정적인 사이클이랄까. 휴양지에서 즐겁게 일 할 수 있게 되는 큰 요소 중 하나다. 세계각지에서 온 손님들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제 내 영어 악센트는 한국+미국+아일랜드+뉴질랜드+호주가 뒤섞여 사람들이 내가 어디 사람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에일리비치는 정말 좁기에 나중에 라군이나 식당, 바에서 언제나 알아보고 인사하는 손님들이 있는 것은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 전에는 서비스직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친절하게 해도 불친절한 태도가 되돌아 오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상대방의 기분나쁜 태도는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이고, 자신의 불행함을 남에게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의 부정적 감정을 굳이 내가 흡수할 필요는 없다. 무례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세상 어딜 가나 있다. 그런 사람들과 교류해야 하는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는 존경한다.





손님들을 다시 크루즈 선에 내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크루즈 여행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한때는 나도 대형 크루즈를 타고 가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런데 함께 배에서 일하는 대부분 크루들은 대형 크루즈 여행이 너무나 재미 없을 것 같다고 했다. 현지 투어 몇 번 하는 것 외에는 제한된 공간에서 몇 주씩 머무르는게 뭐가 재밌냐고.

듣고 보니 그렇다. 그래서 대형 크루즈 여행은 은퇴한 사람들이나 가는 거라고 말하는 걸까.



대신 호주/뉴질랜드 출신 친구들은 보트/요트 여행을 해본 친구들이 많기에 다양한 경험과 루트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다. 그러다 크루즈와 환경파괴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대형 크루즈선은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환경 파괴의 큰 주범이다. 사용하는 기름 뿐 아니라, 바다에 배출하는 오염물질, 쓰레기와 그것이 퍼트리는 소음까지.


그렇게 따지면 데일리 투어도 만만치 않다.

밀포드에서든, 휘트 선데이에서든, ‘지속 가능한, 친환경적인’ 투어를 광고하지만 엄청난 쓰레기를 배출해 냈다. 쓰레기통을 비우면서 나오는 하루 수백개의 플라스틱 비닐봉지. 일회용 용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매일 산호초로 데려가 산호초 파괴에 일조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관광’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폰툰과 보트 트립 포인트들에 몇번 직접 스노클링을 하러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미 내가 몇 년 전에 방문했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가 아닌 느낌이었다. 백화현상은 정말 심했고, 그동안 가본 곳들에 비하면 산호숲은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그 동안 엄청나게 파괴되었다는 것이 절로 실감났다. 이미 개별 여행자들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가 있는 동부가 아니라 호주 서부의 덜 관광지화 된 산호숲을 보러 떠난다고 했다.


색깔이 사라진 산호숲에서 모래를 뒤지고 있는 거북이들을 보니 슬퍼졌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야말로 자연에게는 메뚜기떼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우루루 몰려가는 장소마다 완전히 황폐화 시켜버리는 메뚜기떼.

관광산업은 미래에 어떻게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까. 과연 대규모 관광업과 현지 문화/자연 보호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소규모의 예약제로? 그렇다면 결국 돈 많은 사람만 여행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지속 가능한 관광업’을 가능하게 할까.






쉬는 날이면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의 차를 얻어타고 근처 해변으로 놀러간다.

야생 캥거루를 해변에서 볼 수 있다는 케이프 힐즈버러 cape hillsborough 국립공원은 밤새 차를 몰아 해 뜨는 시간에 맞춰 간 보람이 있을 만큼 놀라운 해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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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네틱 아일랜드에서는 바비카라는 장난감처럼 생긴 차를 렌트할 수 있고, 야생 코알라와 바위 왈라비들을 볼 수 있다. 야생 코알라는 나무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별로 구경하는 재미는 없었는데, 대신 코알라 보호센터에서 자동차 사고로 인해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코알라를 직접 안아볼 수 있었다. 실제 코알라는 귀여운 인형과 달리 발톱은 굉장히 길어서 아프고, 냄새도 심하다. 호주는 한국에서 비둘기들을 보듯 너무나 흔하게 야생 앵무새들을 볼 수 있다. 가끔씩 가까이 오는 새들이 너무 이국적이라 깜짝깜짝 놀란다.


한번은 회사 복지 혜택을 활용해 무료로 카미라 투어를 갔다. 일하러 온 것이 아닌, 놀러 간 화이트헤븐 비치는 꿈만 같이 아름답다. 다시 한번, 내가 이곳에 살고 있고, 이곳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전만 해도, 내가 매일 곳으로 출근하게 될거라고 누가 나에게 이야기해 줬어도 못믿었을 거다.

정말 멀리까지 왔구나. 내가 상상조차 없던 삶으로.



놀러갔다 와서부터 본격적으로 창밖으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

얼마나 세차게 내리는지 빗소리 때문에 켜놓은 음악 소리가 안들릴 지경이다. 비가 내리는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는 오히려 무섭고 나를 더 외롭게 만든다.

어떻게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게 3,4일동안 계속되는데도 어디서 여전히 비구름은 몰려오는 걸까. 이정도 퍼부었으면 더 이상 내릴 비도 없을것 같은데. 줄기차게 다음주까지 쏟아진다고 한다.

