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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Oct 30. 2022

지겹고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 - 영화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참 마블 영화 때문에 멀티버스가 뜰 때, 이 영화가 나왔다. 예고편은 흥미로웠지만 멀티버스에 조금 질리기도 했고, 리뷰들을 보니 왠지 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처럼 멀티버스를 다 살아봐도 결국 현재 인생만한 것이 없다, 라는 식상한 주제로 결론이 날 것 같아 보는 것을 미뤘다.

저녁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심심해서 팝콘 무비로 볼까 하고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는데, 감히 내 기억에 오래 남을 손꼽히는 명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영화였다. 후에 찾아보니 이동진 평론가도 별 5개를 줬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봤든, 나는 영화 후반부부터 엄청 울었다. (슬픈 영화도 아닌데!) 나를 이렇게 엉엉 울린 영화는 또 오랫만이었다.



영화는 멀티버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봤을 때 멀티버스는 영화를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장치일 뿐, 실제로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에블린은 이민 1세대다. 중국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절연도 불사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쫓아 재능도 버리고 미국으로 왔다. 남편과 함께 그렇게 문화도, 언어도 낯선 곳에서 코인 세탁소 윗방에서 살면서 지금껏 세탁소를 운영해왔다. 그 세탁소로 딸을 대학까지 키우고, 아픈 아버지까지 중국에서 모시고 와 산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이는 중년을 훌쩍 넘겼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남은 것은 병든 아버지 수발, 여전히 철없고 실없어 보이는 자신을 속터지게 하는 남편, 대학을 자퇴하고 남자가 아닌 여자친구를 사귀며 전화도 안하고 맨날 반항만 하는 딸, 그리고 낡아빠져가는 코인 세탁소와 세금 계산이다.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했고, 연기의 꿈도 꾸던 에블린은 코인 세탁소에서 손님 응대하느라 청춘을 다 보낸, 이룬 것 하나 없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허무함을 느낄 새도 없이 에블린은 바쁘다. 장사, 세금계산, 요리 등등 닥치는 일을 해결하면서 사느라 마음의 여유는 한 치도 없다. 



나는 이민 2세가 아니지만, 이민 2세 친구들이 많이 있고, 서양권에 사는 아시아계 이민자 문화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어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에블린 가족의 모습이 상당히 공감갔다. 모국어를 하면서도 영어를 섞어  대화하고, 어느정도까지 대화는 되지만 그래도 완벽하지 않은 영어에 자식들의 통역이 필요한 상황. 현지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모국어를 잘 하지 못할 뿐더러 부모와 문화적 장벽도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중국어로 한두마디씩 비밀 대화 하는 것(이 손님은 코가 커 등등), 여전히 집에서 중국 음식 해 먹는다든지 전통명절을 지내는 것, 돈 아낄려고 필사적으로 각종 비용을 비즈니스 비용으로 처리하는 것(노래방 기계도 사업 용도로 샀다구요..?) 같은 소소한 장면들을, 하나하나 다 신경 쓴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우리 가족은 이민자 가정이 아닌데도 에블린네 가족과 겹쳐 보였다.

우리 집도 동네 장사를 하는 집이라 엄마는 항상 가게에 얽매여 있고, 항상 문제는 일어나고, 무언가를 고쳐야 하고, 손님 응대를 해야 하고, 세금으로 골머리를 싸맨다. 우리도 가게 위에 살아본 적이 있다. 받은 것이 그다지 없어도 친 할머니, 외 할머니 두분 다 모셨고, 아이들은 머리가 컸다고 사춘기때부터 속을 썩였고 엄마와 싸웠다. 이런 겹쳐보이는 부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에블린의 현 유니버스에 공감하다가, 다른 유니버스에서 온 남편을 만나면서 에블린은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유니버스' 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멀티버스들을 위협하고 있는 악당과 싸워야 하는데, 문제는 그 누구도 악당이 누군지, 왜 현 에블린을 찾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짐작하긴 했지만 에블린의 악당은, 바로 딸이었다. 에블린의 모든 멀티버스를 위협할 만한 심각한 문제는, 세금도 아니고, 가게도 아니고, 늙은 아빠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바로 '딸'과의 갈등이다. 

그리고 악당의 모습을 한 딸은 에블린을 찾아내어 암흑의 베이글을 보여준다. 웃기게 표현되긴 했지만, 그 베이글은 사실 모든 유니버스를 다 경험한 딸이 모든 것을 다 모아서 만들어 낸, 블랙홀이었다. 

내게는 이 블랙홀 베이글이 의미심장한 비유로 다가왔다. 냉소, 허무, 이 모든 것의 무의미함.

이 삶도 가보고, 저 삶도 가봤는데 결국 아무것도 의미 없어. 열심히 살면 뭐해? 결국 모든 것은 캄캄한 어둠같은 죽음일 뿐이야. 열심히 살았잖아. 엄마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배우가 되었더라도, 요리사가 되었더라도, 피자 광고판 돌리는 사람이 되었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의미없는 거지. 인간은 다 죽으니까. 


