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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Apr 26. 2022

딩크와 맘충의 사회학

사회 변화에 대한 여러 단상들


1. 사적인 영역이라 2020 우리나라 대선에서는 아무도 건드리진 않았지만, 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그 부인을 보면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언더우드 부부가 생각났다. 한가지 명확히 할 것은 절대 그 둘이 언더우드 부부처럼 멋지다는 말이 아니며, 권력을 위해 타락했다는 말도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가족관계에 대한 것이고, 그것이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특히 부인인 클레어에게 선거에서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언더우드 부부는 윤석열 부부와는 달리 일찍 결혼 했다. 클레어는 그 당시 대학생이든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였고, 프랭크 언더우드는 이미 30대 정치인이었다. 남부 부잣집 귀한 딸이었던 야심만만한 클레어는 프랭크에게 같은 야심을 보았고, 자신의 재산으로 프랭크를 지원하기 위해 아빠도 설득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사랑과 야망의 합작이었다. (요 부분은 윤 부부도 비슷할까나)


클레어가 임신 중절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프랭크와 클레어는 불임부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전히 그들의 선택이었고, 그래서 '딩크로 살기로 한' 그들의 선택이 정치적 약점이 되었다. 정치적 약점이 된 이유는 1)아이도 없는 사람이 미래를 책임질 동기가 얼마나 있느냐, 2)'일반적 가족'이 아닌 사람이 얼마나 '일반 가족'에 대한 사항을 이해하겠느냐, 3)미국의 일반적 '크리스천 가족'과 다른, 그래서 '덜 가족적'이고 친근한 이미지, 등등이었다.(안 그래도 클레어는 상류층 출신이라고 공주 이미지로 공격을 받았는데 말이다.) 이 부분을 정확히 파악한 상대후보자는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내세우면서 언더우드를 깎아내렸다. 


윤석열 당선인 부부의 가장 큰 스캔들은 물론 다른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지만, 그 논란은 차치하고, 나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 선거와 정치판에서 아무도 윤석열 부부의 '비전통적인 가족'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놀랐다.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 중 (배우자가 있는) 아무도 '자식'이 없는 후보는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지 않는 시기에 결혼을 했고, 배우자는 대개 내조의 여왕이고, 정치적으로 성공할 때 쯤이면 이미 어느정도 성장한 자녀를 두고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 놈의 '자식'들이 항상 논란거리가 되니, 이제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는지도 모른다...) 윤석열 당선인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시기(?)를 지나 결혼을 했고, 부부는 아이 대신 반려동물들을 키운다. 딩크 부부가 한국 사회에서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애는 왜 안 낳느냐, 왜 애가 없냐, 애가 있어야 한다' 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한국 사회에서 '늦은 결혼으로 아이가 없는 후보자' 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언더우드 부부가 공격당했던 것 같은) 은 놀랍다. 

아마도 '검사'라는 전문직을 위해  개인적인 사항인 '결혼'을 미뤘다, 라는 사회적 수용과 (그만큼 사법고시라는 것은 모든 희생을 정당화 시켜줄 수 있는 대단한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 늦게 결혼해서 애 낳을 시기를 놓쳤다는데 그게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인정,(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언더우드 부부와는 달리) 그리고 이제는 애를 낳든 말든, 애 대신 개를 키우든 말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의 변화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가 없어서 부족하 가족적인 이미지, 친근한 이미지를 윤석열 부부는 여러마리의 반려 동물들과 교감하는 모습으로 보완하고, 이는 또한 예전같았으면 어떻게 '애'가 '개'와 같냐고 '개'를 우리 아이처럼 사랑하는에 대해 사회적 거부감이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누구든 다 같은 형태로 살 필요는 없고,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라는 가치관은 서구 문화의 개인주의에 기반한다. 개인주의적인 사회는 특히나 '계약'에 기반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대신,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계약'을 맺고 그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사회는 개인을 무리에서 벗어나 훨씬 자유롭게 해 준다는 부분에서 튀어나온 개인은 집단에서 정을 맞아야 한다는 한국의 전통적인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계약에 기반한 사회는 사람들 간의 신뢰도가 낮다. 신뢰도가 낮으니 계약을 맺는 것이다. 사람간의 관계를 '계약'으로 이루는 것은 서로간의 엇갈리는 기대에서 나오는 충돌,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부담감, 상대방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실망감을 모두 제거해 버리는 훌륭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만큼 서로간의 사회적 믿음은 부족한, 소위 '정'없는 사회로 변해간다. 

