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이 서른 넷, 국제 NGO 본부 취업
대학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2년 반동안 일 한 후 퇴사했다. 그 후부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일년 벌어 반년 여행하는 수준으로, 거의 재정 안정도 0인 상태로 20대를 보냈다.
모은 돈은 없지만 대신 여러 나라를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과 라이프스타일을 접하면서 대신 뚜렷해진 것은, 내가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는지, 어떤 공부를 더 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내 자신의 만족과 어떤 일에 있어 의미 부여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쉬운 과목을 선택하라고 해도 그 과목이 재미가 없어보이면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쉬운 과목을 선택해서 그놈의 점수 좀 더 잘 받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성적 좋으면? 취직할 때 도움이 되겠지. 취직 하면? 돈 모아서 결혼 하겠지. 돈 모아서 결혼하면?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가..? 나에게 있어 취직은 재정적 자립 그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주지 못했다. 성적 받기가 쉽지 않대도 차라리 현재 내가 관심있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의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 충실한 인간답게, 인간의 최종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취업에서 찾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성인은 일하면서, 직장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니까, 나의 삶의 대부분인 시간이 의미있는 시간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모두가 그건 헛된 꿈이라고 말했다. 그런 이상적인 삶은 없다고, 일은 일이고, 직장은 직장이고, 다들 '자아실현'은 '취미'로 하는 거랬다. 하지만 그렇다면 하루에 거의 한두시간만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건데, 그건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간간히, 가뭄에 콩나듯 덕업일치가 된 사람들, 혹은 적어도 자신의 적성과 일이 맞고, 직장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보면 분명히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긴 하는 것이었다. 말도 안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했다. 이상적인 소리 하지 말라고.
뭐라 변명하든, 결국 나는 이상을 쫓다가 일반적인 사회 조직에 적응하지 못해서 떠나는 실패자, 패배자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퇴사할 때, 다들 나에게 그런 짧은 경력으로는 이 정도 직장에 다시 들어올 수 없을 거라 했다. 커리어 텀을 두지 말라고도 했다. 이리저리 옮겨다닌 경력이 많으면 또다시 퇴사할 가능성이 높은 프로 퇴사자로 보일거고, 그래서 가면 갈수록 입사가 어려워질 거라고. 내 나이는 말할 것도 없다. 혼기가 꽉 찬 (넘은) 나이의 미혼여성.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적으로 취업이 안될 거라 했다. 타투도 절대 안된다고 했다.
취업이 안될거라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내가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안뽑고, 혼기가 찬 여자라서 안뽑고, 타투가 있어서 안뽑는다는 조직에는 나도 들어가서 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다들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뒤돌아 혀를 차는게 느껴졌다. '쟤는 취직 못해서 결국 나중에 까페 차린다고 하게 생겼구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문화적 차이를 연구하고, 사람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공부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 세상의 차별과 불공정을 줄이고, 사람들끼리 더불어,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무슨 공부해서 어디 취직할거냐 물어봤는데, 아이티 기술 공부해서 구글 들어간다는 말은 안하고 한다는 말이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라니.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건데? 라고 물어보면 나도 답을 모른다.
엄마가 나에게 그랬다. 너는 정말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고 있구나. 그래서 어째 취직이 되겠냐...?
내가 공부한 내용 중에, 어떤 조직에서 최대한 '공정하게', '다양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인성,배경,나이,학력, 인맥이 아닌 오로지 직무수행능력 평가에 기반한 리크루팅을 해야 한다 했다. 현재 내로라 하는 글로벌 대기업들은 다 그렇게 프로세스를 바꾸고 있다.(고 광고한다) 오히려 비슷한 사람들만 뽑는게 아니라 좀 다른 사람을 뽑아야 다양성에 기반한 창의성이 발현된다고 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내가 가능성이 있다 생각했다.
