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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Jul 22. 2021

3. 죽음이 가까워질 때, 우리는 어디에서 살게 될까

3. 집 : 아흔

우리 외할머니와 나는 60 갑자 차이, 띠동갑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일하느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나와 남동생을 키워 주셨다.

아직까지도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유모차에 나를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손주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셋째가 생기고 엄마가 결국 퇴사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시기는 끝이 났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사나?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의 엄마 아빠기도 하다. 

어떻게 자신의 엄마 아빠를 매몰차게 나몰라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아빠의 엄마가 홀로 되었을 때, 우리 집에 친할머니가 오셨었고

엄마의 엄마가 홀로 되자, 우리 집에 외할머니가 오시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절대 너희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하던 분이셨다.  

죽어도 자식들 중 누구와도  함께 살지 않겠다고 하셨고, 본인의 노후준비를 스스로 하겠다고 하셨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의 몸도 마음도 차츰차츰 약해져 갔다.

혼자 사는 것이 두려워지셨고, 마음을 의지한 곳이 필요하셨던 것 같다.

4남매 독립이 이제 막 끝난 우리 집에, 그렇게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처음에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실 때만 해도, 우리는 할머니를 예전의 할머니로 생각했다. 

내가 지금 우리 엄마와 함께 친구처럼 여행다니고 함께 외국에서 한 달 살기를 상상하듯, 

할머니는 할머니의 생활을 하고, 엄마아빠는 엄마 아빠의 생활을 하고, 

집을 맡기고 엄마가 여행을 갔다 오기도 하면서 오순도순 함께 살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봐주던 갓난아기였던 나는 어느덧 자라 

그때 그 갓난아기를 낳았던 엄마의 나이, 서른이 되었고

서른이던 엄마는 어느새 나를 돌봐주던 할머니의 나이, 예순이 되어버렸다. 

그 동안 우리 할머니는 어느새 우리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나이, 아흔이 되었다. 

아흔이 된 할머니의 몸은 하나 둘씩 멈추어 간다.





젊었을 때 무거운 것을 이고 다니며 장사 하느라 비뚤게 주저 앉아버린 척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

어떤 안경을 써도 잘 보이지 않는 눈.

보청기를 달아도 들리지 않는 귀.

틀니를 해도 씹히지 않는 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소화기관과 생성되지 않는 뇌의 뉴런.


신체기능이 퇴화되어 갈 수록 마음도 같이 약해져 가서, 

예전의 씩씩하고 강하던 할머니는 어디로 가고 

침대에 누워 강아지처럼 맑은 눈으로 가족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답답해 말을 걸어 본다.

"할머니,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없다."

"할머니, 뭐 드시고 싶으신거 있어요?"

"없어."

"그럼 할머니,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

"아니."

"티비라도 틀어 드릴까요?"

"안 들린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외할머니의 귀여움을 받은 손녀딸로서,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돌아가시기 전, 가고 싶은 곳은 다 모시고 가리라. 

드시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드시게 해 드리리라.

하고 싶은 것은 내가 다 하게 해 드리리라.



하지만 내 계획에는 할머니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에 없었다. 

내가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어떤 시도도 할머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존재가 멍하니 죽음만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나 자신의 엄청난 무력함을 느끼게 하며 분노와 슬픔에 차오르게 만든다.



"왜 먹고 싶은게 없어?! 그럼 뭘 먹는다는 거야? 

왜 하고 싶은게 없어? 그럼 이렇게 누워만 있을거야 하루 종일??

아무데도 안 가고 싶으면, 햇볕도 안드는 방 구석에만 있는게 좋아??!"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짜증을 쏟아내자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하고 할머니의 순수한 눈이 깜짝 놀라 둥그래진다.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왜 할머니한테 짜증을 내냐고 나를 끌고 나간다.


"답답해, 답답해 죽겠어! 왜 할머니는 그래?"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히고 눈물이 차올랐다. 

"할머니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거였다. 

할머니는 더 이상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던 할머니가 아니라 

이제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나이가 먹으면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할머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사실 우리 가족은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누군가 할머니 옆에서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 하루 종일 할머니를 예뻐해 주면서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나도, 다 우리 각자만의 삶이 있으니까,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할머니에게 충분치 못하다는 것에 속상해 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답답해 하고,

할머니의 외로움을 느끼며 마음이 아파오고,

할머니의 쓸데없는 잔소리를 들으며 짜증이 나고, 

천장을 보며 살아갈 날을 세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애잔해 하고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할머니의 상황이 더 악화된다면, 결국 할머니를 요양 병원이나 기관으로 모시게 될까, 

아직까지도 고민한다.

노인 한 분을 모시고 함께 산다는 것은, 가족 전체 뿐 아니라 주 보호자의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한다. 

가족 전체가 비참해질 수 있다.

혼자 둘 수도 없다. 

결국 돌봄 기관으로 모셔야 하는데, 그 기간이 짧다면 좋겠지만 길어진다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 틈에서 얼마나 쓸쓸한 말로인가.


아흔의 할머니를 보면서

예순의 엄마도,

서른의 나도


죽음이 점점 가까워 질 때, 우리는 어디에서 살게 될까 생각한다.




엄마가 말한다.

"난 차라리 들어 갈란다. 절대 너희랑 같이 안 살란다."

"저기요, 할머니도 똑같이 말하셨었거든요,"

나는 엄마를 타박하며 할머니 밥상을 차리는 걸 돕는다.



이미 개인주의, 도시화된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갑자기 농경사회의 대가족이 어쩌면 더 인간적인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가족이 함께 끝까지 살면서 노부모 모시는 걸 돕고, 

노부모는 가족들 틈에서 끝을 준비하고. 



젊어서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죽기 전에 너무 외롭지 않게, 마음 편히 살다 죽을 곳 하나 없다면.


우리 할머니가 바라는 대로 내가 해 줄 수는 없지만,

그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잘 해드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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