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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Aug 18. 2022

닥치고 일만 하는 아시안이고싶지 않아

해외취업과 직업의식


오랫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일년 전 시골마을로 귀촌한 부모님 집에서 한국 남도 시골의 푸르른 여름을 만끽하는 중.


요즘 두 분은 마을 협동조합에 가입해서 소일하고 계시는데, 추석을 한달 앞두고 추석 선물로 판매할 청국장 포장 때문에 이번 주말 내내 일만 하고 오셨다.

하루종일 앉아서 포장 상자 접고, 스티커 붙이고, 장을 용기에 담는 일을 하시고 오셔서 녹초가 되었다고 드러누워버리셨다.


그러니까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일했어, 살살 좀 하지, 라고 타박하자 

"옆 사람 속도 맞춰서 일한다고, 그 속도 따라가야 되니까 나도 죽어라고 했지! 

내 속도 느려서 폐 끼치기 싫고, 일 못한다는 소리 듣기 싫고."

라고 대답하신다. 


맞다. 기억난다. 한국 사회생활속의 무언의 압력. 

눈치껏 행동해라.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마라.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의 진을 쪽쪽 빼게 만들어 앓아 눕게 만들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어쩌면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빨리 발전하고, 잘 사는 건지도 모른다.

'팀'이, '리더'가 캐리하는 것을 죽어라고 손발 맞추어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해내는 것' 이다. 

하지만 이렇게 협동조합 일처럼 단기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일인가...?








한국에서 살 때는 당연한 일인줄 알았다.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가,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당연히 나의 몸과 마음을 바쳐, 최소한의 시간 내에 최대한의 효율을 내며, 

내가 이 조직의 '짐덩이'가 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면서 

'일잘러'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번아웃 따위는 몸과 마음이 약해 '버티지 못한' 사람들의 변명으로 치부당했다. (아직도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생각하심...)



처음으로 호주,뉴질랜드에서 일할 때, 나는 같은 자세로 임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배워서 '신입'이라는 '짐덩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새로온 사람이 일 잘한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고, 초짜라는 눈칫밥을 먹기도 싫었다.

거기다 나는 외국인이니, 더 잘 해서 잘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입사 동기들과 비교해 보니, 현저히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현지 외국 회사, 입사 동기들도 다 현지인.)


나 혼자만 동동거리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느낌에,

잘하니까 점점 나에게 일은 더 몰려오고,

나 혼자만 잘 하려고 스트레스 받는데 

월급은 같고

오히려 나는 뒤에서 '역시 조용히 일 잘하는 아시안이야' 라는 말이나 듣게 된게 아닌가.

아놔. 

이게 아닌가.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바탕인 서양문화권과, 집단주의적인 문화가 바탕인 동양문화권에서는 

정말로 기본 마인드부터가 다르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가 기본이다.

물론 열심히 해야지, 라는 생각은 하지만 굳이 나 자신을 피곤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지치게 하면서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같이 일 할 때 남들이 8을 하면, 

내가 5를 할 수 있다 해도 어떻게 해서든 적어도 7까지라도 하려고 하는데, 걔네는 딱 5까지만 한다. 

매니저급에서도 8까지 하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8을 하면 칭찬하는게 아니라 걱정한다. 그러지 말라고. 과도하게 하다가 문제 생긴다고.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해고'를 더 어렵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다 같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한, 한 팀의 '가족'이니까. 

외국에서는 5까지 하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고 냅두다가도 사정없이 해고 통보를 해 버리기도 한다.

확실한 개인플레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내가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천천히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을 더 중시 여기고, 말 그대로 '행복하게' 회사를 다닌다. 

뭐하러 '피똥 싸면서까지' 열심히 해?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뭔데?

잘 살려고 일하는 거 아니야? 

일하느라 잘 못 살면, 그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거지. 라고 말한다.


소위 말하는 현재 우리나라의 MZ세대의 마인드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어린 애들이 '서양 물'들었다고.

하지만 집단주의적인 문화에서 워낙 개인이 갈려나가는 것을 보고, 

세계화 시대에 다른 문화권에서 온 다른 가치와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사회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냐, 

팀의 성과가 우선이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는

동양 문화가 옳냐 서양 문화가 옳냐를 논하는 토론처럼 답이 없고 무의미하다.

어느 면에서는 둘 다 옳고, 

어느 면에서는 둘 다 그르니까.






내가 눈치껏 행동하는 것 조차 타박받을 일이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이불을 개는데 한명이 왼쪽을 잡으면, 

멀뚱히 서 있는 나는 당연히 달려가서 오른쪽을 잡아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내가 달려가서 오른쪽을 잡았더니 뭐라 한다. 왜? 