예를 들면 아이를 혼자 걸어서 학교에 가도록 한다. 남들이 우리 아이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봐 주리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나 또한 다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봐 준다. 후배에게 밥을 사 준다. 선배가 나에게 밥을 사 주었었고, 나는 이를 후배에게 갚는다. 나의 후배는 또 자신의 후배에게 갚겠지. 내가 타인에게 해 준것은 또 나에게 돌아오리라는 믿음, 이것이 사회적 믿음이고, 사회적 믿음이 높은 조직에서 사는 사람은 훨씬 덜 외롭고 만족도와 행복이 높다. 


사회적 믿음이 낮아지는 현상은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널리 퍼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시화에도 문제가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서로를 알지못하는 익명성, 알지 못하니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계약에 의존하게 된다.  



2. 나도 한국의 집단적인 문화를 답답하게 여긴 사람이고, 개인주의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작은 동네에 살아본 경험이 거의 없는 도시 출신의 사람이라 계약 관계를 훨씬 편하게 여긴다. 인간관계가 계약관계보다 훨씬 복잡하고, 까탈스럽고,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까. 그래서 '맘충' 사태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있다는 핑계로, 엄마라는 이유로 사회의 암묵적인 계약관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화가 날 수 있다. 그런데 60이 넘은 우리 엄마를 돌아보면, 우리 엄마도 '맘충'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데도 컨트롤를 하지 못하는 엄마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외벌이에 줄줄이 애 넷을 키우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언제나 조금이라도 할인을 받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식당에서 아이들이 먹지 못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진 않았지만, 1개 시켜서 둘이 나눠먹는 그런 것들이라든지, 애 숫자대로 4개- 남들보다 많이 살테니 대신 좀 덤을 주라고 한다든지, 그런 것들. 

나의 '요즘 것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진절머리가 난다. 엄마, 깎아달라고 하지마. 뭐하러 아쉬운 소리를 해. 그 사람들도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정정당당하게 돈을 주라고.


그런데 돌아보면, 사람들은 대개 너그러웠다. 조금 더 많이 팔아주면 조금 더 얹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엄마가 말하기 전에도 무언가를 더 챙겨줬다. 아이를 줄줄이 달고 다니는 엄마가 그 시절에 얼마나 졸라매고 살았을지 다들 이해 했던 것 같다. 다들 그런 수준으로 살았으니까. 인간적인 관계-엄마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예뻐해주는 관계-를 넘어서 내가 조금 더 챙겨주면 그만큼 우리 가게에, 식당에 더 올거라는 믿음이 있었겠고, 같은 시기를 지났었던 자신이 겹쳐 보였던 것 같고, 무의식 중에 내가 젊은 엄마와 아이들을 챙겨주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나의 아이들을, 나의 손주들을 챙겨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지 않았을까. 

엄마는 감사히 받았고, 그런 교류를 보는 어린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서로, 베풀고 받고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자본주의 '경쟁'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 세상에서, 내가 돌려받지도 못할것 처럼 보이는 호의는 사치스러워졌다. 이제는 한 번 오고 안 올 손님들도 많은데, 차라리 이번 한번에 내가 계약한 금액을 정확히 받아내는 게 낫다. 한 번 보고 안 볼 아이들, 내 아이들도 언젠간 같은 돌봄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안 그래도 최대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있는대로 가격을 내려놓아서 더 이상 할인을 해 줄 여유도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 뿐아니라 다들 그렇게 칼처럼 계산하는데 나만 호구로 살 수도 없다. 이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정도는 구매하거나 투자할 여유가 되는 생활 수준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 물건값을 깎거나 추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다른 방식의 사회적 관계를 배운 사람들은 새로운 관계가 낯설 수밖에 없다. 저도 모르게 사회적 기대치가 있다. 서로서로 돕고 살고, 이정도는 배려해 주고, 이해해 줬으면 하는 관계. 그러면서도 하나나 둘이라 너무나 귀중해진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강력한 마음. 

예전에는 심지어 식당이나 까페에서 애가 물건을 깼어도 소송이나 출입금지까진 가지 않는다. 어차피 다 같은 한 동네에 사는 주민이고, 주인이 아이를 혼낼 수 있고,(엄마는 오히려 더 혼내주라고 한다), 그것이 같은 동네의 애를 봐주는 어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똥기저귀를 버리고 가면 동네방네에 소문이 나서 그럴수가 없었다. 

이제는 익명성 뒤에 숨어, 감당해야 할 사회적 부담감이 사라지니 계약관계만 남았다. 계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나 '아이'와 '육아'가 얽힌 문제다. 교육 수준과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 자아 실현 등을 위해 본래  자연스럽게 출산률이 낮아지는데, 거기에 더해 잘 못 키울거면 낳지도 말라는 사회에서 어떻게 출산율이 오르겠는가. 


과거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는 와중에 생겨나는 다양한 단상들.

과거에는 금기되었던 것이 현재는 인정되고, 

과거에는 인정되었던 것이 현재는 금기된다.

사회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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