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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Dec 29. 2020

할머니 귀에 경 읽기

할머니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바로 내 욕심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항상 속이 상해 있다. 

말을 듣지 않는 다리가 속상하고, 눈이 잘 안보여서 글씨를 못 읽는 것이 속상하고, 잘 들리지 않는 귀가 속상하고, 뭐든지 씹히지 않는 틀니가 속상하다. 남편이 날 두고 떠나서 속상하고, 자식들이 내 맘 같지 않아 속상하고, 매일 가는 복지센터가 재미 없어서 속상하다. 복지센터도 사실은 가기 싫은데, 안 가면 할 일 없이 집에 혼자 있어야 해서 속상하고, 본인은 심심한데 같이 사는 가족들은 각자 바쁘게 밖으로 도니 속상하다. 



나는 속상한 할머니를 보는게 속상해서 어떻게든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할머니, 뭐 맛있는 것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해도 아무것도 맛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할머니. 

매운 것을 못먹겠다고 해서 안 매운 반찬을 다양하게 생각해보았다. 뭐든지 먹고 야, 이것 참 맛있다! 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데 할머니는 계란도 안 먹는다고 하고, 두부도 안 먹는다고 하고, 고기도 나물도 아무것고 질겨서 못먹는다고 한다. 어묵도 몇번 잡수시면 끝, 특식이라고 파스타를 해 드려봐도, 볶음밥을 해 드려도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었다. 




할머니, 사람은 다 늙는 거잖아요. 당연히 나이가 구십이 넘으면 허리도 굽고, 다리도 아프고, 발도 시리고 한 거죠. 원래 그래요. 그러니까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봐요. 심심하니까 색칠놀이를 해보면 어때? 아니면 요런 두더지 잡기 게임은? 큰 글씨 시집 사왔는데 이걸 한번 읽어봐요. 

누워서 멍하니 있는 할머니를 보며 마음이 아파 어떻게든 할머니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재미가 없다고 하셨다.



어쩌다 이 모양으로 폭삭 늙어버렸을까. 너는 젊어서 좋겠다. 

이렇게 자신의 늙음을 한탄만 하는 할머니에게 나는 말한다. 할머니,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나이먹었다고 제대로 못 걷는다고 엄청 그랬었잖아, 지금 돌아보니 그때 훨씬 기운 넘치던 시기였잖아, 지금 이 순간이 내 남은 삶에서 가장 젊은 날이래. 그러니까 할머니 지금 오늘 하고 싶은 걸 해! 나중에 가면 오늘 이렇게 누워 있는걸 후회한다니까? 뭘 하고 싶어요? 우리 뭐 할까? 

그래봤자 할머니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단다. 



할머니와 재미있는 티비 프로그램을 봐도 말이 안들린다, 흥미가 없다 하시고, 

여행은 커녕 산책 나갈까 휠체어를 밀까 해도 안 나간다 하시고, 심지어 개인 노래 교실을 열어봐도 감흥이 없다. 

할머니, 왜 아무것도 안하려고 해. 하면,

이 나이 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 라고 대답한다. 

내가, 나이 들었어도 씩씩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잖아! 몸이 아픈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셔야죠, 라고 반박하면, 어디서 들었는지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라고 대답하며 너는 내 마음 모른다고 몰아가 버린다.




이 이야기만 들으면 할머니가 우울증인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빨리 죽고 싶으신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해가 안되는 점은, 우리 할머니는 정작 절대 죽고 싶지 않고, 무지하게 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혹시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화장실에 제대로 못 가서 죽게 될까봐 두려워 하시고, 

밤에 헛것이 나와 본인을 데려가실까 두려워 하신다.

나는 답답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살아야 할 것 아냐. 이왕 살거면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 아냐. 왜 그렇게 불행해 하면서도, 살고 싶어 하는거야. 왜 이왕 죽을 것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죽겠다고 하지 못하고, 안 그래도 힘겨웠던 인생, 마지막까지 우울하게 살려는거냐고! 



그래서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내가 어떻게 한대도, 어떤 좋은 것을 갖다 드린대도, 어떤 맛있는 음식을 대령한다 해도, 할머니의 마음속에 행복과 평화가 가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는 너무나 무력했고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음, 할머니가 원하는 일이 있긴 하다.

눈 수술을 하거나 안경 도수를 높여서 앞이 쨍하게 잘 보이는 것. 귀 수술을 하거나 보청기를 껴서 귀가 뻥하고 잘 들리는 것. 딱 맞는 틀니를 새로 만들어서 뭐든지 짝짝 씹어 먹는 것. 어떤 수술을 해서든, 굽은 허리와 아픈 다리를 쫙 펴고 혼자서 마음대로 걷게 되는 것. 



우리 가족들은 모두가 할머니의 소망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본인이 원하시는 일이기에 병원 순례를 했다. 어느 병원을 가도 할머니가 원하는 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할머니, 안경 도수가 더 이상 어떻게 안돼요. 무슨 수술이든 온 가족 동의 다 받아오셔야 해요, 위험합니다. 할머니, 이 틀니도 새로 하신 거잖아요, 바꿀 필요 없습니다. 



할머니는 왜 늙음을 받아들이시지 못하는 걸까? 왜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정리하고 가실 생각을 못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헛된 기대와 회한, 후회에 사로잡혀 계신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보청기를 위한 청력 검사 후 의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잘 안 들리시는 건 귀의 기능 저하도 있지만, 뇌의 문제도 큽니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급속도로 온 치매는 아니지만, 서서히 퇴행하고 계시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는 더 이상 우리가 아는 할머니가 아니라는 걸. 할머니에게 더 이상 ‘나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걸. 


지금까지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가 더 이상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라는 것을. 할머니는 차츰차츰 아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건, 나는 그것을 막을 수도, 그리고 할머니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아기가 된 할머니가 행복할 때는, 마치 아기에게 관심을 주듯 우리 가족 누군가 할머니 옆에서 계속 붙어 앉아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최대한 할머니 마음이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 뿐이다. 짜증 내지 않기, 화내지 않기, 더 다정하게 해 드리기. 아기 달래듯 달래 주고 챙겨주기. 밥 먹을 때 반찬 잘라서 얹어 주기. 될 수 있으면 시간 내서 화투 같이 쳐 주기. 



내가 할머니에게 왜 행복하게 살지 못하느냐고 채근하는 것조차, 

나의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욕심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변해버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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