무의미한 삶의 끝은, 자살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사람은 죽는다. 

그렇게 딸은 돌이 되는 삶을, 그리고 블랙홀을 선택한다. 



에블린은 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딸이 말하는 무의미한 인생이 맞다. 최선을 다해 매 순간 내린 선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이루겠다고 달려온 인생이 결국 코인세탁소 아줌마로 끝난 것을. 


하지만 에블린에게는 다행히 실없고 긍정적인, 남편이 있었다. 남편은 여기저기 눈알을 붙여서 물건들을 웃기게 만들고, 손님들과 춤을 추는 그런 사람이다. 아마 그래서 에블린은 남편과 사랑에 빠져 미국에 올 생각까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냉철하고 치열하지 못한 남편의 생활력이 좀 더 딸렸을 것이고, 그래서 아마 에블린이 앞장서 깃발을 세우고 끌고 가면서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되었겠지. 그러면서 남편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지고 이제는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그런 남편이 심각한 전쟁터에서까지 어이없게도 가운데 끼어들면서 '왜 싸워요ㅠ 우리 서로 친절하게 지내요!' 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답답하다고, 이상적이라고, 어이없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태도가 사실은 이렇게 무의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아보려 했던 그 나름의 시도 라는 것을 에블린은 여러 유니버스를 통해 깨닫게 되고 그 순간 눈알 스티커가 에블린의 미간에 착 붙으면서, 에블린은 소위 말하는 제 3의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것들.

사실 많은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은, 그들만의 개인적인 문제에 기인하고 있으니 그렇게 너무 비장하게 온 세상과 싸울 필요 없다는 것. 

다들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간다. 강아지라든지, 향수라든지, 심지어 독특한 성적 취향에도.

손이 소세지라면,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 발로 서로를 만지면 된다.

절대 말이 안통할 것 같던 세금 공무원과도 사실 '대화'를 하면 된다.  

친구의 너구리를 감옥(?)에 보내버리는 것 같은 큰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를 구하고 그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삶의 무의미함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에블린의 그 모든 삶들도 쓸모 없는, 무의미한 삶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삶의 능력을 다 사용해서 현재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에블린은 딸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자신의 아버지와의 문제를 마주한다.

마음 깊은 곳에 에블린 또한 자식으로서 자신의 부모에게 맺힌 한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연을 끊겠다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있어요? 그 이면에는 나를 그 정도밖에 사랑하지 않느냐는 여전히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테다. 

절대 한번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그 상처를, 아버지에게 쏟아내고 나서야, 아버지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에블린은 블랙홀로 들어가는 자신의 딸을 붙잡을 수 있게 된다.


에블린은 딸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 모든 멀티버스를 지나 네가 여전히 나를 찾아 이 베이글을 보여주려고 한 이유는, 내가 너의 엄마이기 때문이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고 싶었던 인정과 사랑을, 딸도 자신에게 받고 싶어한다. 동시에 딸은 딸대로 자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실패자'로서 엄마의 '무의미한 삶'에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의미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보인다.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하면서 블랙홀로 들어가는 딸을, 에블린은 따라 들어가지 못하지만 여전히 그 곳에 서 있다. 


그렇게 인생은 무의미한 거라고, 자신만만하던 딸이었지만, 그도 블랙홀로 들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손을 내민다. (잡지 말라고 외치면서 내심 잡아주길 바라는 그 모순적인 감정이랄까) 

그리고 에블린은 기다렸다는 듯 딸의 손을 잡고 끌어낸다. 에블린의 힘이 부족하자 남편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합세하여, 온 가족이 딸을 끌어낸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가장 본능적인 문제,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치 에블린 딸처럼. 나만이 아니라 모든 자식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인 것 같다. 부모는 에블린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자식이 세상을 파괴할 악당이라 해도 절대 죽이지 못하고 끝까지 편을 들만큼 대부분 그렇게 깊게 자식을 사랑하지만, 언제나 그만큼 표현되지 못하고 서로의 마음은 엇갈린다. 


하지만 에블린의 인생이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딸이고, 나머지 이유들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기인한다. 결국 무의미한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인가보다. 

가족, 친구, 연인, 이웃. 아무리 소소하고 소박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서로 순간순간 키스하고, 안아주고, 까르르 웃고, 수다 떨고 하는 순간순간들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엉엉 울었던 이유는, 내가 블랙 베이글을 생각할 때가 떠올라서였다.

나도 한창 삶의 무의미함에 빠져있을 때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안으로 너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붙잡을 사람은, 우리 엄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면, 엄마도 함께 뛰어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도록 하는 나의 힘이었다. 

"내 삶은 의미없지 않아. 네가 있잖아." 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있는데 어떻게 내 삶이 무의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모든 멀티버스에서 어떻게 펼쳐지든, 당신의 모든 삶은 전부 의미있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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