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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Jul 14. 2022

인생의 단짝을 찾아서

친구고 뭐고, 다 싫어 떠난 사람이 결국 사람 사이에서 행복을 찾다


요즘 나의 베프는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다. 우리 둘은 짝짜꿍이 맞아서 주말마다 만나서 같이 놀러다닌다. 한번은 걔가 틸부르흐에 와서 놀고, 한번은 내가 암스테르담에 가서 놀고, 이런 식이다. 엄마가 예전에 이야기 했던게 사실이었다. 자주 만날 수록, 오히려 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오랫만에 만나는 사람은, 혹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안했던 사람 하고는 서로 아는게 없으니 더 할 말이 없어진다. 




항상 예상치 못한 사람과 베프가 되듯, 내가 라셸과 베프가 될 줄 몰랐다. 라셸은 원래 같은 하우스메이트였는데, 내가 클라우디아라는 다른 하우스메이트랑 친해지면서 같이 친해졌다. 하지만 라셸은 내가 이사오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암스테르담에 운 좋게 집을 구했고, 그래서 우리는 더이상 하우스메이트도 아닌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달에 한번 정도는 꼬박꼬박 만났고, 그러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급속하게 친해졌다. 우리의 비슷한 성향에 놀라고, 비슷한 개그 코드로 수다 떠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사실 나는 큰 그룹 무리에서 어울리는 것도 굳이 원하지 않고,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에도 딱히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소수의,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깊은 관계. 네덜란드로 이사 온 후 이런 관계를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인정한다, 내가 그다지 노력하지 않기도 했다. 너무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 했달까. 자만추는 코로나 시기에 특히나 젬병인데 말이지. 코시국 낯선 곳에서 혼자되기 딱 좋다. 그래도 라셸 전까지는 나는 다른 베프가 있었고, 그 친구가 취직을 하고 멀리 살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질 시기 라셸과 친해지게 되었다. 물론 다른 친구들도 있지만 뭔가 ‘베프’라고 하기에는 온전히 마음이 맞지 않는다 느꼈는데 이렇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줄이야. 현재 내 근처에 있는 절친 한명에 간간히 친한 친구 둘. 그리고 멀리 살아도 간간히 연락하는 친구 몇. 이정도만 있어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나의 소박한 성향이 나를 쉽게 행복하게 만들지만, 이러한 나의 성향을 찾아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과거의 사회 분위기는 (지금도 그럴 수 있지만) 외향적이고 사교적이고, 발이 넓은 사람이 더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많은 친구들을 사귀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내 성향에 맞지 않게 하는 ‘노력’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었다.

처음에 많이 사귀어도 나중에는 결국 한 두명과만 친하게 지내는 나 자신을 탓했다. 내가 ‘인맥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모임에 다 초대받지 못하면 속이 상했다. 심지어 끼고 싶은 무리가 아닌데도! FOMO도 심했다. Fear Of Missing Out. 내가 빠지면 나만 빼고 중요하고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No를 말 할 줄도 모르는, 거절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나오라고 하면 나가고. 혹시나 내가 혼자 있는 동안 진짜 재미있는 일을 놓치면 어떻하지 라는 생각은 나를 더 ‘외향적’이 되도록 부추겼다.


그런데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모든 모임에 다 참석하는 건 너무 피곤했다. 나는 내향성인 사람으로, 남과 있을 때 에너지를 소모하고,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인데, 지금 돌아보니 대학생활에서 그리고 회사생활에서 항상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느라 언제나 방전된 상태였던 것 같다. 가족이건, 남자친구건, 절친이건 다 견딜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인간관계 제로의 상황에서 혼자 아싸-아웃사이더이고 싶었다. 아무하고도 이야기 하지 않고, 나 혼자 밥 먹고, 나 혼자 글 쓰고, 나 혼자 산책하고, 나 혼자 자고 싶었다. 그래서 낯선 곳으로 떠날 때, 후련했다. 드디어 나 혼자가 되는구나. 나를 너무나 옭아매는 이 인간관계의 거미줄에서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나에게 인간관계는 지독한 ‘거미줄’로 느껴졌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도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로 사는 이상, 월든처럼 혼자 숲에 들어가서 자연인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인간관계라는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실히 거미줄을 약하게 만들수는 있었다. 상해에 있으면서는 한국과 가까웠기에 여전히, 거미줄을 어느정도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 놓기는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위해서는 잡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그래서 뉴질랜드로 떠났다. 혼자 워킹 비자를 받고, 혼자 현지 회사에 취직해서, 한국인도 없이, 혼자 모든 것을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 스물 여섯. 드디어 나는 용기를 냈다. 용기였을까 아니면 그만큼 거미줄이 싫었던 걸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로부터의 ‘자유’. 나는 그것을 갈망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쉽게 연고 없는 곳에 맨땅 헤딩하기, 혼자 여행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유로운’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인간관계와 자유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온전히 아는 사람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며칠 이상 지내다 보면, 외로워진다. 누군가와 교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그제서야 절절히 깨닫는다. 얼마나 외로웠냐면 방구석에 거미줄을 친 거미와 대화를 할 정도로. 거울속의 나와 대화를 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외롭다고 토로할 수도 없었다. 다들 그러게 왜 혼자서 외롭게 거기서 그러고 있냐고 돌아오라고 하니까. 심지어 나 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시켜서 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외롭고 싶다고 해서 외로움을 선택했으면서, 막상 혼자 있어보니 외롭다고 징징대는 꼴이라니. 