'말'을 안해서.


서양 문화권에서는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

왼쪽을 잡은 사람이 나에게 오른쪽을 잡으라고 말을 하든가,

아니면 내가 먼저 오른쪽 잡을까? 물어보든가 

아니면 오른쪽 잡을게, 라고 말을 하고 시작해야 한다.

말 없이 눈치 코치로 손발이 척척! 

같은 논리는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만 통한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우리가 대화를 하지 않으면 너와 내 생각을 어떻게 아느냐, 의 논리를 따라가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것 조차 대화와 의논을 해야 한다.


또 부당하게 여겨지거나 왜 이렇게 하는지 이해가 안가는 것은 당연히 물어보고,

이렇게 하는게 어떻냐고 자신의 생각을 내는데도 거침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신입이 어떻게 감히 '원래 그렇게 해오던 일'에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다 경험상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하라,는 말이나 듣기 일쑤인데

외국에서는 다 설명을 해 주고 납득을 시킨다. 

심지어 그 이유가 '나도 이해가 안가는데 그렇게 해 왔어' 더라도, 

덧붙여 '신입인 네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봐!' 까지 오픈을 해 준다.



이런 면에서는 수직주의와 연공서열과 같은 유교/군대 위계질서 문화가 없다는게 확 와닿고,

어찌보면 민주주의와 토론의 문화의 시작이 여기서부터구나, 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반대로 우리 식으로 보면 참으로 비효율적이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일일히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고 토론해야 하니까.



나는 한국 회사와 사회 생활이 너무 답답해서 뛰쳐나온 만큼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 자신했는데

막상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사회생활을 해 보니 

나는 참으로 집단주의적 문화가 뼛속까지 배인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다.




뭐 그거야 이렇게 배우고 적응하면 되는데, 

내가 짜증나는 건 '일 잘하는 조용한 아시안'이라는 타이틀이다.


함께 5를 할 신입이 7, 8까지 해내면서 폭주(?)하면 동기 입사생들은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쟤와 '우리'는 틀리다,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쟤'는 '아시안'이라 일을 잘한다, 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쟤의 기준을 우리한테도 적용시키기 말라는 의미에서.


거기다 내가 일하느라 수다도 덜 떨고 (그리고 언어가 딸려서 소극적인 태도라면) 

이건 왜 이렇게 해요, 저한테 왜 이 일 시키세요, 이건 제가 하는 일 아닌거 같은데요,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국에서 하던 방식으로 시키는 대로 다 하니, '조용하다' 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원래 부터 존재하던 스테레오 타입도 한 몫 한다.

아시아계 사람들이 대부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조용하고,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와서 대개 집단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하는 스타일이고, 근면성실을 무기로 열심히 일하니(타국에서라면 얼마나 더 '열심히' 하겠는가) 서양권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조용하고 일 잘한다' 고 판단지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스테레오 타입이 역시 맞다는 증거가 되고 싶지도 않고,

일 시키기 더 편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가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뭐 노예도 아니고.

그래서 더 이상 일 잘한다고 인정 받고 싶지도 않아졌고

오히려 차별에 예민해졌다.

매니저들이 동아시아계한테는 8, 9까지 바라고 일을 시키면서 

서양애들한테는 5,6만 바라는 거다. 

다른 한국 애들은 왜 9까지 하는데 너는 현지애들처럼 5만 하냐. 이런 느낌이랄까.

뭔가 억울한데.



그래서 나는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다.

'눈치 보는' 내 특성을 살려 옆 사람 눈치 보면서 딱 그만큼만 하고 싶다. 

천천히, 여유롭게, 행복하게. 

딴 애들처럼 최대한 목청껏 내 의견을 말해 내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지 말고.

못할 때는 못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내 안의 한국인이, 여전히 나에게 '일 잘해서 이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가끔씩 한국 사람들과 일할 때가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내가 진짜 일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얼마나 똑똑하고 처리가 빠르고 일을 잘하는지, 나의 축 늘어져버린 일세포가 발끝부터 긴장하게 된다. 서양 사람들 틈에서 타성에 젖은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느끼는 자괴감. 나도 한국사람인데!




결론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으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지,

나에게 더 맞는 삶의 방향과 일의 가치관은 무엇인지.

외국 조직에서 일하든, 한국 조직에서 일하든, 어느 조직에 있든, 

어느 정도는 문화권에 맞춰야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

 


어느 정도는 눈치 없이 할 말을 하고, 어느 정도는 느리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싶다. 

어느 문화권에서 일하든,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람들은 진짜 나의 능력과 진심, 성격을 알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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