장대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에일리비치로 연결되는 길들이 다 잠겼다. 비행기고 버스고 배고, 오갈 수 없는 지경이다. 습기가 가득차서 방에 에어컨을 켜도 이불은 눅눅하고, 나무 스탠드에는 곰팡이가 피고, 이거 뭐 침대를 짜면 물 나오게 생겼다. 보송보송하고 바삭한 마른 햇볕이 그립다 ㅠㅠ



여름이 우기라고 했는데 이렇게까지나 심하게 우기일 줄 상상도 못했다. 비가 내리면 이곳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수영과 선탠을 못한다. 방안에 쳐박혀 책보고 영화보고 글쓰고 그게 끝.

거기다 계속 일은 스탠바이만 하다가 취소되고, 수입은 점점 떨어지고, 나는 우울해진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장 봐와서 삼시세끼 요리해먹고, 글 조금 끄적이고, 미드 보고, 책 보고, 심심하면 요가 좀 하고, 그렇게 반 백수의 삶이 이어졌다.



계속 투어가 취소되어 그러려니 하고 내일도 취소 되겠지 하고 있는데 의외로 취소 된다는 문자가 안왔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어떻게 투어가 진행된다는 거지. 걱정스러웠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주섬주섬 출근준비를 했다. 다행히 같이 일하는 몰리와 택시를 셰어해서 가기로 했다. 우리 둘다 비에 젖은 생쥐꼴이 되어 보트에 도착했는데, 캡틴이 음 저기..하면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투어 캔슬 됐고, 그래서 (몰리와 나같은) 캐주얼 계약직은 다시 집에 가야 한다는 거다. 그래도 택시비는 정산해 준다고 했다. 기운이 쫙 빠졌다.


안 그래도 비맞고 출근한 김에 리조트에서 일하는 친구가 준 공짜 조식 티켓을 쓰러 갔다. 사실 나는 조식에 대한 감흥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조식-continental breakfast-라 해봤자 빵, 시리얼, 우유, 주스, 과일, 커피, 베이크드 빈, 베이컨, 시금치 같은 데친 야채 몇종류에 계란 요리해주는게 기본인데 이름만 거창하지 집에서 먹는 아침이나 다를게 없다. 그 놈의 콘티넨탈 브렉퍼스트 몇 번 먹다 보면 지긋지긋하다. 아침에 속 편한 밥과 국이 생각나는 나는야 토종 한국인.


조식 자체보다는 공짜 브런치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야외에서 쏟아지는 비를 감상하면서 같이 수다 떨 친구도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몰리와 크루즈 휘트 선데이에서 일하는 것, 호주에서 워홀러로 사는 것 등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정했다.




안정적인 대기업의 정규직을 박차고 나와서 난생 처음 일해본 계약직.

정확한 스케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안정적인 수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한 라이프 스타일인지 알게 되었다. 스케줄이 왔다갔다 하니 꾸준히 어디 참석할 수도 없고, 수입이 불안하니 꾸준히 돈을 모으거나 투자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끔찍하게 지루하다고 여겼던 9-6/월-금 의 평범한 워킹아워가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튼튼한 기반을 꾸준히 마련하는 데는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에일리비치의 작은 커뮤니티가 숨이 막혔다. 답답한 사람들이 싫어 서울과 상해를 떠나 왔는데, 오히려 작은 시골 마을로 오면서 당연하게도 더 답답한 사람들을 만난다. 사실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문제다. 답답하게 느끼는 '내'가 문제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 이 나에게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내가 답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착하지 않고 여행하는 사람들이니까. 그저 내가 아직 정착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일 뿐이다.




막상 그만 두려니 또 아쉽다.

이 일자리를 확실히 구하기 전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난생 처음 이력서 10장을 프린트해서 용기 내서 가게마다 들어가 이력서를 건네기도 했다. 거의 리조트 청소부가 될 뻔도 했다. 사무직을 관두고 나서야 지금껏 나는 쓸 만한 기술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커피도 내릴 줄 몰라(까페 알바 탈락), 칵테일도 만들 줄 몰라(바 알바 탈락), 김밥 쌀 줄도 몰라(스시집 알바 탈락), 공연을 할 만한 실력이 되는 것도 없어(라이브 까페 알바 탈락), 네일 아트도 못해(네일 알바 탈락).거절, 거절, 연락 두절. 온통 닫힌 문 뿐이었다. 나는 참 공부만 하고 살았네.


그러고보니 만약 크루즈 휘트선데이가 아니었다면 해밀턴 아일랜드 코알라 까페에서 일한 뻔도 했다.

해밀턴 아일랜드에 들어가서 살고, 코알라도 보고, 까페에서 일하고 괜찮지 않을까 해서 심각하게 크루즈 휘트선데이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거기다 코알라 까페 인사 담당자는 친절하고, 일처리도 빨랐다.

하지만 해밀턴 아일랜드로 이사해야 하고, 비싼 숙소비와 이사 비용에 추가로 와이파이가 안된다는 말까지 듣고 못 가겠다고 했었다. 만약 그 때 해밀턴으로 갔다면 나의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졌지 모르겠다.



호주나 뉴질랜드로 와서 결국 정착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아니, 정착하려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만약 내가 호주에 살고 싶으면, 여기 적어도 일년 이상 머무르면 정말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커뮤니티에도 더 스며들게 될 것이고, 결국 잘 살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호주에 정착할 생각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십대 초반의 백패커들처럼 경험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돈 벌고, 여행하는 것을 반복하며 살기에는 이미 서른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초조하기만하다.


집에 돌아가 켈빈에게 전화해서 다음주까지만 일할거라고 말했다.

내가 확실하게 원하는 것을 나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확실하게 원하지 않는 것은 안다.

그래서 고생해서 올라온 이 산을, 나는 미련없이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야, 다른 산에 올라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