어찌됐든, 외로우면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된다. 호스텔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사람들에게 스리슬쩍 말을 걸든,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친한 척을 하든, 바에 가든. 이 과정에서 또 느끼는 바가 있는데, 외롭다가 친구를 찾게 되면 상대방과 상관없이 초반에는 외로움이 좀 덜어지는 느낌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향이 맞지 않음을 발견하면 결국 다시 외로워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트레스로 발전해 차라리 혼자 외로운 게 낫다,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진정으로 나의 외로움을 조금 줄여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예상치 못하게, 운명같이 우리는 서로를 만나 친해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딜 가든, 그런 친구 한두명만 찾아낸다면 나는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친구 한 둘을 아직 못 찾았다면, 그래도 괜찮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름 나와 맞는 부분들을 찾으면 된다. 학교 이야기로 공감할 친구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면 되고, 회사에서 만난 친구는 회사 이야기로 공감하면 된다. 서른인데도 싱글인 부분을 공감할 사람을 원하면 같은 서른이고 싱글인 친구를 찾으면 된다. 우울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줄 사람? 단짝을 찾지 말고 테라피스트를 찾아야 한다, 제발. 반드시 모든 사람들과 최고의 단짝일 필요는 없고, 그렇게 나와 판박이처럼 꼭 닮은 친구도 없다. 



나와 판박이처럼 꼭 닮은, 내가 어딜가서 뭘 하든 나를 이해하고, 지지하고, 수다 떨고, 위로해 줄 영혼의 단짝은, 나에게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얼핏 들으면 자아분열증처럼 들릴 수 있는데, 캔디가 거울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게 이해가 간다. 상상하면 웃긴데, 내가 혼자 외롭다고 찔찔 짜고 있을 때, 누구도 나만큼 나를 깔깔 웃길 만한 드립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그 누구도 이렇게 찰지게 욕해주지 않고, 누구도 나만큼 내 마음에 쏙 들게 막춤을 함께 춰주지 않는다. 여러 심리 책을 읽으니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내면의 힘이 충분하다는 거라고 했다. 우울할 때는 나 자신 친구? 따위는 나오지도 않는다. 그럴 때 우린, 단짝이 필요하다. 





어딜 가든, 결국에 그 곳에서 반드시 한 명 이상 단짝들을 만났다. 사람은 외롭기만 한 존재고 세상에 운명과 사랑은 단 하나뿐이라는 말을 그래서 나는 믿지 않는다. 혼자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살지 않는 이상, 어디에서건 반드시 당신의 인연은 있다! 절친이든 연인이든.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대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짝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가끔은 도착하자 마자 만났지만, 가끔은 한달,두달, 세달이 지나고서야 만나고, 가끔은 그냥 친구였던 것이 몇달이 지나 단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하고나 ‘단짝’이 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떠나야 할 때 더욱 슬픔을 느낀다. 아무리 내가 인연을 붙잡고 싶다 해도, 흘러가는 강물처럼 인연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야 만다. 서로의 인생길이 달라지고, 서로의 사람들이 달라지고, 서로의 공감대가 달라지면서 그렇게 우리는 소중한 과거의 추억으로 남게 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로 채운다. 



그것이 슬프고 허무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뭐해. 나는 또 떠나고, 또 다시 처음부터 나를 소개해야 하고, 누군가를 알아가는 그 과정을 되돌이표로 시작해야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머무르는 걸까. 

예전에 내가 머물러 있었을 때는 그 인연들이 나를 얽매는 ‘거미줄’이라 느껴졌는데, 돌아보니 나를 허공에 매달려 있게 해주는 수많은 인연의 끈들이었다. 거미줄을 끊고 나와 오로지 홀로 새로운 거미줄 치기를 여러번 시도해보고 나서야,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참으로 벅차게 많았음을 깨닫는다.




괜찮다. 어딘가에 정착해서 또 하나하나 인연을 만들어가다 보면, 어느 샌가 나는 또다시 거미줄같은 인연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나는 친구를 잘 만드니까. 

그리고 이제는 그 거미줄에 더 이상 얽매이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무늬를 직접 짜는 법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내게 중요한 관계들을 선택하고, 소중히 여기고, 나머지는 가지치기를 하면서. 

라셸과 내가 함께 보내는 네덜란드에서의 시간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열심히 라셸과 놀아야 한다. 오랜만에 찾은 단짝과 함께 하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한다. 미래에 나는 어디에서 어떤 또 다른 ‘단짝’을 만나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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