해외에서 취직한다면 나는 '한국인'으로 좀 다르니까. 한국 회사보다는 외국계가 그래도 나에게 조금 더 오픈마인드 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나는 현지 취업을 노렸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구직 활동을 하면 할 수록 진정으로 오픈 마인드인 회사는 없는 듯 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니즈에 맞지 않았다. 여전히, '조직원'이 되기에는 나는 너무 튀는 사람인 듯 했다.
구직 중 여기저기 서류를 넣고 인터뷰를 보면서 또 느낀 것은, 한국회사건, 외국계건, 입사하고 일하는 상상만 해도 나는 여전히 숨이 막힌다는 것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이제 좀 장기적으로 머무르고 싶은 곳을 찾고 있는데, 어떤 곳이든 나의 장기 근속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오로지 1순위인 조직을 위해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기업이 아니라면 대체 나는 어떤 조직에서 일할 수 있는가. 정부기관? 국제 단체?
정부기관이나 유엔같은 국제 기구도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나는 나의 생각을 마음 대로 펼칠수도 없는 관료주의적인 조직에서도 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곳, 출근을 안해도 일만 잘하면 되는 곳, 디지털 노마드로도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반복적인 업무가 아니라 내가 공부한 분야를 활용할 수 있는 직업. 그것이 내가 찾는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했다.
돌아오는 답은? 얼씨구. 꿈 깨라.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빨리 정신차리고 한국와서 영어나 가르치라고 했다. (아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다는 거겠지) 요즘 세상에 결국 외국에서 석사까지 따 봤자 백수나 될거야.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 내가 공부한다고 하니까.
그건 끊임없는 의식적인 선택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계속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지 말고 믿지 말자는 선택.
어차피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아는 사람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내가 스스로 포기하든 하자고.
사실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내가 백마탄 왕자보다 더 말도 안되는 이상적인 것을 바라고 있다는걸.
무언가 괜찮은 직장이 나올 때마다, 지원을 하긴 했는데 100% 마음에 드는 포지션들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 나의 발목을 잡는 조건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직무가 아니라던지, 조직이 아니라던지, 연봉이 맞지 않다던지 하는. 해외 취업을 하려니 취업비자조차 발목이었다. 누가 '외국인'인 나를 고용해 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취업은 마치 연애와 같아서 모든 조직에게 러브콜을 받을 필요도 없고, 나를 알아보는 단 하나의 직장만 찾으면 된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도 중요한 것 같다.
분명히 어딘가엔,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을 거라는 믿음.
가장 어려운 것은 그렇게 내 스스로가 나를 믿고 인정할 만큼의 실력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는, 애매했다. 한편으로는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그냥 싼값에 팔아 넘기는 것 - 인턴이나 신입으로 들어가는 것 - 까지 고려했다.
희망고문과 거절의 반복에서 반쯤 포기하고 박사 과정으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 내가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서 러브콜을 받게 되었다. 내가 원하던 조직, 내가 원하던 직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첫번째 두번째 인터뷰에서, 이미 나와 우리 팀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나는 국제 NGO 본부에서 내가 원하던 분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던 커리어의 스타트라 이미 행복한데 거기에 100% 재택근무에 자율근무제이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곳.
난생 처음으로, 장기적인 미래까지 떠올리는게 가능한 일을 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출근하지 않는다. 물론 아직 허니문 시기이고 충분히 다가올 챌린지들이 예상된다. 재택도 나름 단점이 있고 자율근무라고 해서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일을 더 많이 해도 티가 전혀 나지 않아 과로하기 딱 좋은....) 모든 조직에 존재하는 (거대 조직일수록) 문제도 보인다.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행복하다.
자신의 일이 너무 행복하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성공했다.
내가 20대부터 찾아 헤매던 것은 내가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나의 일 이었다.
그 모든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버텨내고, 누가 뭐라하건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당신의 비전이 확실하다면, 그 가능성에 미래를 걸고 버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찌됐건, 남들이 봤을 때 뜬 구름 잡는 것처럼만 보여도, 자기가 뭘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 '구름'을 정말 잡기도 한다는걸, 날 보고 믿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